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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의 피로 하셨습니다. 히브리서9:11-15 04.4.4.종려주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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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의 피로 하셨습니다. 히브리서9:11-15 04.4.4.종려주일.

일년52주가 있지만 그 많은 주간 중에서 특별히 이번 주간은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면서 가장 경건하게 살아야 할 주간입니다. 그런 의미로 이번 주는 지금까지 살아왔던 많은 날보다 좀 다르게 사는 한 주간이 되시길 바랍니다. 지금 미국에서 아주 흥행하고 있는 영화가 한편 있습니다. "패션 오브 크라이스트"라는 영화입니다. 지금까지 예수님의 일대기에 관한 많은 영화들이 나왔지만, 이번 영화처럼 리얼하고, 또 많은 역사가 일어나고 있는 영화는 없었습니다. 이번 영화를 미국에서 개봉하자마자 반유대주의를 부추킨다는 이유로 유대인들 그룹에서는 이 영화를 상영하지 못하도록 방해를 하고 있고 또 이 영화를 보면서 심장마비로 죽은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얼마 전에는 한 살인강도가 도망을 하다가 이 영화를 보고서는 죄책감을 느껴서 회개하고 자수를 했다는 이야기도 있습니다. 이 영화를 상영하는 극장은 하나의 교회가 되어버린다는 이야기들도 나오고 있을 만큼 유명한 이야기입니다. 이미 미국에서의 개봉2주만에 입장료가 2억달러 (약210억엔)이 넘는다고 합니다. 한국에서도 이번에 개봉을 하고 지난주 일본크리스챤신문에서도 그 영화를 취재한 내용을 읽어보았습니다. 예수님의 고난에 대해서 피장적으로 생각하고 있었던 우리들에게 아마도 엄청난 신앙적 도전과 새로운 믿음을 갖게 하는데 충분하리라 믿어집니다. 그 영화가 일본에서도 빨리 개봉하기를 기다리시길 바랍니다.
아무튼 이번 주간은 특별하게 보내시길 바랍니다. 교회에서는 특별새벽기도회를 준비하고 있고, 또 자율적으로는 금식도 하시고, 그리고 아직까지 끊어야 하는데, 끊어야 하는데,(음주,주초) 하면서 결단을 하지 못하신 분들은 이번 기회에 결단해보시길 바랍니다. 이번 일 주간만이라도 한번 도전해 보시길 바랍니다.
오늘 저는 오늘 본문의 말씀으로 주님께서 우리를 위해서 걸어가신 그 십자가의 고난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함께 말씀으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1. 당신의 피로 하셨습니다.
오늘 본문에 12절에 보면 염소와 송아지의 피 즉 짐승의 피로 하지 않고 자기(예수)의 피로 사하셨다고 합니다.
이말은 무슨 말인가 하면 구약의 제사법을 먼저 생각을 해봐야 합니다. 구약시대에는 자신의 죄를 짐승에게 안수함으로 전가하고 그리고 그 짐승을 잡아서 그 피를 제단에 뿌리는 것으로 죄사함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왜 짐승의 피로 아니하고 예수의 자신의 피 로하신다고 하십니까? 그리고 짐승의 피는 무엇이고 예수의 피는 무엇을 상징하는 것입니까?
히브리서 9장 22절에 보면 "율법을 좇아 거의 모든 물건이 피로써 정결케 되나니 피흘림이 없은즉 사함이 없느니라."고 합니다.
