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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그네의 삶과 죽음 창세기 23장 1-9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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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그네의 삶과 죽음 창세기 23장 1-9절

몇해전 서울 한강변 양화진이란 곳에 선교사들의 묘지가 있다기에 가보았다. 120년전의 우리나라하면 참으로 미국의 문화생활에 젖은 선교사는 살기 어려운 상태의 나라였다. 그런 우리나라에 입국하여 宣敎師로 일하다가 풍토병으로 죽은 자들도 있었다. 선교사 墓地에는 어린 아이들의 무덤도 있었다. 그런 선교사들의 죽음을 기리는 역사적인 땅이 서울 한강변 양화진에 있었다. 나는 그 무덤을 통해 120년전에 우리나라에 임한 하나님 선교의 발자취를 살펴볼 수가 있었다. 外國에서 오랜 歲月 나그네요 우거(永住)하는 者가 아니면 이런 맥락을 感知할 수가 없는 面이 있다. 나그네의 마음은 나그네만이 理解할 수 있기 때문이다.

창세기23장은 사라의 죽음과 그녀의 장례 기사 중 매장지 구입 과정이 길게 언급되어 있다. 사라의 생애를 보면 남편 아브람을 따라 65세에 故鄕 땅 하란을 떠나 未知의 世界에서 나그네의 삶을 살았다. 본문 1절을 보면 127세에 죽게된 사라를 말하는데 성경 가운데 죽은 여인의 나이를 말한 것은 이곳 뿐이다. 아브라함은 사라보다 10살 위인 137세인데 아내인 사라가 먼저 죽고말았다. 2절을 보니 아내 사라의 죽음에 슬퍼하며 애통하는 아브라함이 보인다. 사라의 어떤 점이 아브라함으로 하여금 눈물을 흘리게 했을까? 좀더 잘 해줄 수 있었으면 좋았건만 하는 후회가 있었을 것이다. 아내를 누이라고 거짓말하며 애굽의 바로왕에게 팔아 넘겼을 때에 사라가 자기의 행복을 포기하고 남편을 위해 희생했던 사랑이 기억났을 것이다. 그런 아브라함 자신의 불신앙과 연약함으로 인해 어려운 지경에 처해있던 사라를 하나님이 막아 주셨던 일들이 생각났을 것이다. 하나님이 존귀하게 여기신 사라를 내가 제대로 대해주지 못했구나 하는 애통하는 마음이 솟구쳤던 것이다.

오랜 나그네의 삶을 살았던 아브라함과 사라는 자식가 없었다. 古代社會에서는 致命的인 일이어서 당시의 풍습대로 여종을 통해 대를 잇게하려 했다. 그런데 여종 하갈을 통해 이스마엘을 낳았어도 계속 갈등과 번민이 있었다. 여종이었던 하갈이 그만 아들을 낳더니 돌연 태도가 달라져 사라를 업신여기는 것이었다. 그 후에 태어난 하나님의 약속의 아들 이삭을 희롱하는 이스마엘로 인해 사라의 고민이 더욱 커졌다. 결국 사라는 아브라함을 보채어서 하갈과 이스마엘을 내어 쫓았다. 당시의 풍습 가운데 여종과 주인 사이의 아들은 유산을 받을 권리가 있었다. 그런데 종은 재산을 포기하고 자유인이 될 수도 있었기에 아브라함은 하갈과 이스마엘에게 어느 정도의 재산과 물과 양식을 건네주고 내쫓았다. 유대 랍비 전승에 의하면 사라는 모리아 山의 이삭을 번제물로 바친 사건을 듣고 놀란 나머지 충격을 받아 숨지고 말았다는 전승도 있다.

3절에 보면 아브라함이 悲嘆의 자리에서 일어나 장례의 준비를 시작한다. 슬픔은 끝이 없지만 마냥 슬퍼하기만해선 안된다. 4절이하에 자신을 나그네요 우거한자(게르 웨토솨브)라고 고백한다. 아브라함은 사라를 위해 막벨라 굴의 무덤자리를 비싼 가격에 구입하는 내용이 창세기23장의 내용이다. 이러한 묘사는 후일 이스라엘 민족에게 가나안 땅이 자신들의 조상이 묻힌 땅임을 증거하기 위해서였다. 즉 약속의 땅을 보장받은 이스라엘 민족에게 그 땅의 소유권에 대한 역사적인 증거를 확실하게 남기기 위해서였다.

