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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과 통하는 사람 (요일 2: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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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과 통하는 사람 (요일 2:1-11)


미국 하바드 대학의 설립자인 남북 전쟁의 영웅 하바드 장군이
미국 서해안 지역을 방문하려 했을 때
그의 절친한 친구들이 그를 즐겁게 해 주기 위해서
몰래 환영 파티를 준비하고 있었습니다.
그 친구들은 그 지역의 유명 인사들을 초청해 놓고 수요일 날을 정하여
하바드 장군이 도착했을 때 자신들의 계획을 알렸습니다.
하바드 장군은 친구들의 계획을 듣더니 진지한 얼굴로 이렇게 말합니다.
[ 친구들, 고맙네만
수요일은 중요한 약속이 있으니 목요일로 연기해줄 수 없겠나? ]
그러나 친구들은 펄펄 뛰면서
[ 장군, 이번에는 미국의 유명 인사들을 대거 초청해 놓았으니
만약 파티가 연기되면 유명 인사들과 교제가 끊겨질 건데 어찌하겠나? ]
그러자 하바드 장군이 하는 말이
[ 내게는 유명 인사들과 교제보다 하나님과 교제가 더 중요하다네
당신들이 알다시피 나는 그리스도인이네
나는 주일과 수요일 예배 때에 주님과 만나기로 약속했기 때문에
나는 주님과의 약속을 깨뜨릴 수가 없어서 그런다네 ]
결국 그 파티는 목요일 날로 연기되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이 사실이 미국 역사책에 기록되어 있다고 합니다.
하나님과 교제가 더 중요한 사람
오늘도 하나님과 더 잘 통하는 사람, 하나님이 들어 쓰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이 사람을 만드시고 창1:28절에
[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 고 하시며 복을 주셨는데 사람들이 땅위에 번성하기 시작하니 창6:5절에
[ 여호와께서 사람의 죄악이 세상에 관영함과
그 마음의 생각의 모든 계획이 항상 악할 뿐임을 보고
땅 위에 사람 지으셨음을 한탄하사 마음에 근심하시고 ] 할 때에
그래도 하나님의 시선이 집중하는 한 사람이 있습니다.
바로 아담의 10대손 노아입니다.
성경은 노아를 소개하면서 창6:9절에
[ 노아는 의인이요 당세에 완전한 자라 그가 하나님과 동행했다 ] 고 합니다.
하나님과 동행했다는 말은
모든 사람들은 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단절되었지마는
노아만큼은 하나님과 통하는 사람이었다는 말입니다.
오늘 우리도 이 시대에 노아같이 하바드 장군같이
하나님과 통하는 사람이 되시기 바랍니다.

그럼 무엇이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를 단절시킵니까? <2>
1. 하나님과 우리와의 관계를 단절시키는 첫 번째가 무엇입니까?(1절)