즉 피흘림이라는 것은 사함의 의미가 있습니다. 죄를 지었으면 그 죄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누군가가 피흘림이 있어야 누군가가 죄사함을 얻는 것입니다. 구약시대에는 죄사함을 얻기 위해서는 반드시 짐승의 피흘림이 있어야 했습니다. 그런데 짐승의 피는 어떤 효과가 있는가 하면 죄를 가리는 효과가 있습니다. 죄를 가려주는 것입니다. 겉으로 보기에 안보이게 가려주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피는 죄를 씻어주는것입니다. 씻는것과 가리는 것은 엄연히 다릅니다. 가리는 것은 죄가 안보이지만 여전히 있습니다. 가려진 죄는 마치 회칠한 무덤과 같은 것입니다. 겉은 깨끗하게 보이지만 속은 썩은 시체로 가득차 있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므로 언제까지 가리고만 살수가 없는 것입니다. 가린 것은 언젠가는 드러나게 되어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죄를 씻어주시는 분이십니다. 씻는 것은 완전히 없애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보혈은 바로 이런 능력이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죄의 가리움을 받으시겠습니까! 아니면 씻음을 받으시겠습니까?
더러웠던 것들이 깨끗하게 씻겨진 것을 보면 기분이 좋습니다. 사도행전에서는 3장19절에서"그러므로 너희가 회개하고 돌이켜 너희 죄 없이 함을 받으라 이같이 하면 유쾌하게 되는 날이 주 앞으로부터 이를것이요"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죄가 깨끗하게 씻겨진 것을 통하여 우리의 심령이 유쾌하게되어집니다. 더러웠던 옷이 세탁기로 깨끗하게 빨려지고 다 말랐을 때 그리고 그것을 걷을때의 마음을 기분이 좋은 것입니다. 밥을 먹고 더려워진 그릇을 깨끗하게 설것이를 하고 깨끗해진 그릇을 정리할 때의 마음은 기분이 좋은 것입니다.
우리가 이 땅에 살면서 수많은 죄악과 더불어서 먹고 마시고 그리고 우리의 몸과 마음이 심령이 스스로 보기에도 더렵혀졌다고 생각할 때 우리의 마음은 어떻습니까? 심한 죄책감으로 인해서 힘없이 살아가다가 우리의 모든 더러워졌던 것이 깨끗하게 사함을 받았을 때에 우리의 모습은 어떻겠습니까? 그야말로 유쾌한 것입니다. 기분이 좋은 것입니다. 임시로 가려진 것이 아니라 완전히 없어졌다고 생각하면 그것보다도 기분 좋은 일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예수님은 우리에게 그 죄 사함의 유쾌함을 위해서 짐승의 피로 우리의 죄를 언제까지나 가려주지 않으시고 자신의 피로 완전히 씻어 주신 줄로 믿습니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예수그리스도를 믿고 구주로 영접하신 분은 그리고 회개함으로 죄 사함을 얻으신 분은 이 땅에서 영원한 죄 사함의 축복을 얻은 줄로 믿습니다.

2. 단번에 사하셨습니다.
구약의 짐승의 피로 드리는 죄 사함을 받는 것은 그 효과가 일회성입니다. 즉 죄를 지어서 한번 짐승에게 죄를 전가시켜서 그 짐승을 잡아서 사함을 받는 것은 그때뿐입니다. 그리고 그 죄악뿐입니다. 그러므로 계속해서 죄를 지를 때마다 계속해서 짐승을 잡아야 합니다. 그러니 한사람이 한평생을 살아가면서 죄사함을 얻기 위해서 잡아야 하는 짐승을 과히 엄청난 것 일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단번에 십자가에서 자신을 희생 제물로 드리심으로 우리의 모든 일생의 죄악을 사해주셨습니다. 12절에 보면"오직 자기피로 영원한 속죄를 이루사 단번에 성소에 들어가셨느니라"고 합니다.
단번에 전 인류의 모든 죄를 사하여 주셨습니다. 우리가 살아갈 날 지을 모든 죄들을 사하여 주셨습니다. 단지 우리가 지은 죄를 자복 하고 회개하는 문제가 우리에게 있을 뿐입니다. 우리의 모든 죄악의 문제는 이미 해결이 되어져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그것을 알고 이제 믿음으로 받아들이고 자복하고 회개하기만 하면 모든 죄악은 깨끗하게 해결되어지는 것입니다.
