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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신의 자녀입니까? 약속의 자녀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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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신의 자녀입니까? 약속의 자녀입니까?"

본문: 로마서 9:6-13

1. 들어가는 말

신, 구약 성경 전체에는 약 35,000여 개의 약속들이 등장합니다.

이 많은 약속들은 하나님이 인간에게 하신 약속으로,

이미 대부분의 약속들은 이미 이루어졌었고, 또 오늘을 살아가는 저희들을 통하여 어제도, 오늘도,

그리고 내일도 그 약속들은 끊임없이 이행되고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하신 마지막 약속은 인간들을 심판하시겠다고 하신

'마지막 날에 대한 심판의 약속'입니다.

Jonathan Swift라는 사람은 "약속과 파이는 깨어지기 위하여 존재한다"고 했지만,

사람의 약속은 빈번하게 깨어질지 모르지만,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하신 약속은 그렇지가 않습니다.

1세기의 가장 위대한 이방인의 전도인이었던 바울은

로마에 살고 있던 교인들에게 쓴 편지를 통하여 '약속의 자녀'와 '육신의 자녀'에 대한 말씀을 주십니다.

약속의 자녀와 육신의 자녀가 어떻게 다른가?

우리는 어떤 자녀에 속하며, 하나님은 우리에게 어떤 자녀가 될 것을 원하시는가?

이것이 오늘의 말씀을 통하여 저희들이 함께 나누려고 하는 말씀입니다.



2. 몸 말

1) 약속의 자녀와 육신의 자녀(8절)

오늘의 본문인 로마서는 사도 바울이 로마에 살고 있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쓴 편지입니다.

기원 후 약 57년 정도니까, 예수님이 승천하신 후 24년 정도가 지난 후에 쓴 편지인데,

이 로마서의 가장 핵심적인 주제는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입니다.

곧 인간의 구원 문제를 다룬 것이 로마서라는 말씀입니다.

사도 바울은 구약 성경을 면밀하게 연구하여 이스라엘의 구원 문제에 대한 한 가지 결론을 얻을 수 있었는데,

그 마지막 결론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의 자손을 통해서 구원을 허락하셨는데,

그렇다고 아브라함의 자손이라고 누구나 다 구원받는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통해서만 구원을 가능하게 하셨는데,

그렇다고 모든 아브라함의 자녀가 다 구원받는 다는 것은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바울은 그리고 그 좋은 예로 아브라함의 아들들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아브라함의 아들이 모두 두 명인 것으로 아는 성도님들도 계신데,

아브라함은 첩 하갈을 통해서 맏아들인 이스마엘을 얻었고, 아내인 사라를 통해서 이삭을 얻기도 했지만,

창세기 25장을 보시면 후처 그두라를 통해서 다른 여섯 명의 아들을 더 얻게 됩니다.

그런데 오늘 말씀 7절을 보시면 "아브라함의 씨가 다 그 자녀가 아니라,

오직 이삭으로부터 난 자라야 네 씨라 칭하리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 말씀은 창세기 17:19절의 말씀인데,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말씀하시기를

"네 아내 사라가 정녕 네게 아들을 낳으리니, 너는 그 이름을 이삭이라 하라.

내가 그 와 내 언약을 세우리니, 그의 후손에게 영원한 언약이 되리라"고 하셨습니다.

다른 아들들도 있는데, 굳이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아내 사라의 몸을 통하여 얻게 되는 아들 이삭만을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계보로 삼으시겠다는 약속이셨습니다.

아브라함의 여덟 아들 모두는 아브라함의 피를 받아 태어난 정상적인 아브라함의 핏줄들입니다.

그럼에도 하나님은 다른 일곱 아들들을 다 버리고, 오직 이삭만 선택하셨습니다.

그만이 구원을 받을 수 있는 자로 선택을 하셨고, 그의 후손들만이 구원을 받을 수 있게 하셨습니다.

사도 바울은 이렇게 하나님께서 특정인을 선택하여 구원해 주시겠다고 약속하신 사람을

오늘 8절의 말씀에서 '약속의 자녀'라고 부릅니다.

그런데 구원을 받는 자가 있으면, 동시에 구원을 받지 못한 자도 있게 됩니다.

곧 구원을 약속 받은 '약속의 자녀'도 있지만, 동시에 구원을 약속 받지 못한 사람들도 있다는 말씀입니다.

바울은 이렇게 구원을 약속 받지 못한 사람들을 같은 8절에서 '육신의 자녀'라고 부릅니다.

성경은 이렇게 구원받지 못하는 '육신의 자녀'들의 상황을 '유기'되었다고 말합니다.