1절 [ 나의 자녀들아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씀은
너희로 죄를 범치 않게 하려 함이라 ]
사도 요한은 부모가 자식에게 애정과 진심으로 말하듯이
당시 교회와 우리들에게 말합니다.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씀은 먼저 4절에
[ 기쁨이 충만케 하려 함이라 ] 말하며
오늘 본문 1절에서 또
[ 내가 이것을 씀은 너희로 죄를 범치 않게 하려 함이라 ] 합니다.
구원받은 성도의 삶의 특징은 바로 기쁨이 충만한 삶입니다.
이 기쁨 어디서 옵니까?
바로 기쁨의 근원되시는 예수님이 주신 것입니다.
그런데 사탄은 구원받은 성도가 누리는 기쁨의 삶을 뺏어가려고 합니다.
어떻게? 바로 죄를 짓게 해서
하나님과 우리 사이를 가로막으려고 합니다.
엡2:14절에 죄는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중간에 막힌 담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다윗은 범죄한 후 회개할 때에 시51:12절에
[ 주의 구원의 즐거움을 내게 회복시키시고 자원하는 심령을 주사 ]
우리가 죄를 짓고 나면
무엇보다도 삶의 기쁨이 없어집니다.
그리고 자원하는 심령,
즉 기도하고 싶은 마음, 예배드리고 싶은 마음,
주의 일 하고 싶은 마음이 소멸되어 버립니다.
사도 요한은 우리들에게 죄를 범치 않게 하기 위해 이 글을 쓴다고 합니다.
성경은 히12:4절에 [ 죄와 싸우되 피 흘리기까지 대항하라 ] 고 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죄 안 지어야지 하고 마음만 먹으면 죄를 안 짓느냐?
그렇지 않다는 것이 현실입니다.
어느 교회 집사님이 도박에 빠져서 교회에 오면
[ 예수님 제발 화투가 눈에 사라지게 하옵소서 ] 기도하면 할수록
교회 예배 마치고 나오면 앞에 가는 차량번호가 5789가 보이니
[ 야! 오칠팔 짓고 갑오구나 ] 딱 눈에 들어오더랍니다.
죄 안 지어야지 마음먹지만 그게 마음대로 되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그기에 빠져들어 가서는 안 되지요.
이런 말이 있지요.
[ 공중에 날아가는 새가 가지 위에 앉을 수는 있지만
집을 짓도록 놓아두어서는 안 된다 ] 는 말과 같이
순간, 순간 죄의 유혹이 들어오지만 죄를 지어서는 안 되겠지요.
그런데 감사한 것은 <3>
하나님이 우리의 연약함을 아시고
혹 죄를 짓는다고 해도 죄사함을 얻을 수 있는 길을 예비해 놓았습니다.

1절 그 다음을 보세요
[ 누가 죄를 범하면 아버지 앞에서 우리에게 대언자가 있으니
곧 의로우신 예수 그리스도시라 ] 고 합니다.

2. 그럼 우리가 하나님과 교통할 수 있는 길은 무엇입니까?(1-2절)

얼마나 감사한 일입니까? 우리에게 대언자가 있다고 합니다.
대언자가 뭡니까?
대언자란 <파라클레토스>라 하는데 보혜사 성령님과 같은 말입니다.
<대언자>란 ‘변호자, 위로자, 중보자’ 라는 뜻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왜 우리의 <대언자>이십니까?
그분이 <우리 죄를 위한 화목제물>이시기 때문입니다.
2절에 [ 저는 우리 죄를 위한 화목제물이니 ]
<화목제물> (휠라스모스)이란
죄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를 막기 위한 제물입니다.
구약에는 짐승의 피를 흘려 화목제물로 드렸습니다.
그러나 짐승의 피로써는
끝없이 죄를 짓는 인간의 죄를 근본적으로 속량할 수 없습니다.
어디 까지나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화목제물의 예표입니다.
히7:26절에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단번에 자신을 드려
우리가 날마다 제사드릴 필요가 없도록 영원한 화목제물이 되셨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과의 교제를 회복하는 방법은
죄를 자백하면 됩니다.
1:9절 [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저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모든 불의에서 우리를 깨끗게 하실 것이요 ]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갈 수 있는 길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늘 열려져 있습니다. 하나님의 자녀인 우리가 가로막힌 죄를 뉘우치고,
그것을 그분께 자백하는 순간
우리는 새롭게 완전한 교제를 회복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약속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우리의 죄를 용서해 주실 것을 믿어야만 합니다.
마귀는 옆에 와서 자백하고 회개하려는 우리에게
[ 빈대도 낯짝이 있지 니가 한 번 두 번이가? ] 라고 하면
우리도 맞받아 쳐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마18:21절 이하에서 하신 말씀 <4>
[ 주여 형제가 내게 죄를 범하면 몇 번이나 용서하여 주리이까?
일곱 번가지 하리이까? ]
[ 아니 일곱 번 뿐만이 아니라 일흔 번씩 일곱 번이라도 용서해주라 ]
그러니 마귀가 [ 빈대도 낮짝이 있지] 하거든
[ 아직 490번은 멀었어 ] 하고 주님 앞에 자백하면
하나님과 통하는 길이 열려질 줄 믿습니다.
성경 창28:을 보세요.
야곱이 아버지 이삭과 형 에서를 속이고 도망가다가
루스 광야에서 꿈 가운데서 하나님 만났을 때
하나님이 야곱에게 제일 먼저 보여 주신 것이 무엇입니까?
사닥다리 환상인데, 사닥다리 끝이 하늘에 닿았는데
그 사닥다리에 천사들이 오르락 내리락 하고 있는 장면입니다.
뭘 말합니까?
우리는 사닥다리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줄이 하나님께 닿아있는 사람들입니다.
이제는 하나님과 통하는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백 그라운드가 되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과 교제가 뜸해 졌다고 생각되거든
하나님 앞에 엎드리시기를 바랍니다.
자백하시기 바랍니다.
2절에 화목제물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는
모든 시대, 모든 사람의 죄를 위해 피 흘리신 것이며
또 현재 범하고 있는 우리의 죄까지도 포함하고 있기 때문에
우리는 자백을 통해 속죄함의 은혜와 기쁨을 누리는 성도가 되시기 바랍니다.

