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찬송함으로 다시 부흥하는 교회 (행 16: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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찬송함으로 다시 부흥하는 교회 (행 16:25)


(행 16:25) 밤중쯤 되어 바울과 실라가 기도하고 하나님을 찬미하매 죄수들이 듣더라

두아디라성에 도착한 바울과 실라는 자주 장사 루디아를 만나 잠시 동안 그의 집에 유숙하게 되었습니다. (행 16:14) 두아디라 성의 자주 장사로서 하나님을 공경하는 루디아라 하는 한 여자가 들었는데 주께서 그 마음을 열어 바울의 말을 청종하게 하신지라
(행 16:15) 저와 그 집이 다 세례를 받고 우리에게 청하여 가로되 만일 나를 주 믿는 자로 알거든 내 집에 들어와 유하라 하고 강권하여 있게 하니라
어느 날 기도하는 곳에 가다가 귀신들린 여종 하나를 만나 그에게서 귀신을 쫓아냄으로써 적지 않은 사건에 휘말리게 되었습니다.
즉 여종을 사로잡은 귀신의 능력을 힘입어 점을 치던 주인들이 자기들의 이익의 소망이 끊어지자 바울과 실라를 모함하여 고소함으로써 두 사람은 큰 곤욕을 치른 후에 감옥까지 수감되고 만 것입니다.
종의 주인들은 바울과 실라로 말미암아 자기들의 생업에 지장을 받게 되자 두 사람을 모함하였습니다.
(행 16:19) 종의 주인들은 자기 이익의 소망이 끊어진 것을 보고 바울과 실라를 잡아가지고 저자로 관원들에게 끌어갔다가
(행 16:20) 상관들 앞에 데리고 가서 말하되 이 사람들이 유대인인데 우리 성을 심히 요란케 하여
(행 16:21) 로마 사람인 우리가 받지도 못하고 행치도 못할 풍속을 전한다 하거늘

이미 주인들에게 있어서 여종은 '목적'이 아니라 '방편'이었던 것입니다. 그들은 여종을 함께 어울려 사는 존재로 보지 않고 자기가 먹고살기 위한 방편과 수단으로만 보았습니다. 그래서 여종이 정상으로 되었을 때 기뻐하며 바울과 바나바에게 감사하기는커녕, 오히려 모함한 것입니다. 바울과 바나바의 입장에서 볼 때 이는 매우 부당한 일이었으며 억울한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사실 때문에 그 선한 일을 중단해서는 안 되었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이러한 일을 하고 이러한 부당한 대우를 받기 위해 존재하는 자들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만일 이 일을 중단한다면 그것은 곧 존재 의의의 상실을 의미할 뿐입니다.

잘못이 있다면 귀신을 쫓아낸 죄밖에 없는 바울과 실라는 그 무서운 태형을 받았습니다.
(행 16:22) 무리가 일제히 일어나 송사하니 상관들이 옷을 찢어 벗기고 매로 치라 하여
(행 16:23) 많이 친 후에 옥에 가두고 간수에게 분부하여 든든히 지키라 하니

당시 로마법의 태형은 실로 가공할 정도이며 매를 맞다가 죽어 나가는 일이 다반사였다고 전해집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두 사람은 변명 하나 없이 그 형벌을 달게 받고 있습니다. 어쩌면 그 고난을 기뻐하고 있었는지도 모릅니다.
주님께서는 이 세상에 오셔서 아무 죄도 없이 매를 맞으셨습니다. 그런 중에도 한마디 불평이나 변명을 하신 적이 없으셨습니다. 바울과 실라는 바로 이러한 주님의 자세를 배운 것입니다. 우리도 이러한 주님의 자세를 배워야 합니다. 우리가 이해할 수 없는 것이라 할지라도 달게 고난을 받아들여야 합니다.

