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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리아의 무릎, 마르다의 손 (눅 10:38-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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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리아의 무릎, 마르다의 손 (눅 10:38-42)


어떤 교회 열심이 대단한 여전도회 회장 한분이 낙심에 빠져있었습니다. 목사님이 염려가 되었습니다. ‘교회 일이 너무 많아서 그러신가? 아니면 전도회원들이 회장님에게 잘 협조를 안해주어서 그러신가?’ 해서 왜 그렇게 얼굴이 어두우시냐고 물었습니다. 그랬더니 전도회 일이 너무 많아서 힘들어서 그런 것도 아니었고, 전도회 회원들이 협력을 하지 않아서도 아니었습니다. 여 전도회원 한분이 한 말때문이었습니다.
“저는 마르다같이 신앙 생활을 하지 않을 거예요. 저는 마리아처럼 말씀 중심으로 살 거예요. 그러니 제게는 교회 봉사하라는 말은 하지 마세요!” 이렇게 매섭게 쏘아붙이더랍니다.
그 말을 듣고 전도회장님이 너무 속이 상하였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나는 마르다인가? 마르다같이 일하는 사람이 없으면 교회 일은 누가 다 한단 말인가?’

오늘 말씀은 많이 오해되는 말씀 중에 하나입니다.
그래서 열심히 봉사하고 주의 일에 힘쓰는 분들의 마음을 무겁게 하는 말씀이기도합니다. 우리교회도 열심히 섬기시는 분들이 많이 계신데 넘치도록 수고하시면서도 자신감이 없으신 것 같아서 마음이 너무 안되었습니다.
일단 교회에서 수고하시는 분들에게 박수한번 하고 시작하겠습니다.
이 이야기는 이렇습니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시는 길에 자주 방문하셨던 마르다의 집에 들르셨습니다. 마르다는 예수님과 제자들을 위하여 열심히 음식을 준비하였습니다. 그러다가 마르다의 마음에 시험이 들었습니다. 그것은 동생 마리아가 자기를 돕지 않고 예수님 앞에서 말씀만 듣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급기야 마르다는 말씀을 전하시는 예수님께 나아가서 한 마디를 하게 됩니다. 예수님께 마리아를 책망하여 자기를 돕게 하라고 말해달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대답이 마르다에게 큰 충격이었습니다.
“주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마르다야 마르다야 네가 많은 일로 염려하고 근심하나 그러나 몇 가지만 하든지 혹 한 가지만이라도 족하니라. 마리아는 이 좋은 편을 택하였으니 빼앗기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 (눅 10:41~42)

이 예수님의 대답을 마리아는 높은 수준의 신앙이고 마르다는 낮은 수준의 신앙이다 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열심히 봉사하는 것은 나쁘고 말씀을 듣는 것은 좋다는 것이 절대 아닙니다. 봉사하는 것은 말씀을 듣는 것보다 좀 수준이 낮은 것이다 그런뜻으로 하신 말씀이 아닙니다.
여러분, 봉사는 중요한 일입니다. 우리에게는 가정에서, 직장에서, 사업장에서, 또 교회에서도 해야할 일이 항상 있게 마련입니다. 누군가는 일을 해야 하는 것이지요.
봉사는 성숙한 신앙의 증거입니다.
주님께 나의 몸과 시간과 물질과 에너지를 드리는 믿음의 고백입니다.

그렇다면 주님의 이 말씀은 무슨 뜻입니까?
마르다의 문제가 무엇일까요? 일을 많이 한 것, 음식을 많이 준비한 데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을 기쁨으로 하지 못했다는데 있는 것입니다. 많은 일로 염려하고 근심하였다는 것입니다. 그럴 바에야 몇 가지만 하는 것이 더 낫다는 것입니다.
마르다는 열심히 일하면서도 마리아에 대해 화가 나 있었고 나만 고생한다는 피해의식이 있었습니다. 더더군다나 마르다는 주님께도 화가 나 있었습니다.
주여 내 동생이 나 혼자 일하게 두는 것을 생각지 않으시나이까

마르다는 주님을 위해 봉사하면서 주님께도 화가 나 있었고 동생에게도 화가 나 있어도 그 일 자체도 너무 힘겹게 느껴졌습니다.