그럼 우리가 하나님과 교제를 유지하는 비결이 무엇입니까?
3. 하나님과 통하는 사람의 삶의 자세는 어떠합니까?(3-6절)

그것은 우리가 빛 가운데 거하는 삶인데
빛 가운데 산다는 것은 <주의 계명을 지키는 것>입니다.
3절 [ 우리가 그의 계명을 지키면 이로써 우리가 저를 아는 줄로 알 것이요 ]
우리가 하나님과 통하는 사람이라는 것은
우리가 주의 계명을 지키는 삶에서 나타나는 것입니다.
누가 주의 계명을 다 지킬 수 있습니까?
주의 계명을 다 지킬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주의 계명대로 살려고 노력한다는 것입니다.
맞습니까? 그렇지 않다면
내 속에 예수의 영이 있는지 한 번 점검해봐야 합니다.
문제는 예수 믿는다고 하면서 <5>
말씀에 순종하는 삶을 살려고 하지 아니한다는데 있습니다.
4절에 [ 저를 아노라 하고 그의 계명을 지키지 아니하는 자는
거짓말하는 자요 진리가 그 속에 있지 아니하되 ]
여기서 거짓말하는 사람들은 <영지주의자>들을 가리킵니다.&nbsp;
지금 사도 요한은 <영지주의자>들의 주장에 대하여 반박하고 있는 것입니다.
영지주의자들은 자신들만이 영적인 지식을 가지고 있다고 주장하면서도.
그들을 주님의 계명을 무시하고 지키지 아니합니다.
그러므로 저들이 하나님과 잘 통한다.
하나님을 잘 안다 하는 것은 거짓말이란 말이지요.
오늘도 말로는 혼자 예수 잘 믿는 것같이 떠 벌리면서도
주의 계명을 지키지 아니하는 교인들
한 마디로 하나님 안다고는 하지만 하나님 만나지 못한 사람입니다.
헬라어 “안다”는 말 <기노스코>
단순한 지식이 아니라 경험적인 지식을 가리키는 단어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안다>는 것은
<하나님의 임재의 경험>을 뜻하는 말입니다.
그러니 예수 믿는다고 하면서
주의 계명을 지키지 아니하는 교인은
아직 하나님 만나지 못해서 그렇습니다.
하나님 만나는 체험이 없어서 그렇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만나 하나님을 체험하게 되면
하나님을 사랑하게 되고,
하나님을 사랑하게 되면 하나님 말씀이 듣기워지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5절 보세요.
5절 [ 누구든지 그의 말씀을 지키는 자는
하나님의 사랑이 참으로 그 속에서 온전케 되었나니
이로써 우리가 저 안에 있는 줄을 아노라 ]
사랑하게 되면 포로가 되고 맙니다.
사랑에 이끌리면 그 분의 말에 이끌리지 않을 수 없게 되는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하나님과 만나 하나님을 체험하게 되면
그때부터는 주의 말씀을 듣게 되고 따르게 되어 있습니다.
다시 말씀드린다면
하나님과 통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럼 사도 요한이 말하고자 하는 계명이 무엇입니까?
4. 옛계명과 세계명이 말하고 있는 것이 무엇입니까?(7-8절)

