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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을 사랑합시다 (마 15:29-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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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을 사랑합시다 (마 15:29-39)


스승이 한 젊은이를 제자로 두었는데 제자는 무슨 불만이 그리도 많은지, 늘 불평을 늘어놓았습니다. 하루는 스승이 제자를 불러서 소금 한 사발과 마실 물을 한 컵 가져오라고 시켰습니다. 제자가 준비하여 오자 스승은 소금을 한 줌 컵 속에 넣은 다음에 그 물을 마시게 하였더니 제자는 얼굴을 찡그리며 마셨습니다. 스승이 "맛이 어떠냐?"고 묻자 제자는 화가 잔뜩 난 목소리로 "짭니다"라고 말했습니다. 스승은 제자를 호수로 데려가서 아까와 같은 양의 소금을 호수에 집어넣고 휘휘 저어 그 물을 마시게 한 다음 다시 물었습니다. "맛이 어떠냐? 짜지 않냐?"라고 묻자 "시원합니다. 안 짭니다"라고 제자가 답했습니다. 스승은 "인생의 고통은 소금과 같다. 짠맛의 정도는 담는 그릇에 따라 달라지지. 네 속에 고통이 있다면 네가 컵이 되지 말고 호수가 되어라."

자신 안에 소금을 갖지 않고 사는 사람이 있습니까? 자기 삶에 고통이 없이 사는 사람이 있습니까? 그래서 인생은 고해, 곧 고통의 바다라고 말하는가 봅니다. 그런데 앞의 이야기는 고통의 바다를 헤쳐나가는 우리에게 중요한 지혜를 제공해 줍니다. 우리는 대체로 고통스런 일이 자신에게 안 일어나기를 바라며 고통스런 일이 일어났을 때 그것이 빨리 사라지기를 기도하는데 그런 바람과 기도는 아주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누군들 그런 바람을 갖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고통이 계속 자신에게 머물기를 바라는 사람이 세상에 어디 있을까요? 예수님도 고통으로 괴로워하시면서 그 고통의 쓴잔을 거두어 달라고 기도하셨습니다. 그러니 누구나 인생을 살아가면서 고통을 겪게 마련인 것이고 또한 그 고통이 빨리 지나가기를 바라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방법이 있습니다. 자신이 호수와 같은 존재의 수준으로 올라가는 것입니다. 그러면 쓴맛을 빼내지 않아도 쓴맛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습니다. 쓴맛 대신, 시원한 맛을 느끼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물컵과 같은 존재에서 호수와 같은 존재로 자라나는 것입니다. 물론 그러한 존재의 변형은 대단히 어려운 일이지만 물 컵과 같은 존재에서 쓴맛이 사라지기를 바라는 것은 불가능한 일입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는 불가능한 일이고, 다른 하나는 어렵기는 하지만 가능한 일입니다. 그렇다면 어렵더라도 가능한 길을 걸어야 합니다.

오직 예수님만이 구원의 길입니다. 예수님 외에 다른 구원의 길은 없습니다. 이것이 성경이고 기독교입니다. 다른 길과 구원을 인정하는 것은 종교적인 타협입니다. 예수님께서 결코 모르신다고 말씀하실 것입니다. 예수님만이 희망이며 영원한 생명이십니다. 그래서 많은 성도들이 목숨과 생명을 내어놓고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고 섬기는 것입니다. 어떤 대가라도 지불하며 죽도록 충성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사랑하는 성도와 가정과 나라가 행복하고 잘 삽니다. 오늘 광복주일을 맞이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더욱 사랑하여 잘 사는 백성과 나라가 되시기를 축원 드립니다.

1. 고치시는 예수님

본문 30-31절 "큰 무리가 절뚝발이와 불구자와 소경과 벙어리와 기타 여럿을 데리고 와서 예수의 발앞에 두매 고쳐 주시니 벙어리가 말하고 불구자가 건전하고 절뚝발이가 걸으며 소경이 보는 것을 무리가 보고 기이히 여겨 이스라엘의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니라"

