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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은 언제나 마른 땅으로 인도하신다 (수 4:15-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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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은 언제나 마른 땅으로 인도하신다 (수 4:15-24)

어느 TV 프로에 보니 부모들이 아이들과 함께 살아 있는 돼지를 잡아 목에 끈을 묶는 행사에 참여하고 있었습니다. 돼지는 죽어라고 소리를 꽥꽥 지르면서 소망치고, 사람들은 돼지를 잡기 위해 넘어지고, 자빠지면서 돼지를 잡아 목에 리본을 묶으면서 올 해는 자기에게 서로 행운이 올 것이라고 했습니다.

요즘 한국 사회에 아주 희한한 일들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그것은 2007년이 돼지 해이고, 그것도 황금 돼지 해 이기 때문에 복을 받을 것이라는 믿음입니다. 돼지 저금통이 불티나게 팔리고, 황금으로 만든 돼지를 아주 귀한 사람들에게 선물한다고 합니다. 사람들은 참으로 어리석습니다. 돼지를 하나님보다 더 신뢰하고, 내가 돼지를 잡았으니 정말 복을 줄 것이라고 믿습니다. 돼지 꿈을 꾸었으니 복을 받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복권을 삽니다. 그리고, 돼지 꿈 때문에 내가 복을 받았다고 크게 떠들어 댑니다. 그러나, 진정으로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복의 근원은 돼지가 아닙니다. 복을 주시는 분은 하나님 외에는 없습니다.

돼지꿈을 꾸고 복권에 맞아 행운을 잡았다는 사람치고 영원히 행복하게 잘 살고 있다는 사람을 만나본 적이 없습니다. 얼마 후에 가정이 돈 때문에 파탄 나고, 형제들이 어떻게 되고, 부부가 서로 이혼하게 되었다는 이야기가 들려옵니다. 이것을 어떻게 진정한 복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우리는 돼지꿈을 꾸는 것을 소망하고 바랄 것이 아니라 야곱처럼 꿈에서 하나님을 만나야 합니다. 하나님의 축복을 받아야 합니다. 아브라함처럼 밤의 이상 중에 하나님을 만나야 합니다. 요셉처럼 꿈을 통해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해야 합니다. 진정으로 복의 근원은 하나님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만나는 꿈을 꿔야 할 것입니다. “돼지를 소망하지 말고, 하나님을 소망하자”

1. 두려움을 극복하고 요단강으로 들어가라

모세가 죽은 후에 이스라엘 백성들은 여호수아를 지도자로 삼아 약속의 땅인 가나안 땅에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가나안 땅을 들어가려고 하니 심각한 문제가 그들 앞을 가로막고 있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요단강이었습니다. 가나안 땅을 들어가려고 하니, 그들의 힘으로 건널 수 없는 요단강이 그들 앞에서 유유히 흐르고 있었던 것입니다. 원래 요단강은 그리 깊은 강은 아닙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 땅에 들어가려고 할 때는 양력으로 3월 중순에서 4월 초였기 때문에 북쪽에 있는 레바논 산의 눈이 녹고, 봄비가 내리는 우기였습니다. 특히, 가나안 지역은 나무가 많지 않은 광야지대였기 때문에 비가 오면 산에서 물이 내려오듯이 한꺼번에 쏟아져 내리기 때문에 엄청난 양의 물이 요단강을 범람시키게 됩니다. 3:15절에는 “요단이 곡식 거두는 시기에는 항상 언덕에 넘치더라”고 했습니다.

당시 물의 속도는 한국에서 여름이면 장마로 인해 엄청난 계곡의 물이 쏟아지듯 요단강에 쏟아져 내렸고, 그 유속도 아주 빨라 감히 요단강으로 들어간다는 것은 상상할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더욱이, 3:15절의 말씀처럼 물은 빠르게 하류로 내려 갈 뿐만이 아니라, 물의 양도 심히 많아 언덕 위까지 차올라 있었기 때문에 요단강을 건너라는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한다는 것은 생명을 걸지 않고는 도무지 감행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알고 있는 분명한 사실이 있습니다. 그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요단강을 건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도 아시는 것처럼, 당시 상황은 객관적으로 볼 때 그리고 인간이 지닌 판단력과 통계적 수치 그리고 합리적인 이성으로 볼 때 누가 보아도 요단강으로 발을 내밀고 들어간다는 것은 무모한 짓이요 실패할 확률이 100%였습니다.