요한이 말하고자 하는 주의 계명은 하나님의 말씀 전체를 가르치기도 하지만
본문에서는 사랑을 말하고 있습니다.
이 사랑을 강조하기 위해서 사도 요한은 7-8절에서 <6>
옛계명과 새계명을 대조해서 말하고 있는데
내가 너희에게 새로운 계명을 쓰는 것이 아니라
전에부터 내려오는 옛계명을 말하는 것인데
그러나 다시 너희에게 강조하는 뜻에서 새계명이라고 말하는 것은
하나님의 사랑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새롭게 완성되었기 때문에
새계명을 쓴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헬라어에는 ‘새롭다’라는 단어가 두 개가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는 ‘네오스’이고 다른 하나는 ‘카이노스’인데,
‘네오스’는 시간적으로 새로운 것이고,
‘카이노스’는 질적으로 새로운 것입니다.
네오스란 말은 주로 물질적인 것에 붙여지는 말이지만
카이노스는 영적인 것에 부쳐지는 말입니다.
물질적인 것은 시간이 지나면 헌것이 되고 또 새것이 나옵니다만
질적인 것은 변화를 통해 새것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 요한이 말하고자 하는 것은
우리가 서로 사랑해야 한다는 것
구약에서도 하나님의 계명으로 전해내려 왔지만
새계명 - 카이노스란 말을 쓴 것은 질적으로 다른 사랑,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나타난 하나님의 사랑을 말합니다.
그래서 사도 요한은 새계명의 사랑을 요1서3:1절에서는
[ 보라 아버지께서 어떠한 사랑을 우리에게 주사
하나님의 자녀라 일컬음을 얻게 하셨는고 ] 하고 감탄을 합니다.
어떠한 사랑 - 포타포스 - 말로 다 설명할 수 없는 기이한 일을 말할 때
이 사랑이 벌써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우리에게 비췄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과 교통하는 사람은
이 사랑의 빛이 나타나야 하는 것입니다.
이런 말 있지요. 맛을 봐야 멋있게 산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십자가의 사랑을 체험해야만
사랑을 베풀며 살아가는 멋있는 그리스도인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과 통하는 사람의 특징입니다.

하나님과 교제하는 사람 즉 하나님과 통하는 사람의 특징이 무엇입니까?
5. 하나님과 통하는 사람의 삶의 특징이 무엇입니까?(9-11절)

빛 가운데 거하는 사람 즉 하나님과 통하는 사람은
9-11절에서 형제를 사랑하는 사람이라고 합니다.
아직도 미워하는 형제가 있으면
이 빛을 모른체 <어두운 가운데 있는 사람>입니다.
빛 가운데 사는 사람은 형제를 미워할 수 없습니다. <7>
하나님과 통하는 그 어떤 사람과도 통할 수 있습니다.
사도요한이 자녀 같은 사랑하는 성도들에게 진정 바람이 있다면
요3서2절에 잘 나타나고 있습니다.
[ 사랑하는 자여 네 영혼이 잘 됨같이 네가 범사가 잘 되고
강건하기를 내가 간구 하노라 ]
어릴 때 부흥회 하면 강사들이 자주 외치던 말씀
신통하면 물통, 인통한다는 말 - 많이 들었지요.
어떤 강사는 신통방통이라 해요.
신통하면 모든 것이 형통하다는 말입니다. 믿으시기 바랍니다.
요한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과 통하는 사람은 형제들과도 통하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통하는 사람이라면 형제와도 담 쌓는 일이 없기를 바랍니다.
1) 10절에 형제를 사랑하는 자는 자기 속에 거리낌이 없다고 합니다.
그러니 형제를 미워하고 형제와 담 쌓고 사는 사람은
아직도 그 속에 거리낌이 있다는 말입니다.
이 거리낌 <스칸달론>이란 말 - 꼭 마음에 두시기 바랍니다.
이 말은 <덫, 올무,&nbsp;함정>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스켈달론은 꼭 내게 덫이 되고 올무가 됩니다.
왜 형제를 사랑하고 원수까지도 용서해 주라고 합니까?
그 사람을 위해서가 아니라
내가 스켄달에 빠지지 않기 위해서, 내가 올무에 걸리지 않기 위해서입니다