'유기'란 버림을 받았다는 말과도 같지만, 사실은 버림을 받았다는 의미는 아닙니다.

'하나님이 내 버려 두셨다'는 말이 정확한 표현입니다.

그냥 버려 두면 어떻게 됩니까? 버려 두면 죽습니다.

버려 두면 죽을 수밖에 없는 이유는, 절대로 인간은 자존해서,

스스로 독립해서 살 수 없는 '영적인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지난 주 토요일인 9월 2일자 신문을 보니까,

샌디에고에서 알폰소 페나랜트라는 40세 남편이 아내를 구타해서 아내 요란다 카마쵸를 살해하고,

도망을 쳤습니다.

비극은 이것으로 끝난 게 아니었습니다.

생후 4개월 된 두 명의 여자 쌍둥이가 그 집에 그대로 방치된 것입니다. 엄마는 피투성이로 죽었고,

아빠는 살인자로 도망을 쳤고, 남은 4개월의 두 여자 쌍둥이는 배고픔과 본능적인 두려움으로

밤새도록 울었지만, 그 아파트 주변의 이웃들은 누구도 관심을 가지지 않았고,

누구도 경찰이나 병원에 연락을 하지 않았습니다.

결국 두 명의 4개월 여자 쌍둥이는 울다가 지쳐서 탈수증으로 숨을 거두었습니다.

인간의 상황은 마치 갓난 아이 같습니다. 방치되면 죽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 이유는 첫 째로 인간의 무기력함 때문입니다.

우주를 다 아는 것 같지만, 실상은 벤츄라 해변가에 넓게 널려진

모래사장의 모래 한 알 만큼도 모르는 게 인간입니다.

인류의 역사를 한눈에 꿰뚫는 석학들도 정작 내일 펼쳐질 자신의 운명에 대해서는

알지 못하는 게 인간입니다.

지구를 두 동강이 낼만한 무기를 만들어 낸다고는 하지만,

허리케인이나 토네이도 같은 폭풍 앞에서, 지진과 화산, 가뭄과 홍수 앞에서는 속수무책인 것이 인간입니다.

인간이 방치되면 죽을 수밖에 없는 치명적인 두 번째 이유가 또 있습니다.

그것은 인간의 죄 때문입니다. 아담의 피를 이어받은 인간은 근본적으로 악하기 때문입니다.

이 땅 자체가 이미 악에 물들어 있기 때문에 이 땅에 사는 생명들은

그 악하게 오염된 세상 속에서 자신도 모르게 악한 존재로 살게 됩니다.

온갖 악이 우리 인간의 영혼을 죽이고 있습니다.

윤리와 도덕적으로도 악하게 변질되었지만, 종교적으로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알지 못하고,

인정하지 못하는 악은 결단코 용서받을 수 없기에, 결국 인간의 운명은 '멸망'으로 결론이 날 수밖에 없습니다.

이렇게 악한 존재로 살 수 밖에 없는 모든 인간들은 누구도 하나님의 심판을 피할 수가 없습니다.

그렇기에 이 세상 사람 모두가 구원을 받지 못한다고 할지라도, 그것은 하나님의 책임이 아닙니다.

인간 스스로의 범죄로 인한 자업자득이기 때문입니다.

바로 그런 심판의 칼 앞에서 죽음을 기다리고 있는 인간들에게 하나님은 한 가지 구원의 길을 열어 주셨습니다.

그것은 바로 아브라함을 선택하시고, 아브라함의 여덟 아들 중에서 오직 '이삭'만을 선택하셔서

그를 '약속의 아들'로 삼으심으로 구원의 길을 열어 주셨습니다.

그렇지만 이삭의 후손이라고 모두가 구원을 받는 것은 아닙니다.

나머지 일곱 아들들은 '육신의 아들'로 구원을 약속 받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혹 누군가가 그렇게 하나님께 물을지 모릅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의 여덟 아들 중에서 이삭을 선택하고 나머지 일곱 아들들 모두를 유기 하신 것은,

이삭이 본 부인인 사라의 몸에서 난 친자이고,

나머지 일곱 아들들은 첩과 몸종에게서 난 서자 라서가 아닙니까?"

바울은 누군가의 이런 질문을 미리 예상하고 오늘 말씀 11-13절을 통하여 또 다른 예를 들었습니다.

그것은 이삭의 쌍둥이 두 아들 에서와 야곱의 예였습니다.

똑 같은 아버지 이삭에게서 태어난 쌍둥이지만, 하나님은 야곱을 선택하시고, 에서를 유기 하셨습니다.

언제부터 한 아들은 선택하시고, 다른 한 아들을 유기 하셨을까요?