그들이 이 무모한 짓을 할 수 있었던 유일한 이유는 오직 하나였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건너라고 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들에게는 다른 이유가 없었습니다. 오직 하나님이 그들에게 그곳을 향해 발을 내밀고, 건너라고 하셨기 때문입니다.

우리 믿음의 사람들에게는 다른 이유가 없습니다. 오직 하나님이 내게 그 일을 그렇게 하라고 하셨기 때문에 그렇게 하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들이 볼 때 참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다른 사람들이 볼 때 참 어리석습니다. 꼭 죽을 것 같습니다. 망할 것 같습니다. 그래도 하나님께서 하라고 하셨기 때문에 그 말씀에 순종하면, 그 사람은 결코 망하지 않습니다.

우리의 인생은 요단 앞에 있는 이스라엘 백성들과 다를 것이 없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들에게 축복을 약속하셨습니다.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에 들어 갈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반드시 내가 네게 축복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나의 생각은 미래에 내가 너에게 평안과 소망을 주는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나는 너에게 넓은 땅을 줄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우리는 모두 이 말씀에 아멘했습니다.

우리 앞에는 그 하나님의 약속이 이뤄지기 보다는 먼저 요단강을 건너야 할 때가 있습니다. 이 때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뭘 어떻게 할까라고 고민합니까? 우리는 요단 강을 건너면 축복의 땅이 있다라고 믿고, 담대히 앞으로 전진해야 합니다. 앞으로 인생의 발을 내 밀어야 합니다.

우리나라가 동계 올림픽에서 가장 매달을 많이 따는 효자 종목이 있다면 쇼트트랙입니다. 쇼트트랙은 다른 나라가 감히 따라 올 수 없을 정도의 강국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쇼트트랙에서 한국이 우승하는 비결이 다른 것이 아니라 결승전을 통과할 때 다른 외국 선수들과 다른 행동을 취하는데 그것이 무엇이냐? 하면, 결승점을 통과하는 순간 한 발을 순식간에 앞으로 쭉 내밀어서 결승점을 통과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쇼트트랙 선수라면 누구나 한 발을 앞으로 쭉 내밀고 결승점을 통과하는 것을 아주 철저하게 훈련받는다고 합니다.

이처럼 오늘 우리는 믿음의 발을 쭉 앞으로 내밀어야 합니다. 철저히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쇼트트랙 선수만 아니라 믿음의 사람인 우리도 발을 앞으로 내미는 훈련을 받아야 합니다.

축복의 땅 가나안을 향해 가다보면 엄청난 규모의 요단강이 우리 앞을 가로막을 수 있습니다. 그러면 이 요단강 때문에 하나님께서 약속하시고 주시기로 한 그 축복의 땅, 가나안 땅에 들어가는 것을 포기해야 하는 것입니까? 여러분들은 정말 그렇게 하시겠습니까? 사랑하는 여러분, 환경에 묶여 있는 두려움을 극복하고 요단강을 향해 전진해 나가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원래 인생이라는 그런 것이 아니겠습니까? 저는 들판에서 아이들과 함께 민들레 씨를 날려 본 적이 있습니다. 민들레 씨를 날려 본 분들이라면 아시겠지만, 줄기를 꺽어 입에 가까이 대로 힘껏 바람을 불어야 합니다. 그러면, 내가 분 그 바람으로 홀씨들이 들판의 이곳 저곳으로 흩어집니다.

인생의 바람이라는 것은 민들레 홀씨를 날리는 것과 같다고 생각이 됩니다. 바람이 불면 춥고, 고통스럽습니다. 그러나, 바람으로 인해 홀씨가 세상을 향해 번져나가 더 많이 번성하고, 더 많이 개체 수가 늘어나 크게 번성하는 것처럼 교회도 그렇고, 인생도 그렇습니다.

인생의 요단강을 넘지 못하면 가나안 땅도 없습니다. 따라합니다. “인생의 요단강을 넘지 못하면, 가나안 땅도 없다” 따라서,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바람을 타고 민들레 홀씨가 날리듯 세상을 향해 도전의 날개를 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라고 하셨으니 설마 죽이기야 하겠습니까?