아브라함은 신실한 信仰人이며 同時에 地域社會에서는 誠實한 주민이었다. 本文 5절 以下의 말씀을 보면 헷 족속이 아브라함을 향해 당신은 우리 중 하나님의 방백이시니라고 말했다. 이말은 하나님이 세우신 지도자라는 말로 you are God's prince among us 즉 全能하신 하나님으로부터 주어진 尊嚴을 나타낸다. 아브라함과 사라가 세상에 대해 感化力을 지닌 삶을 살았다는 것이다.

창세기23장 16절을 보니 아브라함이 사라의 무덤을 은 400세겔에 사서 '매장했다'는 말에 깊은 의미가 있다. 예레미야서 32장 9절에 보면 예루살렘 밖 아나돗의 밭을 購入했을 때 그 값이 銀17세겔이었으니 그와 比較해 볼 때 아브라함은 사랑하는 아내를 위해 무덤의 葬地에 대하여 대단히 값비싼 댓가를 지불하였다. 이렇게 함으로 나중에 자기가 죽었을 때 묻히고 이삭 야곱 레아 리브가 차례로 죽어서 헤브론에 있는 막벨라 굴에 묻힐 수가 있었다. 삶을 결산하는 순간 깨끗하게 마무리 짓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이러한 본문에 감추어져 있는 신앙의 진리를 살펴보면서 사라의 죽음에서 어떤 모습의 신앙을 갖고 살아가야 할 것인가를 생각해 보자.

첫째, 人生의 本質과 實存을 분명하게 알고 살아야 하겠다.

히브리서 11장에서 이 사람들은 다 믿음을 따라 죽었으며 약속은 받지 못하였으되 그것들을 멀리서 보고 환영하며 또 땅에서는 외국인과 나그네로라 증거하였으니 이같이 말하는 자들은 본향 찾는 것을 나타냄이라고 했다. 여기서 더 나은 본향을 사모했던 아브라함을 볼 수 있다. 사도 베드로는 베드로전서 2장 11절에서 사랑하는 자들아 나그네와 행인 같은 너희를 권하노니라 했다.

이렇게 성경을 보면 우리 인생은 고향인 하나님 나라를 떠나 나그네로 이 세상을 얼마동안 살다가 고향인 하나님 나라로 돌아가는 것이라고 했다. 우리는 이 세상에 얼마동안 살다가 떠나가는 나그네이다. 인생이 나그네라는 뜻은 사람이 세상에서 떠나갈 때에 모든 것을 두고 가야 된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우리는 아무것도 세상에 가지고 온 것이 없으매, 아무것도 가지고 갈 수 없다." (딤전6:7) 빈손으로 왔다가 빈손으로 돌아가는 것이 인생이다. 이 말은
세상에 살면서 자신이 이 세상에서 수백 년을 살 것처럼 욕심을 부리며 세상에 마음을 굳히고 세상 것만을 위해 사는 사람을 향한 경고이다. 인생의 본질을 안다면 애착을 버리는 과정은 그리 어렵지 않다. 그리하여 성경은 "내일 일을 너희가 알지 못하는도다 너희 생명이 무엇이뇨 너희는 잠간 보이다가 없어지는 안개니라"(약4:14)고 말하고 있다.

둘째, 우리는 나그네를 잘 대접해야 한다.