이미 해결되어진 죄사함. 그런데도 우리가 그 사실을 알고도 여전히 죄 가운데 죄의 문제를 고민하면서 살아간다면 그것처럼 어리석은 사람도 없을 것입니다. 마치 은행가 가면 자기 통장 안에 돈이 있는 것을 알고도 은행에 가지 않고 돈이 없어 괴로워하다가 고통 속에서 죽는다면 그것처럼 바보 또한 없을 것입니다.
예수를 믿으면 누구든지 죄 사함을 얻고 구원에 이른다는 사실을 그렇게 알려주고, 또 전해주어도 여전히 나는 어떻게 살아가야 하나! 나는 너무 죄가 많아서 교회에 갈 수가 없어요! 한다면 그것처럼 어리석은 이도 없을 것입니다. 만약 그렇다면 그 사람은 도데체 어디에서 그 죄의 문제를 해결하고 돌아오려고 합니까?
우리 예수님은 단번에 온 인류의 모든 죄악을 사하여 주셨습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짐승의 피가 아닌 하나님의 아들로 오신 예수님께서 희생제물이 되어 주셨습니다.
그럼 이말은 무슨 말입니까? 그렇다면 한번회개하면 이제부터는 마음대로 살아도 된다는 말씀입니까? 그것은 절대로 그렇지 않습니다. 구원파나, 이런 이단에서는 그런 식으로 가르키고 있지만 절대로 그렇지 않습니다.
주님이 우리를 용서해주셨지만 우리는 날마다 죄를 자복 하면서 회개하는 삶을 이 땅에 사는 날 동안 해야 합니다. 왜요! 우리는 날마다 새로운 죄를 지으면서 살아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주님의 죽으심은 일회적인 것이지만, 그 효과는 전 인류에게 미치는 것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주님은 완전하게 우리의 모든 죄를 단번에 사해주셨지만, 우리는 날마다 짖는 죄에 대해서 우리가 무책임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날마다 용서받은 자의 삶의 모습으로 살아가야 합니다. 만약에 우리의 삶의 모습 속에 그 믿음의 행위가 없으면 우리가 믿는다는 것과 또 우리의 회개함이 진실하지 않은 것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예수님의 죽으심은 일회적인 사실입니다. 그러나 그 죽으심으로 주어지는 은총은 온 인류에 미친다는 사실을 기억하시길 바랍니다.

3. 새언약을 주셨습니다.
오늘 본문15절에 보면 "이를 인하여 그는 새 언약의 중보니 이는 첫 언약 때에 범한 죄를 속하려고 죽으사..."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에 죽으심은 우리에게 새 언약을 주시기 위함입니다. 이 새 언약은 예수그리스도의 피 흘리심으로 우리가 완전히 죄 사함을 받고 우리가 하나님 앞에 담대히 나아간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이 새 언약은 누구에게 하신 것인가 하면 "부르심을 입은 자들"입니다. 즉 예수 믿는 모든 이들에게 무조건적으로 주어지는 언약이라는 것입니다.
오늘 여기에 모인 모든 이들은 이미 예수그리스도의 부르심을 입은 성도들 인줄로 믿습니다.
아무나가 아닙니다.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 입니다. 하나님께서 택하신 백성들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아무나 믿어지는 것은 아닌 것입니다. 아무다 다 믿을 수 있는 것 같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아무리 좋은 복음을 전해주어도 절대로 믿어지지 않은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아무리 대충 말해주어도 그것을 "그런가보다"하면서 믿는 이들이 있습니다. 믿음은 배워서 아는 것이 아닙니다. 믿어서 배워지는 것입니다.
믿으면 하나님의 말씀 전체가 다 "아멘"이지만, 그렇지 않으면 내가 이해되어지는 것만 "아멘"입니다.