예수님 당시 의학이 발달하지 못했을 뿐 아니라 의학의 혜택을 전혀 누리지 못했던 소외된 지역의 주민들에게는 만성적이고 고질적인 각종 질병이 많습니다. '불구자'는 신체 중 일부가 손상되었거나 기능이 마비된 사람을 가리킵니다. 복음서 기자들은 예수님께서 위대한 의사로서 영육의 질병을 온전케 하시는 분이심을 계속적으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무수히 많은 병자와 불구자들이 이곳 저곳에서 모여 예수님 앞에 앉아 그의 만져주심과 고쳐주심을 기대하는 장면을 상상할 수 있습니다. 그 기다림과 간절함은 아파 본 사람이 아니면 이해하기가 힘들 것입니다. 모두가 생명을 걸고 마지막 기회라고 초조히 기다리고 있었을 것입니다. 불구자들을 고쳐주셨고 벙어리를 말하게 하셨고 소경을 보게 하셨습니다. 이방인들이 예수님의 기적을 보고 이스라엘의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습니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예수님의 기적을 보고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기보다는 바알세불의 힘을 의지했다고 귀신으로 예수님을 몰아붙였습니다. 이런 모습을 보면서 이스라엘 사람들이 참으로 놀랬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다른 사람들을 통해서도 일하시고 영광을 받으시기에 언제나 겸손하게 살아야 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을 위해' 일한다고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과 함께' 일하는 것은 싫어합니다. 믿음 좋고 충성한다는 사람들이 교회에서 오히려 문제를 일으킬 때가 있습니다. 하나님을 위해 일한다고 하면서 자신의 혈기로 펄펄 뛰기 때문입니다. 복음서의 베드로는 '하나님을 위해서' 뛰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호언장담하기도 하고, 칼을 들고 설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사도행전의 베드로는 '하나님과 함께' 일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가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위하여' 보다 중요한 것은 '함께' 하는 것입니다. 다윗은 동역자와 함께 일하는 법을 아는 사람이었습니다. 이것이 그의 강점입니다. 다윗은 사울에게서 도망치면서 아둘람 굴에 모인 사람들과 함께 동역의 힘을 길렀습니다. 당시 아둘람 굴에 모인 사람들은 오합지졸이었습니다.

"그러므로 다윗이 그곳을 떠나 아둘람 굴로 도망하매 그 형제와 아비의 온 집이 듣고는 그리로 내려가서 그에게 이르렀고 환난 당한 모든 자와 빚진 자와 마음이 원통한 자가 다 그에게로 모였고 그는 그 장관이 되었는데 그와 함께한 자가 사백 명가량이었더라"(삼상22:1-2) 그러나 이 아둘람의 인물들이 나중에 이스라엘을 이끄는 주요 장군들이 되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요압, 아비새, 아사헬 등이 바로 이 '아둘람 아카데미' 출신입니다. 함께 일하는 사람이 강한 사람입니다.

어려운 시대에 최선을 다하여 하나님을 섬기는 우리 모두는 예수님으로부터 고침을 받아야 합니다. 각종 질병의 치료를 받아야 합니다. 몸과 마음과 영혼의 치료를 받아야 합니다. 세상 병원에서 고침 받을 수 없는 교만과 고집과 시기심과 열등감과 우울증을 치료받아야 합니다. 예수님 앞에 나온 환자들의 긴박성과 간절성의 마음으로 엎드려야 합니다. 고침 받아야 더욱 온전한 성도가 되고 큰 일꾼이 됩니다. 예수님을 정상적으로 더욱 믿고 사랑하게 됩니다. 고치시는 예수님을 만남으로 신앙과 삶이 더 건강해 지시기를 축원 드립니다.

2. 불쌍히 여기시는 예수님

본문 32절 "예수께서 제자들을 불러 가라사대 내가 무리를 불쌍히 여기노라 저희가 나와 함께 있은지 이미 사흘이매 먹을 것이 없도다 길에서 기진할까 하여 굶겨 보내지 못하겠노라"

이적의 동기를 보여 줍니다. 예수님은 무리들에 대해 뜨거운 동정심으로 인해 그들의 필요를 채워주시고자 하였습니다. '불쌍히 여기다'의 헬라어 '스프랑크니조마이'는 내장과 심장 깊숙이서부터 표출된 깊은 사랑과 긍휼의 마음을 나타내 줍니다. 예수님의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인간 구원과 인생 문제 해결의 궁극적인 원인이 됩니다. 지금 갈릴리 호숫가에 밀집해 있는 무리들은 예수님을 영혼의 질병을 치료하는 참메시야로서 알지 못하고 단순히 굶주림과 병에서 놓여나게 하는 구원자로 인식하고 있었다고 하더라도 예수님에 대한 그들의 기대와 신뢰는 결코 가벼운 것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의 병고치는 사역이 각각의 병자들에게 계속 진행되었음을 나타내는 동시에 무리들이 가져왔던 음식이 모두 바닥났음을 암시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무리들이 길에서 지쳐 쓰러질까 염려하였습니다. 예수님의 사랑이 마치 자녀에 대한 부모의 깊은 사랑 같은 것임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학자들에 따르면 그 당시 민족적 축제로 인해 각지에서 예루살렘으로 모일 때는 그 중에 상당한 사람들이 지쳐 기진 하거나 객사했다고 합니다.