오늘 말씀 10절 끝과 11절 첫 부분을 보시면,

그 두 쌍둥이 에서와 야곱의 어머니 리브가가 두 아들을 잉태하고 아직 태어나지도 않았을 때부터,

하나님은 이미 한 아들을 선택하시고 부르셨다고 하셨습니다.

이미 태어나지도 않았는데 하나님은 야곱을 사랑하시고, 에서를 미워하셨다고 되어 있습니다.

여기서 '미워했다'는 말을 잘 해석해야 합니다.

미워했다는 말은 '사랑하지 않았다'는 말입니다.

사랑의 반대말이 미움이 아니라 '무관심'이라는 말과 같습니다.

하나님이 야곱은 사랑하셨지만, 에서에게는 관심이 없으셨다는 말씀입니다.

유기 하셨다는 말이지요.

그럼 유기된 에서의 운명은 어떻습니까? 에서의 운명은 다른 보통 사람들의 운명과 같아집니다.

자신이 지은 죄의 늪에서 헤어 날 수가 없게 됩니다.

에서와 그 동생 야곱 모두가 태어나면서부터 죄의 늪에 빠지기는 했지만,

하나님은 야곱에게만 구원의 밧줄을 던져주고,

에서에게는 구원의 밧줄을 던져 주지 않으셨다는 말씀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다음 질문을 할 수 있습니다.

"왜 하나님은 아브라함만을 선택하셨고, 그의 여덟 아들 중 오직 이삭만을 선택하셨으며,

이삭의 두 아들 중 야곱만을 선택하셨습니까?"

즉 "아브라함과 이삭, 그리고 야곱으로 이어지는

이스라엘 백성들만을 선택하신 하나님의 목적은 무엇입니까?"라고 물을 수 있습니다.

그것은 성경이 분명하게 우리에게 대답을 주십니다.

그 대답은 예수 그리스도로 이어지는 혈통을 유지하시기 위해서였습니다.

아브라함과 이삭, 야곱과 유다, 그리고 보아스와 이새, 다윗으로 이어지는 혈통은

마침내 요셉과 예수 그리스도로 이어지게 됩니다.

하나님은 이렇게 아브라함으로부터 예수님으로 이어지는 혈통을 만드신 후에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위대한 '약속의 가족'을 형성하십니다.

이제까지는 아브라함으로 연결되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만 구원의 밧줄을 허락하셨는데,

이제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모든 사람들에게조차도 구원을 허락하시려는,

그래서 이제는 구원의 가능성을 더 확대하고 넓히기 위한 하나님의 은혜 때문이었습니다.

그렇기에 이제는 아브라함의 계보가 아니라도 괜찮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아니라도 괜찮습니다.

피부색이 까맣든 노랗든 하얏튼지 상관이 없습니다.

이제는 누구든지 예수님을 믿기만 하면,

그 분이 내 영혼을 구원해 주는 단 하나뿐인 구원자라는 사실을 믿는 사람 모두에게

구원을 허락하시겠다고 선포하셨습니다.

우리는 바로 이 구원의 선포를 '좋은 소식'이라는 말의 'Good News', 복음이라고 말합니다.

아브라함과 이삭, 야곱을 선택하신 하나님은 우리에게도 선택의 기회를 주셨습니다.

구원의 가능성이 전혀 없었던, 그래서 '육신의 자녀'로 필연적인 영혼의 멸망만을 기다려야 했던 저희들에게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이방인인 저희들조차도 '약속의 자녀'가 될 수 있는 길을 가능하게 해주셨고,

문을 열어 주셨는데, 그것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내 영혼의 구원자로 인정하고 믿는 일입니다.

기독교의 구원은 바로 여기서 결정이 됩니다.

길어야 100년의 인생만을 살겠다는 사람들 말고, 100년이 지난 후에,

그리고 내가 죽은 다음에 또 다른 영혼의 세계가 있음을 믿고,

영혼의 세계에서 살아 남기를 원하시는 분들이 살 수 있는 길은 바로 이 길,

하나 밖에는 없다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2) 약속의 자녀들에게 요구되는 약속 이행

그런데 여기에 또 문제가 있습니다.

하나님은 그렇게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약속의 자녀'들이 되기를 원하는 사람들에게도

'약속의 자녀들'만을 위한 특별한 행동지침을 정해 주셨고, 그 행동지침대로 살라고 하셨습니다.

처음에 하나님께서 약속의 자녀들인 이스라엘 백성들간과 약속하셨던 것처럼,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에게도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의 특별한 행동지침을 주셨는데,

그것이 바로 성경의 말씀입니다.