(벧전 2:19) 애매히 고난을 받아도 하나님을 생각함으로 슬픔을 참으면 이는 아름다우나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우리 육체에 채우는 것이며 그리스도의 고난에 동참하는 것입니다.
매를 맞은 후 두 사람은 감옥에 갇히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결코 그들의 믿음이나 영혼까지 갇힌 것은 아닙니다. 더구나 그들과 함께 하시는 하나님도 감옥에 갇힌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어디에도, 누구도 가둘 수 없는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입니다. 그러한 하나님에게 있어 그의 백성을 가두는 행위는 하나님을 잡아 가두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침묵하시는 하나님을 인간 역사에 개입하도록 촉발케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언제 어디서든지 의로운 자를 괴롭히는 곳에서 하나님의 역사는 활발하게 이루어졌습니다.
햇빛도 없는 깊은 옥에 갇힌 바울과 실라, 인간적으로 보면 절망적 상태에 처한 그들이었지만 추호도 낙담하거나 좌절한 기색이 전혀 보이지 않았습니다.

바울과 실라는 그 옥중에서 실망하지 않고 기도합니다.
기도는 성도의 의무인 동시에 특권입니다. 성도가 이 험악한 세상을 살아가면서도 희망을 잃지 않을 수 있는 이유는 기도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기도는 하나님의 능력을 현실 속에 나타나게 하는 위대한 도구입니다. 기도는 내가 할 수 없는 일을 하나님께 맡기는 것입니다. 고요하고 적막한 땅속 깊은 지하 감옥에서 하나님을 부르고 있는 것입니다. 믿지 않는 자들이 볼 때 부질없는 일이지만 하나님께서 볼 때는 이 일이야말로 가장 의미 있고 효과적인 일입니다.
그리고 찬미함으로써 놀라운 기적을 연출하게 됩니다.

하나님은 찬송 받으시기에 합당하신 분이십니다. 그분은 세상을 만드시고 주관하시며 다스리시며 한없는 사랑으로 보살피십니다.
그래서 성경은 모든 주의 성도들에게(시 30:4), 모든 민족들에게(시 67:3; 68:32; 148:1-14; 롬 15:11) 그리고 온 땅에게(시 66:4) 찬송하라고 일렀습니다.
찬송은 성도의 의무입니다. 따라서 기쁠 때만이 아니라 어떠한 상황에서 이든지 성도는 찬송을 게을리 하지 말아야 합니다. 어려운 환난이 닥치면 닥칠수록 더해야 합니다(욥1:21). 기도와 마찬가지로 찬양도 환경을 변화시키는 능력이 있습니다.

밤중에 찬양 합니다

(행 16:25) 밤중쯤 되어 바울과 실라가 기도하고 하나님을 찬미하매 죄수들이 듣더라
밤중은 고난의 때입니다. 그 고난의 때에 찬송해야 합니다.

종교개혁자 마르틴 루터가 웜스에서 회의를 할 때였습니다. 그는 도무지 엄청난 부담감 때문에 가야 할지 말아야 할지를 생각하며 깊은 한숨을 쉬고 있었습니다. 그 때 그의 아내가 상복을 입고 그가 앉아 있는 방으로 들어왔습니다. 루터는 아내에게 말했습니다. “여보 누가 돌아가셨소?” 그러자 아내는 루터에게 “돌아가셨습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루터는 궁금해서 “누가 돌아가셨는데?”라고 아내에게 묻자, 아내는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하나님이 돌아가셨습니다.” “아니, 그게 무슨 소리요?” 아내는 루터에게 “당신, 하나님이 돌아가시지 않았는데, 왜 그렇게 불안해하세요?”라고 말했습니다. 아내의 말을 들은 루터는 벌떡 일어났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노래했습니다.
“내 주는 강한 성이요. 방패와 병기 되시네, 큰 환란에서 우리를 구하여 내시리로다. 옛 원수 마귀는 이 때도 힘을 써, 모략과 권세로 무기를 삼으니 천하에 누가 당하랴.

내 힘만 의지할 때는 패할 수밖에 없도다. 힘 있는 장수 나와서 날 대신하여 싸우네. 이 장수 누군가 주 예수 그리스도 만군의 주로다.
당할 자 누구랴, 반드시 이기리로다.
이 땅에 마귀 들끓어 우리를 삼키려 하나. 겁내지 말고 섰거라. 진리로 이기리로다. 친척과 재물과 명예와 생명을 다 빼앗긴대도 진리는 살아서 그 나라 영원하리라.“
루터는 이러한 찬송을 부르며 일어났습니다. 그리고 담대히 앞으로 나아가 종교개혁을 끝까지 감당했다고 합니다.