그렇다면 이 봉사는 도대체 누구를 위한 것입니까?

상담실코너에 보니까 어떤 권사님이 말했습니다. ”목사님, 내가 우리 가정을 위하여 얼마나 희생했는지 아십니까? 남편을 위하여, 자녀들을 위하여 그렇게 애를 썼는데, 아무도 그것을 알아주지 않아요. 남편은 내가 바가지만 긁는다고 해요, 아이들은 잔소리만 한다고 나를 싫어해요.”
이분은 마르다가 가지고 있던 문제에 빠진 것입니다. 가정 일을 열심히 잘 섬기는 것은 그 자체가 나쁜 것도 아니고 잘못한 것도 아닙니다. 그런데 ‘힘들어!’ ‘짜증 나!’ ‘너무 속상해!’ 이런 마음을 가지는 것이 문제라는 것입니다.

기쁨이 없는 봉사는 우리를 힘들게 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집안 일, 직장 일, 사업 그리고 교회 일이 많은데, 늘 “기뻐요, 감사해요” 하며 살아갈 수 있습니까? 예수님을 실제로 만나면 가능합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마리아가 더 좋은 편을 택했다고 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을 만나서 힘을 얻지 않으면 우리는 일이 많아지면 당연히 힘들고 혹 일이 그렇게 많지 않아도 내 마음에는 자꾸 시험이 옵니다. 예수님을 실제로 만난 사람은 어려운 일이 어려운 일같이 여겨지지 않습니다. 혹 십자가를 지는 것 같은 힘든 일이라도 내 마음에는 감사가 있습니다. 그 고난을 이겨나가는 모습이 다르다는 것입니다. 사람을 보는 눈이 달라지고 세상 보는 눈이 달라집니다. 이것이 마리아가 택한 길입니다.
주님을 만나고 그 앞에 머무르는 시간없이 하는 봉사는 반드시 마르다의 시험에 들게 마련입니다.
바쁘게 헌신하고 봉사하면서도 복되지 않은 상태가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마르다가 지금 일이 많아서 시험에 든게 아닙니다.
요한12장에는 마르다가 예수님과 그 12제자와 다시 살아난 나사로와 마리아까지 최소한 15명 식사대접하는 이야기 나옵니다.
그 장면에서 아무 불평과 원망없이 기쁨으로 감당하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그 때와 지금의 차이가 무엇입니까?
주님 앞에 머무르는 시간이 있었느냐 없었느냐의 차이입니다.