처음의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과의 약속을 잘 지키는 듯 했지만,

점차 세월이 지나면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 약속을 지키지 않기 시작했습니다.

이스라엘은 혈통적인 특권의식에 빠져서,

자신들이 혈통적으로 이스라엘 자녀들이기 때문에 아무런 조건 없이

하나님으로부터 구원을 받을 수 있다고 착각했습니다.

"나는 혈통적으로, 내 몸 속에 아브라함의 피가 흐리기 때문에

저절로 구원을 받게 될 것"으로 생각을 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과의 약속이행 없이도 자신들이 구원받을 이스라엘 백성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렇지만 그것은 오해였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약속의 자녀로 삼으신 것은,

하나님과 이스라엘 백성들 간의 '약속'을 근거로 한 것이었습니다.

그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이 주신 '행동 강령',

곧 하나님의 말씀을 잘 지키는 것을 전제로 한 것이었습니다.

오늘 말씀 6절은 그렇게 오해하고 있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한 바울의 경고입니다.

"이스라엘에게서 난 그들이 다 이스라엘이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이 말씀은 "교회에 나온다고 모두가 다 구원받을 '약속의 아들'이 아니라"는 말과도 같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영적인 교만으로, 하나님과의 약속 이행에는 관심이 없이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지 않았던 이스라엘 백성들은

결국 '영적인 자녀'라는 자격을 박탈당하게 되었습니다.

아마존 강 유역에 보물을 찾으러 갔던 탐험대 일행 다섯 명이

그 지역의 식인종들에게 쫓겨 도망을 가게 되었습니다.

가지고 간 모든 물품들을 내 팽개치고 아마존 강 하류로 도망가다가

그들은 운이 좋게도 배 한 척을 발견하였습니다.

모두들 그 배에 올라타고 묶여 있는 밧줄을 풀었습니다.

그리고서 한 숨을 쉬었습니다.

"이제는 살았구나!"하고 안도의 숨을 쉬었습니다.

강을 건너만 가면 문명의 세계가 있고, 자신들이 타고 온 차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모두가 서로의 얼굴을 보며 어서 배가 강 건너까지 가기를 기다렸습니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습니다.

그 배에 노가 없었던 것입니다. 모두가 노를 가지고 배를 타는 것을 잊었던 것입니다.

배는 강을 건너가는 것이 아니라, 강 하류, 폭포를 향하여 빠른 속도로 내려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약속의 자녀들'이란 배에 올라탄 사람들입니다.

누구든 이 배에 타기만 하면 강 건너 구원의 땅을 향하여 갈 수 있는 가능성은 있지만,

이 배에 올라탄다고 모두가 강 건너 구원의 땅으로 갈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배를 저어야 합니다. 각자가 노를 들고 구원의 땅을 향하여 노를 저어야 합니다.

'노를 젓는 일,' 그것은 하나님과의 약속을 지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가르쳐 주신 말씀을 지키며 사는 일입니다.

'노를 젖는 일'이란 신실한 그리스도인으로 살도록 최선을 다하는 삶을 말합니다.

배를 탔다고, 교회를 다닌다고 그 배가 강 건너편, 생명의 땅으로 가는 것은 아닙니다.

노를 저어야 합니다.

'약속의 자녀'들에게는 '약속의 자녀들처럼 살 것'을 요구받습니다.

죄로 물든 세상을 청소하고 정결하게 하며,

어둠을 밝게 비치는 빛처럼, 썩는 것을 방지하기 위하여 자신의 몸을 녹이는 소금처럼 살 것을 요구받습니다.

혈통적으로는 이스라엘 사람, 아브라함의 후손들이 많았음에도,

정작 '약속의 자녀'들은 그리 많지 않았습니다.

이 땅에 교회는 많으며 교인은 많지만, 예수님의 자녀들, '약속의 자녀'들은 얼마나 될까요?



3. 맺 는 말

우리가 사는 이 세상에는 '약속의 자녀'들과 '육신의 자녀'들이 공존하며 살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자녀'들과 '세상의 자녀'들, '구원받을 자녀들'과 '유기 될 자녀들'이 함께 살고 있다는 말씀입니다.

어떻게 약속의 자녀, 하나님의 자녀, 구원받을 자녀들이 될 수 있습니까?

성경은 단 한 가지의 방법, 예수 그리스도를 내 영혼을 구원할 구원자로 믿는,

이 방법 외에는 없다고 말씀하십니다.

로마서 10:9을 펴 보십시다.

"네가 만일 네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얻으리니,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

이 말씀을 믿으셔서 더 이상 우리 모두가 '약속의 자녀', '하나님의 자녀',

그리고 '구원의 자녀'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 멘




김종환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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