한 젊은이가 있었습니다. 그는 부모에게 상속받은 많은 재산을 탕진해 버리고 빈털터리가 되었습니다. 의지할 곳이 없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친구들은 모두 등을 돌리고 말았습니다. 그는 정말 살고 싶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물에 빠져 죽을 결심을 하고 강변에 앉아 날이 어두워지기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때, 어디선가 노래 소리가 들려왔습니다. 젊은이는 노랫소리에 끌려갔습니다. 그곳에서는 성도들이 힘차게 찬송을 부르고 있었습니다. 젊은이도 그들 틈에 껴서 들어가 앉았습니다. 그러자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마음이 편안해지면서 소망이 넘치는 것을 느꼈습니다. 그래서 젊은이는 자살을 포기하고 새 출발 하였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하나님을 찬미하매 죄수들이 듣더라.

고난 중에 기뻐하는 그리스도인의 모습이 극적으로 묘사되고 있습니다.
(롬 5:3,4) 다만 이뿐 아니라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이는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
(약 1:2) 내 형제들아 너희가 여러 가지 시험을 만나거든 온전히 기쁘게 여기라
(벧전 5:6,7) 그러므로 하나님의 능하신 손 아래서 겸손하라 때가 되면 너희를 높이시리라 너희 염려를 다 주께 맡겨 버리라 이는 저가 너희를 권고하심이니라

그러므로 기적적인 구출을 바라는 간구보다는 고난에 대한 신앙의 승리를 보여줍니다(Neil). 결과적으로 이적적인 방법으로 풀려나게 됨으로써, 간수들은 바울 일행의 찬송과 기도에 대한 하나님의 응답이라 깨닫게 되고 하나님을 두려워하여 회개하기에 이른 것입니다.

웨슬리 목사님의 친구 중에 존 넬슨(John Nelson)이라는 분이 있었습니다. 그는 영국교회가 감리교도들을 박해할 때 브로스포스에 있는 지하 감옥에 투옥된 바 있습니다. 그 당시 그가 갇혀 있던 감옥은 도살장 밑의 지하였습니다. 도살장에서 흘러내리는 피와 오물 때문에 돼지우리보다 더 악취가 나는 곳이었다고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넬슨의 영혼 속에는 하나님이 채워주시는 은혜와 사랑이 충만했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그 감옥이 낙원처럼 느껴졌다고 간증을 하였다고 합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있으면 어디서든지, 어떤 환경에서든지 찬송할 수 있음을 보여줍니다

찬양이 절망의 옥문을 여는 능력이 된 줄로 믿습니다.

(행 16:26) 이에 홀연히 큰 지진이 나서 옥터가 움직이고 문이 곧 다 열리며
곽선희 목사님의 간증입니다. 곽 목사님이 사랑하는 친구 목사님이 있는데 그 분이 6·25 때에 인민군의 포로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총상 당하게 되었는데 인민군이 묻기를 "네 마지막 소원이 있으면 말하라"고 하더랍니다. 그래서 "찬송 한 번 부르렵니다."라고 한 후 "하늘가는 밝은 길이 내 앞에 있으니"를 부르기 시작했답니다. 그런데 2절 부를 때에 갑자기 총소리가 "따당"하고 나더랍니다. '이제는 죽었구나.'라고 쓰러졌는데, 정신을 차리고 보니 웬 사람의 등에 업히어 가더랍니다. 알고 보았더니 그 인민군 틈에 장로님의 아들이 있었는데 찬송을 부를 때에 갑자기 감동이 되면서 옆에 서 있는 인민군들을 쏘아버리고 자기를 엎고 남쪽으로 도망친 것이요, 자기도 하나님의 은혜로 산 줄 알고 신학교로 들어가 목사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프랑스 황제 루이14세는 베르사유 궁전을 완성하고 프랑스의 권위를 세계에 널리 떨쳤습니다. 하지만 그는 철저한 가톨릭 신자로 신앙의 자유를 인정하지 않고 신교를 박해했습니다. 특히 신교의 대표자였던 세오졸프를 ‘칙령 거역죄’라는 죄목으로 파리 탑 위의 감옥에 가뒀습니다. 그해 부활절에 루이14세는 황제의 위엄을 갖추고 호화찬란한 부활절 행렬대를 거느리고 파리시가에 나서려고 했습니다. 감옥에서 그 광경을 보고 있던 세오졸프는 하나님의 영감을 받아 찬송을 큰소리로 불렀습니다. “할렐루야 우리 예수 왕의 왕이 되시고 우리들의 중보되신 성령 증거하시네 구주 예수 부활하사 처음 열매 되셨네 구주 예수 부활하사 처음 열매 되셨네”(159장)라는 곡이었습니다. 이 때 ‘왕의 왕은 예수님밖에 없다’는 가사가 루이14세에게 큰 충격을 주었습니다. 그는 곧장 감옥으로 달려가 세오졸프의 손을 잡고 자신의 잘못을 고백한 후 그를 석방하고 신앙의 자유를 선포했다고 합니다.