2. 하나님은 강바닥을 말리셨다

사실, 엄청난 양의 수량을 자랑해서 언덕 꼭대기까지 차오른 요단강보다 더 무서운 강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우리 자신들의 마음속에 있는 두려움과 불신이라는 강입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 22절과 23절에서 볼 수 있는 귀한 말씀이 있습니다. 그것은22절에 “이스라엘이 마른 땅을 밟고 요단을 건넜음이라”는 말씀과 23절의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우리 앞에 홍해를 말리시고 우리를 건너게 하심과 같았나니”라는 말씀입니다.

분명히 하나님은 우리의 미래를 약속해 주셨습니다. 가나안 땅을 주실 것을 약속하셨고, 축복으로 우리를 인도해 주실 것을 약속해 주셨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이런 축복의 땅에 들어가지 못하는 것은 우리 밖에 있는 환경의 문제가 아닙니다. 가장 큰 문제는 우리 안에 두려움의 강이 넘쳐나고 있기 때문입니다. 안된다는 패배 의식이 있기 때문입니다.

히브리어에 낙담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이 말의 의미는 “마음이 죽다” 혹은 “마음이 파괴되다”라는 말입니다. 사무엘상 25장에 보면 “나발”이라는 사람이 나옵니다. 이 사람은 양이 3천이요, 염소가 1천 마리나 있는 큰 부자였습니다. 그가 갈멜에서 양을 칠 때에 다윗은 그의 양이 도둑맞거나, 이리나 여우같은 들짐승에게 빼앗기지 않도록 그의 사람들을 총동원해서 돌봐주었습니다. 그런데, 이 사람인 그 은혜를 모르고 다윗의 자존심을 건드리며, 완전히 무시했습니다. 다윗을 구걸이나 하는 거지로 취급했습니다. 다윗은 나발의 행동에 대단히 분노했고, 그가 거느리는 400명의 용사와 함께 그를 죽이려고 했습니다. 이 때, 나발에게는 아주 지혜로운 아내 아비가일이 있었습니다. 아비가일은 잽 빨리 먹을 것과 감사의 선물을 챙겨 다윗의 오는 길을 막았습니다. 일족이 멸망하는 죽음이 길에서 나발의 집안을 구한 것입니다. 그 후에 여인이 집에 돌아와 보니 남편인 나발이 왕의 잔치처럼 큰 잔치를 벌려 놓고 술에 취해 개처럼 온 집을 돌아다니는 것입니다. 아비가일은 다음날까지 나발이 술에서 깨기를 기다렸습니다. 그녀는 어제 있었던 이야기를 했습니다. 이 이야기를 들은 그가 얼마나 놀랐는지 그 마음이 크게 낙담하였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그는 낙담함으로 인해 시름시름 않다가 10일 후에 죽고 말았습니다.

낙담이라는 것은 이런 것입니다. 사람을 죽이는 것이 낙담입니다. 때문에 낙담이라는 히브리어의 의미 자체가 “마음이 죽은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마음이 죽으면 몸도 죽습니다. 우리 인생도 죽습니다. 낙담은 영혼도 죽이고, 생명도 죽이고, 육신도 죽이고, 내 삶도 죽이는 것이 낙담입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이렇게 말씀합니다. “모든 지킬 만한 것 중에 더욱 네 마음을 지키라 생명의 근원이 이에서 남이니라”(잠4:23). “네가 만일 환난 날에 낙담하면 네 힘의 미약함을 보임이니라”(잠24:10). “마음의 즐거움은 얼굴을 빛나게 하여도 마음의 근심은 심령을 상하게 하느니라”(잠15:13). “마음의 즐거움은 양약이라도 심령의 근심은 뼈로 마르게 하느니라”(잠17:22)