어느 날 러시아의 대문호 톨스토이가 길을 걷고 있었습니다. 그때 한 걸인이 톨스토이에게 도움을 요청하는 손을 내밀었습니다. 그는 주머니에 손을 넣어 보았습니다. 그러나 주머니에는 단 한푼의 동전도 없었습니다. 톨스토이는 걸인의 손을 꼭 쥐며 속삭였습니다.
"형제여, 미안하오. 지금 내가 가진 돈이 한 푼도 없구료. 정말 미안하오."
그때 걸인은 매우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톨스토이의 손을 잡았습니다. 걸인의 눈에는 눈물이 가득 고여 있었습니다.
"저는 선생님께 돈보다 훨씬 소중한 것을 받았어요. 선생님은 저를 '형제'라고 불러주었습니다. 그리고 선생님의 손에서 따뜻한 사랑을 느낍니다. 이것은 돈과 바꿀 수 없는 것입니다."
사랑의 출발은 관심입니다. 사랑은 상대방을 진심으로 배려하는 것입니다. 사랑은 노여움과 불만을 녹이는 강력한 힘이 있습니다.

사람은 자기가 안 아프면 남의 아픔을 모릅니다. 자기가 배고프지 아니하면 남의 굶주림을 모릅니다. 사람들과 제자들은 수많은 환자와 배고픈 무리들의 고통을 몰랐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병자와 배고픈 자들을 생각하시고 사랑하시고 대책을 세우셨던 것입니다. 사람은 알고 보면 누구나 다 불쌍합니다. 몰라서 미워하는 것입니다. 우리 성도들은 다 아픔과 문제가 있습니다. 인생의 무거운 짐을 지고 허우적거리고 있습니다. 땀과 눈물과 콧물을 흘리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아픔을 아시기에 책망하기보다는 위로하고 불쌍히 여기십니다. 불쌍한 사람들끼리 상처 주지말고 위로하고 치료합시다. 가족들이라고 하여도 가족의 배고픔, 아픔, 상처, 고독, 고통을 모릅니다. 안다고 하여도 차갑게 대하고 책망하고 야단을 칩니다. 그래서 알까봐 더 겁이 납니다. 그래서 숨기고 감추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의 아픔과 배고픔을 아시고 불쌍히 여기십니다. 걱정하지 말라고 위로하시고 치료하십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를 어떤 인간이나 가족들보다 더 믿고 사랑해야 합니다. 차갑고 야단치는 사람에게 감동되는 경우는 없습니다. 나를 사랑하고 불쌍히 여기는 사람에게 감동이 됩니다. 이 세상 누구보다도 우리를 불쌍히 여기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더욱 믿고 사랑하는 성도들이 다 되시기를 축원을 드립니다.