성경에 마리아 이야기는 3번 나옵니다.
그런데 마리아는 항상 주님 발 앞에 있는 모습으로 나옵니다.
그것이 마리아의 특징이었던 것입니다.
마리아와 마르다가 아주 잘 대조되는 모습은 오라비 나사로가 죽었을 때입니다.
마르다는 주님, 조금만 빨리 오셨더라면요... 아쉬움과 섭섭함을 토로합니다.
그러나 마리아는 그 순간에도 주님을 향한 기대와 신뢰를 져버리지 않습니다.
그것이 바로 주님 앞에 머무르는 시간의 차이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주님 앞에 머물면서 주님을 만나고 주님의 음성을 듣고 주님과 동행할 수 있습니까?
대부분의 성도들은 예수님과의 만남이 신비한 체험일 것이라는 선입관을 가지고 있습니다. 예수님을 만나지 못하고 살아가는 것이 지극히 정상적이고 예수님을 실제로 만나는 것은 아주 특별한 몇몇 사람에게만 허락된 일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예수님과의 만남을 누리지 못하는 것입니다.
오늘 여러분의 믿음을 바꾸셔야 합니다. 예수님과의 만남은 아주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성경은 우리와 예수님과의 실제적인 만남은 말씀 묵상을 통하여 이루어진다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우리 자녀들이 매일 보약을 먹고 자라는 것이 아니라 매일 평범한 밥을 먹고 자라듯이, 믿음의 성장도 크고 놀라운 어떤 신비하고 특별한 체험을 통해서가 아니라 매일 매일의 말씀 묵상을 통하여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월남 이상재 선생님을 다 아시지요? 그분은 사실 본래부터 기독교인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유교 신자였었는데, 항일 운동을 하다가 감옥에 갇히게 되었습니다.
독방에 갇혀서 외롭게 지내는데, 어느 날 그 감옥 안의 마루 틈 사이에 왠 쪽지 하나가 끼어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심심하던 차에 그 쪽지를 꺼내서 읽어보니까 신약 성경의 산상수훈이 적혀 있는 부분이었습니다. 읽어보았더니 오른 뺨을 때리거든 왼 뺨을 돌려대라, 속옷을 달라는 자에게 겉옷까지 주어라, 5리를 가자고 하는 자에게 10리까지 가라는 말씀이 쓰여져 있었습니다. 너무도 허무 맹랑한 소리라고 생각했습니다. ‘어떻게 인간이 이렇게 할 수 있단 말인가? 말도 안되는 소리지!’라고 비웃으면서 그 쪽지를 다시 마루 틈 사이에 끼워 넣었습니다. 그러고 있자니 너무 심심해서 그 쪽지를 다시 꺼내 보지 않을 수 가 없었답니다. 꺼내 보고 비웃고는 다시 꽂아 넣고 그러다가 다시 꺼내 보고 비웃고는 다시 꽂아 넣고... 이렇게 수백 번을 하였답니다. 이것이 무엇입니까? 주야로 산상수훈을 묵상하는 것이 아니고 무엇입니까? 그런데 이상재 선생님의 마음이 이상해지는 것입니다. 감옥을 나올 때 말씀에 감화를 받아 예수님을 믿는 사람이 되었고, 이후 그가 기독교계의 빛나는 지도자로서 우리 한국 역사상 중요한 인물이 되었습니다.
여러분, 이상재 선생님이 아주 신비한 체험을 하였기 때문에 예수님을 믿게 된 것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항상 말씀 앞에 가있다 보니까 예수님을 만나게 되었던 것입니다.


신비한 체험은 누구에게나 또 언제나 허락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말씀 묵상은 오늘 이 자리에 있는 우리 모두에게 허락된 것입니다. 이상재 선생님처럼 감옥에 가서, 그것도 독방에서 마루 사이에 끼어있는 성경 쪽지를 보고서만 가능한 것이 아닙니다. 또 그럴 까닭도 없습니다. 지금 여러분의 손에 성경책이 있습니다. 이제 여러분이 시간을 내서 성경 말씀을 펼쳐서 읽으면 되는 것입니다.
우리의 문제는 말씀 앞에 서는 시간, 말씀을 보는 시간이 너무나 적다는 것입니다.
묵상을 하며 주님 앞에 머무르는 시간이 겨우 5분 10분이 넘지 못하고 그것조차 드리기 어려워한다는 것입니다.
주님의 음성을 듣기 위해서는 매일 30분 정도 성경 말씀 앞에 나가는 꾸준한 실천이 필요합니다.
여러분, 지금 정말 힘들고 어렵습니까? 그렇다면 지금부터 예수님을 붙잡는 마음으로 말씀을 묵상하는 생활을 꾸준히 시작해보시기 바랍니다.