누구든지 예수님 앞에서는 죄인입니다. 예수님은 죄인인 우리의 구세주요 고집과 이기심이란 감옥에서 우리를 해방시켜 주시는 분입니다. 우리의 생명을 살려주신 분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왕 중 왕이십니다.

찬양에는 자유케 하는 능력이 있습니다.

(행 16:26) 모든 사람의 매인 것이 다 벗어진지라
하나님의 손길이 얼마나 섬세하게 미쳤는가 하는 내용을 '벗어졌다'(아네데)는 말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의 첫 번째 왕인 사울 왕이 하나님 앞에 범죄 하자, 그에게 악신이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이 악신, 곧 귀신은 사울에게 들어가자마자 사울 왕을 괴롭히기 시작했습니다. 사울 왕은 다윗을 왕궁으로 불러들여 그로 하여금 수금이라고 불리 우는 하프(Harp)를 을 타게 했습니다. 그러자 악신이 떠납니다.
(삼상16:23) 하나님의 부리신 악신이 사울에게 이를때에 다윗이 수금을 취하여 손으로 탄즉, 사울이 상쾌하여 낫고 악신은 그에게서 떠나더라.
바로 이것이 찬양의 능력입니다. 찬양을 통해 악신을 쫓아내고 마음의 평안을 되찾을 수 있는 줄로 믿습니다. 찬양을 할 때 여호와의 신, 즉 성령께서 우리 안에 들어와 역사하실 줄로 믿습니다.

미국 캘리포니아주 파사디나에서 세상을 떠나신 옥호열 선교사님은 6.25 때 거제도 포로수용소의 군목으로 계시면서 북한의 인민군 포로들을 돌보고 있었습니다. 하루는 저녁 식사 후 막사를 한 바퀴 돌다가 화장실에서 어떤 포로 청년이 내가 죽일 놈이지. 내가 죽일 놈이지하며 울고 있는 것을 보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청년. 나는 아시다시피 여기서 여러분을 돕기 위해 있는 군목인데 무슨 사정이 있으면 이야기하시오. 내가 도울 테니라고 말하자 이 청년은 이렇게 털어놓았습니다. 목사님 저는 이북에서 예수님을 믿지 않았었습니다. 그런데 제가 결혼한 아내가 어떻게 예수님을 진실 되게 잘 믿는지 나는 마음이 상해서 도저히 견딜 수가 없었습니다. 한번은 아내를 찾으러 교회에 갔는데 예배 중이었습니다. 그래도 보란 듯이 신발을 신고 뚜벅뚜벅 들어가 제 아내의 머리칼을 휘어잡고서 예배당 뜰에서 한참 때려주었습니다. 그래도 한 번도 반항하지 않더군요. 이상한 것이 다른 말은 제가 죽으라면 죽는 시늉까지 내는 아내인데, 교회 나가지 말라는 말은 전혀 듣지를 않았습니다. 그러다가 제가 인민군에 징집이 되어 전쟁을 하다가 유엔군에게 포로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아침 미군 장교가 나오더니 우리 포로들을 한 줄로 세우고 뭐라고 말을 하면서 손짓을 하는데 예수 믿는 사람을 골라내는 것 같았습니다. 그때 살고 싶은 생각이 났습니다. 그래서 제 차례가 되었는데 가슴에 십자가를 그렸더니 노래하라고 손짓을 하지 않겠어요. 그런데 제가 찬송가를 압니까? 갑자기 머리속에 제 아내가 저한테 매 맞고 부르던 노래가 생각났습니다. 그래서 그저 살기 위해서 노래를 불렀습니다. 그랬더니 오케이 하면서 저를 따로 세워 여기까지 오게 되었고. 지금은 예수님을 내 구주로 영접하게 되었습니다. 내가 구원받게 된 것은 제 아내의 찬미 때문이었습니다.(21세기예화-매 맞고 부른 아내의 찬양이 남편을 살리다