따라서, 우리 앞에 흐르고 있는 인생의 요단강이 문제가 아닙니다. 그 요단강을 바라보고 있는 우리 마음의 눈이 더욱 중요합니다. 그 강을 건널 수 없다고 마음으로 생각하면, 건널 수 없습니다. 지난주에 말씀드렸듯이 에스겔 골짜기의 마른 뼈들이 살 수 없다고 생각하면, 그 뼈들은 살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 뼈들을 향해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생기를 너희에게 들어가게 하리니 너희가 살아나리라”(겔37:5). 하나님께서 살리시면 살아나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이 강을 건널 수 없다고 하면 우리는 건널 수 없습니다. 우리가 저 골리앗을 이길 수 없다고 생각하면, 결코 이길 수가 없습니다. 이것은 우리 마음속에 이미 마음의 언덕을 넘어온 요단강이 큰 두려움으로 우리의 생명을 조이고 있기 때문입니다. 할 수 없다고 하면 할 수 없지만, 할 수 있다고 생각하고 자꾸 인생의 요단강을 향해 믿음의 도전장을 내고 발을 내밀면 역사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믿음의 도전장을 내밀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요단강을 향해 나가라고 이스라엘에게 명령하셨습니다. 그들의 마음에 두려움이 없었던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그들이 말씀에 순종하고, 죽으면 죽으리라는 결단으로 하나님의 법궤를 들고 앞으로 나가 두려움과 공포로 그들 앞에 흐르고 있는 요단강에 발을 들어 놓는 순간, 놀라운 기적과 이적이 일어났던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기적과 이적을 체험하는 인생이 되어야 합니다. 이 시간 믿음의 기적이 일어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우리 속에 흐르는 근심과 낙담의 강이 믿음의 능력으로 멈추고, 말라지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하나님은 강바닥을 말리시고, 우리를 무사히 건너게 하시는 분입니다. 나는 여러분들에게 오늘 강력하게 말씀드립니다. “하나님은 우리들이 믿음으로 길을 가면 반드시 마른 땅을 걷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오늘 말씀의 핵심입니다.

3. 이제 인생의 기념비를 세우라

마지막으로 말씀드릴 것이 있다면 이제 인생의 기념비를 세우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강을 건널 때에 12명의 지파의 대표자들에게 명령하셨습니다. 요단강의 마른 땅을 건너면서 큰 돌을 하나씩 가지고 나오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돌을 하나님께서 도와주신 기념비로 길갈에 세우라고 하셨습니다.

그 돌을 세우신 목적은 24절에 아주 잘 나와 있습니다. 그 첫째는 모든 백성에게 여호와 하나님이 얼마나 강하고 능력이 있는 하나님이신지를 알게 하는 것에 있습니다. 둘째는 오직 하나님을 이스라엘 백성들이 늘 경외하며 섬기게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오늘도 하나님은 우리들의 인생에서 늘 기념비를 세우기 원하십니다. 하나님이 얼마나 우리를 도와주셨는지 사람들 앞에서 간증하기를 원합니다. 그 도우심을 간증함을 통해 우리 자신들의 하나님을 경외하고 더욱 사랑하기를 원하십니다.

여러분들은 어떤 것을 인생의 기념비로 자랑하겠습니까? 어떤 분들은 기도로 자신의 기념비를 삼아 기도에 응답사신 그을 증거하는 분도 있습니다. 어떤 분은 십일조를 가장 많이 하나님께 드려야 하겠다고 결심하면서 간증하면서 기념비를 세우신 분들도 있습니다. 어떤 분은 생명을 살리는 전도로 자신의 기념비로 삼아 하나님께서 내 인생의 험악한 강을 어떻게 마르게 하셨는지를 간증하는 분들도 있습니다. 어떤 분은 성경을 읽고 쓰는 것을 기념비로 삼는 분도 있습니다. 어떤 분들은 선교적인 비전을 세운고, 그것을 기념비로 삼겠다고 결심한 분도 있습니다. 어떤 분들은 형제와 자매를 돌아보면서 그들을 위해 봉사하고, 헌신하는 것으로 기념비를 삼아 사람들 앞에 자랑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12지파 중에 어느 지파도 빠지지 않고, 모두가 최소한 한 개씩의 큰 돌을 가지고, 요단강에서 나와 기념비를 길갈에 그 돌을 세웠다는 것입니다. 우리도 이제 기념비를 세워야 합니다. 길갈은 굴러가다라는 의미를 지닌 곳입니다. 죄의 굴레, 옛사람의 굴레를 길갈에서 굴려 버리고 하나님의 은혜의 역사를 기념비로 세워야 합니다.

우리 중에 어느 누구도 하나님의 도움이 없이 사는 사람이 없습니다. 그러나, 인생의 기념비를 세우지 못하는 것은 큰 문제입니다. 하나님은 이제 여러분들이 하나님이 어떻게 나를 도와주셨는지 그 인생을 도우신 하나님을 기념하여 기념비를 세우기를 원하십니다. 이 기념비는 나를 위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나를 도우신 것을 찬양하는 기념비인 것입니다.

이제부터 영원토록 나를 도우신 나를 구원하신 그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나와 내 후손까지도 영향을 미치는 인생의 큰 기념비를 이 교회 위에 세우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따라합니다. “큰 믿음으로 인생의 큰 기념비를 세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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