100만 명의 영혼을 구원했다고 하는 드와이트 무디 목사님의 어린 시절은 너무나 어려웠습니다. 9남매가 있었는데, 그 어머니 베시 여사가 혼자되어 9남매를 다 기를 자신이 없어서 아이들을 다른 가정에 입양을 시키려고 했습니다.
그 사실을 눈치 챈 아이들은 울면서, 어떤 고생이라도 하겠으니 자기들을 다른 집으로 보내지는 말아달라고 애원을 하였습니다. 그렇게 매달리는 아이들을 차마 떼어 놓을 수 없어서 베시 여사는 아이들을 모아 놓고 “그러면 좋다, 우리가 살 수 있는 길은 오직 하나님 말씀대로 사는 길 뿐이다. 그렇게 할 수 있겠느냐?”고 다짐을 받았답니다. 그리고 밤마다 예배를 드렸는데, 그때마다 이 사실을 확인하고 성경을 읽었다고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 우리는 주님의 숨결을 느끼게 됩니다. 주님의 인도를 받게 됩니다. 말씀 묵상한 것을 다른 교우와 정기적으로 나누는 시간을 가지면 주님과의 실제적인 교제는 더욱 분명해집니다.

우리교회 유치부 공간이 좀 열악합니다.
그래서 중직자회의에서 유치부 예배실을 새로 마련하기로 결정을 하였습니다.
그때 우리가 재정이 좀 있으니 충분히 할 수 있다. 이야기들을 하였습니다.
그런데 막상 우리가 계획했던 공간을 얻을 수 없게 되었습니다.
주인이 예수 믿는 사람은 줄 수 없다고, 자기 몸이 아플것같다고 퇴짜를 놓았습니다.
다음날 새벽에 하나님 앞에 엎드렸습니다.
우리 자녀들을 위한 이 계획에 무엇이 문제였습니까?
그 대 제 마음에 강한 하나님의 책망이 들려 왔습니다.
돈이 있으니 할 수 있다고?
너 지금까지 내 일을 돈으로 할 수 있다고 생각했던 거냐?
너 믿음으로 한다고 하는 말은 다 그냥 하기 좋은 말이었고 네 진심은 그것이었냐?
저는 그 날 새벽에 일어날 수가 없었습니다.
많이 회개하였습니다.
주의 말씀이 살아서 들려왔습니다.
마음의 경영은 사람에게 있어도 말의 응답은 여호와께로서 나느니라
사람이 마음으로 자기의 길을 계획할지라도 그 걸음을 인도하시는 자는 여호와시니라
죽은 문자가 아니라 사신 하나님의 음성이 들려왔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교회뿐 만 아니라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에게 하시고 싶은 말씀이 많습니다. 그 말씀을 들어야 합니다.
우리 귀에는 수없는 불신의 메시지가 들려오고 있습니다. 안 들으려고 해도 자꾸 들려옵니다. 세상의 말, 절망의 말, 필요없는 쓰레기 같은 말들이 들려오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 마음이 자꾸 강팍해지고 낙심되고 지치는 것입니다.
우리는 주님의 음성을 들어야 합니다. 그러면 우리 인생에 변화와 기적이 일어납니다.
“너희는 귀를 기울이고 내게 나아와 들으라 그리하면 너희 영혼이 살리라” (사 55:3)

여러분, “예수님, 제 귀에 말씀 해주옵소서!”하고 구해야 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큐티를 시작하십시오. 그리고 새벽 기도회에서 점검받으시고, 구역에 참여하고 전도회에 참여하고 서로 도와가야 합니다.

우리 기도하십시다.
“은혜와 사랑이 충만하신 아버지 하나님, 오늘도 주님의 은혜를 믿습니다. 우리와 함께 계시는 주님, 우리에게 말씀하시고 우리를 만나주시는 주님이심을 믿습니다.
지치고 피곤한 우리를 긍휼히 여기시고 우리를 새롭게 하시는 은혜를 부어주시옵소서. 우리 마음이 마르다같이 지치고 낙심되었습니다. 왜 그런지 언제부터인가 불평과 원망으로 가득합니다.
말씀과 성령으로 역사하시는 예수님, 우리의 심령을 새롭게 하여 주시옵시고 우리의 귀를 열어주셔서 주님이 주시는 말씀을 듣기 원합니다.
책망이라도 좋으니 주님의 숨결을 느끼기 원합니다. 주님의 손길을 느끼기 원합니다. 오늘도 주신 말씀 앞에서 주님의 음성을 듣고 가게 하옵소서!
좋으신 우리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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