여호사밧과 유다 백성이 모압 연합군의 침공을 받아 큰 두려움에 싸여 하나님 앞에 금식하며 간구하자 하나님께서는 야하시엘을 통해 응답하셨습니다. 그 응답의 말씀은 '너희와 함께 한 여호와가 구원하는 것을 보라'라는 놀라운 내용이었습니다. 즉 이 전쟁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니 너희가 싸우지 않고 승리를 얻게 되리라는 것입니다. 이로써 여호사밧과 유다 백성을 감싸고 있는 두려움은 사라졌을 뿐만 아니라 그들은 전쟁의 승리를 확신하였습니다.

야하시엘을 통한 여호와의 예언의 말씀이 임하자 여호사밧과 백성들은 몸을 굽혀 여호와 앞에 경배를 드렸습니다. 여호사밧과 유다 백성의 하나님의 구원 예언에 대한 감사와 경배는 그핫 자손과 고라 자손에게 속한 레위인들의 찬송으로 이어졌습니다. 그들은 목소리를 높여 하나님을 찬양하였습니다. 적극적인 믿음을 지닌 자는 아직 이루어지지 않았다고 할지라도 이처럼 진심으로 하나님을 찬양할 수 있습니다.

여호사밧은 유다 백성들이 드고아 들로 진군할 때에 오직 하나님 여호와를 신뢰하라고 격려하면서 그것이 형통한 길이 될 것을 확신했습니다. 또한 성별한 성가대에 예복을 입히고 군대 앞에 행진하면서 찬송을 부르게 했습니다. 그때 하나님께서 친히 적군들을 혼란케 하시어 자기들끼리 치고 받게 함으로써 자멸 상태에 이르게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대로 유다 백성은 실제도 싸움에 참여하지도 않고 하나님의 승리의 구원 역사를 본 것입니다. 국가적인 위기를 당한 여호사밧 왕은 오직 하나님만 바라보았습니다. 이러한 그의 신앙적인 자세는 난국을 슬기롭게 해결하는 최상의 방법이었습니다. 신앙 안에서 낙망이란 결코 있을 수가 없습니다. 신앙은 희망이며 능력이며 승리인 것입니다. 여호사밧의 신앙을 보시고 하나님은 유다가 승리하도록 역사하셨습니다. 칼 한번 대지 않고도 찬송을 통해서 승리하는 기적이 나타난 것입니다.

제2차 대전때의 이야기입니다. 12월24일 크리스마스 이브에 작은 강을 사이에 두고 프랑스군과 독일군이 대치하고 있었읍니다. 별빛만이 아롱지는 이 살벌한 전쟁터는 죽은듯이 고요했읍니다. 이때 참호속에 앉았던 한 프랑스 병사가 고향생각을 하며 무심코 낮은 휘파람소리로 크리스마스 캐롤을 불렀읍니다. 그런데 이 노래가 강을 건너 독일 보초병의 귀에 들어갔읍니다. 독일병사도 캐롤을 들으며 향수에 잠겨 그 멜로디를 따라 입술을 움직이고 있었읍니다. 서로 원수인 두 병사의 크리스마스 캐롤이 차차 커졌읍니다. 고향생각에 잠겨있던 다른 군인들도 모두 이 노래에 가담하게 되었으며 마침내 고요하던 강가에는 우렁찬 캐롤의 대향연이 벌어지고 말았습니다. 아군도 적도 없었읍니다. 오직 한 노래를 부르는 인간들만이 있었읍니다. 모든 병사들은 목이 터지게 캐롤을 합창하며 성탄을 맞았읍니다. 그리고 대장들이 서로 의논하여 세시간 동안 적과 적이 자리를 같이하여 성탄 예배를 드리고 즐거운 파아티를 벌였다는 것입니다. 노래는 국경을 초월한 만국어이고 전쟁까지라도 멈추게 할수 있는 평화의 힘을 지니고 있읍니다. 사람을 구원한 것입니다. 기독교는 노래하는 종교라고 불리울만큼 노래를 중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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