3. 축복하시는 예수님

본문 36-38절 "떡 일곱 개와 그 생선을 가지사 축사하시고 떼어 제자들에게 주시니 제자들이 무리에게 주매 다 배불리 먹고 남은 조각을 일곱 광주리에 차게 거두었으며 먹은 자는 여자와 아이 외에 사천 명이었더라"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의 불신앙적 태도를 책망치 않으시고 대신 그들로 하여금 당신의 권능을 기대하도록 하시려는 의도에서 '너희에게 떡이 몇 개가 있느냐'고 물으셨습니다. 현재 너희가 가지고 있는 물질, 재능, 재산에 대한 참된 가치는 신앙의 힘에 의해서만 가능하다고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언제나 현재 가진 것을 변혁을 위한 놀라운 가능성으로 바라보셨는데 이는 말씀만으로도 천지를 창조하실 수 있었던 하나님 아버지에 대한 믿음에서 생겨난 것입니다. 보리 떡 일곱 개와 작은 생선 두 마리는 하찮고 별 가치가 없는 것이지만 예수님의 손에 올려지면 놀라운 기적이 일어남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지극히 작은 떡과 생선을 받으시고 축사하셨습니다. 감사한 마음으로 하나님께 기도를 하신 것입니다. 지극히 작은 것도 크게 감사하시는 예수님의 위대하신 모습입니다. 오늘날 물질은 점점 커지는데 감사와 기도는 점점 작아지는 것이 문제입니다. 4,000명이 다 배불리 먹고 일곱 광주리가 남았습니다. 이는 예수님의 이적이 지닌 탁월성을 보여주는 동시에 미구에 그가 베푸실 메시야 잔치의 풍성하고도 충만한 상태를 예시해 줍니다. 여기서 4,000명이라는 수에서 '넷'이라는 숫자는 천지사방(天地四方)을 가리키는 것이며, '천'이라는 숫자는 크고 많다는 뜻을 지닙니다. 따라서 4,000이란 영적으로 세계성, 보편성, 광대성을 상징하는 숫자라고 볼 수 있습니다. 이는 결국 전세계는 생명의 떡이신 예수님을 필요로 하고 예수님은 이 세상 모두를 만족케 하고도 남을 만큼의 풍성한 영적 생명력을 가지고 계심을 보여준다고 할 수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인간을 영육간에 축복하시고 축복의 근원과 통로로 살아가도록 하십니다.

종교개혁자 칼빈은 "성도들이 찾는 보화가 전부 다 가득히 담긴 것"이 바로 기도라고 하였습니다. 한 마디로 말해서 기도하면 행복해진다는 것입니다. 기도 안에 모든 것이 다 있습니다. 기도하면 다 주십니다. 기도가 기도를 낳는 법입니다. 새벽기도가 새벽기도를 낳습니다. 기도에는 사람들을 불러모으는 매력이 있습니다. 기도는 역시 기도를 통해서라야 잘 됩니다. 기도 잘하려면 기도해야 하는 것입니다. 기도하면 기도하게 되어 있고, 기도하면 기도의 불이 붙는 것입니다. 기도하는 사람에 의해서 또 다시 기도하는 사람이 만들어집니다. 기도 많은 하는 사람에 의해서 기도 많이 하는 교회가 만들어집니다. 기도하는 성도들이 많아지면, 그만큼 기도의 자리도 더욱 넓어지게 될 것입니다.

무디 목사님은 말하기를 "기도는 하나님의 자녀가 가진 가장 무서운 무기"라고 했습니다. 정말 가장 크고 무서운 무기가 기도입니다. 지금 세계에서 군사용 비행기로는 스텔스기가 최고입니다. 스텔스기의 최대 장점은 딱 하나입니다. 다른 모든 비행기는 레이더에 다 잡힙니다. 그런데 스텔스기만 레이더에 안 잡힙니다. 비행물체가 떴을 때 레이더를 쏘면 짧은 시간 내에 그 위치를 알려주는데, 스텔스기는 레이더를 되레 흡수해버립니다. 반사시키지 않기 때문이지요. 쏘기를 아무리 쏘아도 '아멘'하고 받아버리고는 안 돌려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스텔스기가 세계 최고의 무기이고, 이보다 더 비싼 무기가 없는 것입니다. 기도도 마찬가지입니다. 기도하는 사람에게는 마귀가 그 사람의 정체를 알 수 없습니다. 마귀는 끊임없이 공격해 오는데, 기도하는 사람은 그 공격을 흡수해버리기 때문입니다. "아멘, 아멘"하면서 손들고 기도하면 아무리 쏘아봐야 소용이 없습니다. 마귀가 별의별 계획을 세워봐야, 미사일을 쏜다고 해도 소용없는 것입니다. 우리가 축복하시는 예수님을 만나는 길은 기도하는 것입니다. 기도할 때 응답하시고 영육간에 놀라운 기적을 베풀어주십니다. 우리 모두 사명을 잘 감당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축원 드립니다.

사랑하는 번동가족 여러분!
무더운 여름입니다. 더 뜨겁게 예수님을 사랑합시다. 고치시고, 불쌍히 여기시고, 축복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더욱 사랑하는 최고의 성도들과 우리 나라가 영적 이스라엘의 제사장의 나라가 되시기를 축원 드립니다.
(김정호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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