안산에 대형교회 담임목사님의 설교 가운데 이런 간증이 있습니다.
남편이 딴 여자와 눈 맞아 아내와 삼남매를 버리고 가버렸습니다.
갈 곳 없는 그 아내는 서울에서 안산으로 이사와
전도 받아 그 교회 교인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온갖 모진 고생 다해가며 삼남매 모두 대학을 마치게 했고
20여년 교회 섬기며 권사 직분을 받아 충성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50세 중반부터 신부전증이 나타나
결국 합병증으로 임종을 맞게 됐습니다.
목사님이 마지막 병상 심방을 갔는데 심방 간 목사님께 용서를 빌더랍니다.
[ 목사님은 나의 남편을 용서하라 하셨으나 나는 도저히 용서가 안 돼 엊그제 찾아온 그를 저주하며 쫓아 보냈습니다.
그러나 목사님을 뵙고 이제야 그를 용서합니다 ] 하고는 눈을 감더랍니다.
그래서 목사님이 하나님께 항의를 했답니다.
하나님, 왜 죄진 사람은 저토록 건강하고 형통한 데
억울하게 버림당한 권사님은 고통으로 평생 살게 했습니까.
하나님의 응답이 마음에 이렇게 와 닿더랍니다. <8>
[ 죄 지은 사람의 죄보다 믿는 사람이 용서해주지 못한 죄는 더 크다. 용서는 상대를 위한 것이 아니라 실상은 너 자신을 위한 것이다.
용서란 네 마음을 고통을 제하는 것이다 ] 라고 하더랍니다.
성도 여러분 ! 비록 내게 어떤 손해와 상처를 입혔다 할지라도
그 사람에게 대해 한을 품으면 그 한이 되려 내게 덫이 되고 올무가 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을 맛보았기 때문에
형제를 용서하고 불상히 여기는 사랑의 마음을 일어나기를 바랍니다.

2) 그리고 아직 형제를 미워하는 자는 11절에 <눈 먼 사람>이라고 합니다.
11절 [ 그의 형제를 미워하는 자는 어두운 가운데 있고
또 어두운 가운데 행하며 갈 곳을 알지 못하나니
이는 어두움이 그의 눈을 멀게 하였음이니라 ]
눈먼 사람 - 모든 것이 막혀있는 사람입니다.
하나님과 통하는 사람은 사람들과도 통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그런 면에서 이번 한 명숙 총리에게 기대를 걸어봅니다.
한명숙 총리가 국민일보에
“내게 못박는 사람도 사랑으로 감쌀 것”이라는 제하에 기사가 실렸습니다.
한 총리가 3월 26일 주일날 일산의 한 교회에서 예배드렸는데
그 교회 담임목사님이 당시 한 총리후보를
단상쪽으로 불러 선물상자를 건넸습니다.
상자 안에는 웬 말뚝만한 쇠못 하나가 들어있었습니다.
이는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힐 때 쓰였다고 추정되는
15㎝ 정도 길이의 육각못을 실물 크기로 재연한 것입니다.
돌아와서 한 후보자는 총리실 간부들에게
[ 목사님이 못을 준 것은 예수님을 생각하면서
내게 못을 박는 사람들도 포용하라는 뜻일 것 ] 이라며
[ 그 점을 가슴 깊이 받아들이고 되새기면서 일할 각오 ] 라고 밝혔습니다.

내게 못을 밖는 사람도 포용할 수 있는 마음
이것이 바로 하나님과 통하는 사람의 마음이 아니겠습니까?
혹 우리 마음에 덫이나 올무가 없는지
혹 나의 눈을 멀게 하는 미움이 없는지
날 위해 십자가에 피흘려 돌아가신 주님 앞에 자백하고
그의 계명을 지키며 형제를 사랑하는 삶을 사는
하나님과 통하는 사람들 되시기 바랍니다.
요1서3:14절
[ 우리가 형제를 사랑함으로 사망에서 옮겨 생명으로 들어간 줄을 알거니와 사랑치 아니하는 자는 사망에 거하느니라 ]
(김성덕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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