무엇이든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는 것은 사랑의 구체적 표현이다. 사랑함으로써 사랑받고 대접함으로써 대접받는 것이 사람 사는 세상을 천국으로 만드는 황금률이다. 남을 귀하게 대접함으로 하나님을 만날 수 있고 참된 기쁨을 누릴 수 있다.
창세기18장을 보면 아브라함과 사라는 장막 안에서 살았다. 어느날 상수리나무 수풀 근처 그들의 장막문에서 세사람의 손님을 맞아들여 대접하였다. 그들은 손님을 주님처럼 모셨다. 진정 그 세 사람은 하나님 자신이었다. 그런데 나그네요 행인을 대접할 때 부지중에 하나님을 만났다. 대접하는 과정 자체에서 벌써 하나님을 만나는 복을 받았다.
우리는 이런 맥락에서 외국인을 나그네를 돌볼 수 있어야 한다. 너는 이방 나그네를 압제하지 말라 너희가 애굽 땅에서 나그네 되었었은즉 나그네의 정경을 아느니라"(출23:9) 외국인이 너희 땅에 우거하여 함께 있거든 너희는 그를 학대하지 말고 너희와 함께 있는 타국인을 너희 중에서 낳은 자 같이 여기며 자기 같이 사랑하라는 말이다.

세째, 우리는 목적 있는 생애 즉 순례자의 삶을 살아야 한다. (히11:13).

우리는 이 땅에서 목적이 있는 순례자이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민족을 통해 우리에게 보여 주시는 교훈이 있다. 인생이 나그네임을 철저히 깨닫고 나그네 정신으로 살 때 창조주 하나님을 더 잘 섬길 수 있다. 따라서 나그네임을 잊고 이 땅에만 안주하려고 할 때 그것은 곧 우상숭배가 된다. 우리가 나그네인 줄을 아는 이상에는 우리를 나그네로 이 세상에 보내신 하나님의 뜻을 찾아 이루는 삶을 살아야겠다. 하나님께서는 뜻이 있어서 우리를 이 세상에 나그네로 보내셨다. 따라서 성경은 우리에게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롬12:2)고 했다. 우리 각자에게는 나그네로 이 세상에 보내신 하나님의 특별하신 뜻이 있다. 그 뜻을 찾아서 이루며 살아야겠다.
아울러 우리는 이땅에서 소수자에 속해 있다. 소수자에게 있어서 취해야 할 자세는 처해진 상황에 대해 체념하는 것이 아니라 이 땅에서 복음을 채우는 전도의 사명이 주어진 것을 잊어서는 안된다. 소수라는 입장을 내세워서 타인에 대해 편협한 독선적인 태도나 비굴하게 영합하는 태도를 취해서도 안된다. 성실한 인간으로서 인격적인 일을 행하는 것이 중요하다. 자칭 선민이라고 하는 자들의 폐쇄성이나 이기주의가 아브라함과 사라의 생애에서는 없었다는 점이다.

마지막으로 사라의 죽음을 생각하면서 사별의 슬픔을 어떻게 대처할 것인가에 대해 생각해 보고자 한다.

가족이나 친분이 두터운 분이 죽게될 때 깊은 비탄에 빠지는데 이 비탄을 영어로 Grief라고 한다. 후회나 분노 그리고 외로움. 여러가지 감정의 복받침을 가눌 수가 없어서 심신을 상하게하는 경우가 적지 않다. 이런 비탄에 빠진 분들을 살펴주는 Grief Care가 요즈음 注目을 받고 있다. 같은 체험을 한 사람들끼리 슬픔을 나누는 모임도 각지에서 시작되고 있다. 내게 있어서 귀중한 분을 잃게될 때의 감정과 그에 대한 유효 적절한 대응법을 소개하고자 한다.

①눈물도 안나오고 일상생활이 안된다. →하는 말에 귀를 기울이고 공감한다.
②분노를 느끼면서 차라리 내가 그리했더라면 좋았을텐데라고 자책한다.→분노를 느끼는 것은 자연스러운것이라고 가르치며 추억을 말하게 한다.
③귀하신 분이 이미 안계셔라고 흐느끼며 절망한다.→울적하게 됨은 심적 에네르기를 충전하기 위해 필요하다는 것을 가르친다. 필요하면 정신과 의사나 전문가를 소개한다.
④사별한 사실을 바라보게 된다. 새로운 삶을 생각하게 된다.→자기 힘으로 생활할 수 있도록 상담에 임한다. 사별한 자들을 위한 나눔의 모임을 소개한다.
예를들어 NPO 生과死를 생각하는 모임 03-5361-8791 http://www.seitosi.org

재일대한기독교회 총간사 박수길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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