이것은 온전한 믿음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나의 이해여부하고 상관이 없이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아무리 맛있는 것이 눈앞에 있어도 그것을 자기 손으로 떠서 먹는 사람이 건강하게 사는 것입니다. 눈앞에 있는 음식을 보면서도 남들이 다 먹고 기뻐하고 즐거워하는 것을 보면서도 자신은 손을 대지 않으려는 사람은 부르심을 받은 사람이 아닙니다. 부르심을 받은 이들은 부르심에 합당한 삶을 살아야 합니다.
어느 마을에 부자가 큰잔치를 벌려놓고 손님을 청했습니다. 그런데 청함을 받은 사람들이 다들 바쁘다는 핑개로 오지를 않았습니다. 그때에 그 부자가 화가 나서 종들을 동네로 보내면서 병든 사람이든, 거지든, 누구든지 다 이 잔치에 불러들여서 이 잔치집을 체워라 하면서 명령했습니다.
종들은 말씀대로 했습니다. 그리고는 그 부자가 지간이 좀 지나고 이제는 어느 정도 왔겠지 하고 잔치장소에 나가 보았습니다. 그런데, 그 부자가 어느 사람들을 보고 화가 났습니다. 그래서 그 종들을 명해서 저사람, 저사람 모두 밖에 쫓아 버려라 했습니다. 그 쫒겨난 사람들이 어떤 사람인줄 아십니까? 네! 예복을 입지 않고 온 사람들입니다. 이 말을 들으면서 어떤 사람들은 질문을 합니다. 아니 부자가 길거리에서 아무다 불러 들였는데, 예복을 입을 시간이 어디에 있고 또 예복이 없는 사람은 어떻게 하겠습니까? 라는 질문을 하는 이들이 있는데, 이 부자가 그렇게 아무다 불러 들이라 할 때에는 그 집 입구에서 이미 예복을 다 준비하고 들어갈 때 그것을 입으라 한 것입니다. 그런데도 귀찮아서 그것을 입지 않고 그냥 들어간 사람들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부르심에 합당한 삶이란, 예복을 입는 것입니다. 갈라디아서 3:27절에서는 "누구든지 그리스도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자는 그리스도로 옷 입었느니라"고 합니다.
오늘 여기에 부르심을 입은 성도들이 많지만 우리 안에 이제 예수그리스도로 옷을 입어야 합니다. 그래야 사람들이 그리스도로 옷을 입은 모습을 보고 누구인지 알아보는 것입니다. 즉 우리의 모습 속에 예수그리스도의 그 모습이 투영되어져서 보이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우리 이번주는 다르게 살아봅시다. 우리 예수님께서 지금까지 구약의 역사 속에서 짐승의 피로 그제 일회적으로 죄의 가리움만으로 사함을 받았던 그것이 아니라 자신의 몸을 산 제사로 하나님 앞에 드려서 단번에 우리의 온 인류의 죄악을 사하여 주신 그 은총을 생각하면서 이제 우리는 예수그리스도를 믿는 그 믿음으로 이번 주간을 뜻깊게 살아가시길 바랍니다.
주님이 우리를 부르시기까지는 얼마나 엄청난 희생의 댓가를 치루고 부르셨는지, 그 대속의 은혜를 생각하시면서 이번 주간을 지금까지와 다르게 한번 살아봅시다.
그래서 이번 주간을 통해서 그동안 입지 못했던 아니 입었어도, 입었는지 벗었는지도 모르게 입었던, 팔만 걸치고 있고, 있었던 그 그리스도의 옷을 입음으로 주님의 부르심에 합당한 삶을 이 한 주간에 살아봅시다.
주님의 영광을 위해서 우리의 죄악으로 검붉게 물든 그 옷이 주님의 부활하심으로 흰눈같이 희어져, 눈부신 만큼의 그 흰 그리스도의 옷을 입음으로 부르심에 합당한 믿음의 삶을 이 한 주간동안 경건하게 살아가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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