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 성곽을 경험하라 (슥 2:1~5) > 설교자료실

본문 바로가기
사이트 내 전체검색


Home > 설교자료실 > 설교자료실
설교자료실
설교자료실

불 성곽을 경험하라 (슥 2:1~5)

본문

불 성곽을 경험하라 (슥 2:1~5)


스가랴서는 격려와 축복의 말씀으로 가득차 있습니다.
'다시 외쳐 이르기를 만군의 여호와의 말씀에 나의 성읍들이 넘치도록 다시 풍부할 것이라 여호와가 다시 시온을 안위하며 다시 예루살렘을 택하리라 하셨다 하라'(슥1:17)
'이르되 너는 달려가서 그 소년에게 고하여 이르기를 예루살렘에 사람이 거하리니 그 가운데 사람과 육축이 많으므로 그것이 성곽없는 촌락과 같으리라 여호와의 말씀에 내가 그 사면에서 불 성곽이 되며 그 가운데서 영광이 되리라'(슥2:4~5)

지금 이스라엘이 어떤 상황에 놓여 있습니까?
피폐할 대로 피폐한 상황, 더 이상 그 어떤 소망도 가질 수 없는 상황에 놓여 있습니다.
뭘 좀 해보려고, 가진 모든 것을 다 투자했는데도 불구하고, 마지막 남은 힘을 다 쏟았는데도 불구하고, 좌절할 수 밖에 없는 기막힌 일들이 눈앞에 펼쳐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은, 특히 스가랴 선지자는 재기의 의욕을 상실한 채, 멍하니 주저앉아 있습니다.
이러한 스가랴 선지자에게 다가오신 주님은 책망하기는 커녕 다시 비전을 보여주십니다.
그것도 한개가 아니라 여덟개의 비전을 연달아 보여주십니다.
성경에서는 일곱이란 숫자를 완전수로 보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것보다 하나 더 많게 완전수를 넘어선 풍성한 환상을 보여주시면서 격려하고, 축복하시는 것입니다.

스가랴 2장은 이렇게 시작되고 있습니다.
'내가 또 눈을 들어 본즉 한 사람이 척량 줄을 그 손에 잡았기로 네가 어디로 가느냐 물은즉 내게 대답하되 예루살렘을 척량하여 그 장광을 보고자 하노라 할 때에 내게 말하는 천사가 나가매 다른 천사가 나와서 그를 맞으며 이르되 너는 달려가서 그 소년에게 고하여 이르기를 예루살렘에 사람이 거하리니 그 가운데 사람과 육축이 많으므로 그것이 성곽없는 촌락과 같으리라'(슥2;1~4)
먼저, 이 환상에 등장하는 중요인물들을 정리해야 될 것 같습니다.
어떤 사람들이 등장하나요? 척량줄을 잡고 있는 사람(1절), 내게 말하는 천사, 다른 천사(3절), 그리고 소년(4절)입니다.
과연 이들이 누구일까요?

먼저 쉬운 부분부터 정리해 보겠습니다.
3절에 나타나는 두 천사를 살펴보면 '내게 말하는 천사'는 과연 누구일까요?
문맥상으로 볼 떄 2절에 대답하는 그 사람을 천사로 묘사하고 있구나!(3절)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만일 그렇다면 '내게 말하는 천사(3절),와 '척량줄을 잡은 사람'(1절)은 동일인이라는 뜻이 됩니다.
그러나 문제는 '내게 말하는 천사'가 스가랴에게 처음으로 등장하고 있는, 낯선 존재가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이 천사는 스가랴 선지자에게는 익숙한 천사이다.(슥1:9,,13,19) 그런데 그를 가리켜 마치 처음 만나는 그래서 낯선 존재인 것처럼 '한사람이 척량줄을 잡았기로'(1절)에 그렇게 표현할 이유가 전혀 없습니다.
그렇다면 '내게 말하는 천사'는 '척량줄을 잡은 사람'과 동일한 존재가 아니라 그냥 한 천사라고 하는 것이 더 타당합니다.
그렇다면 3절에 등장하는 두 천사는 이름 그대로 천사라는 것입니다.
두번째, 4절에 등장하는 '소년'은 누구일까요?
혹자는 이 소년도 역시 천사라고 주장을 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성경 어디에도 천사를 '소년'이라고 지칭한 예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천사에게는 연령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여기에 '소년'은 스가랴 자신을 가리키고 있습니다.
바론(Baron)은 당시에 소년이란 '어린 남아로부터 혈기 왕성한 젊은이를 총칭'하는 말로 쓰였다고 했습니다.
이렇게 본다면 여기 소년은 바로 환상을 보고 있는 스가랴를 지칭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마지막으로, 1절에 등장하는 '척량줄을 잡은 한 사람'은 과연 누구일까요?
성경에는 사람이란 단어가 두 개 나타납니다. 그 중의 하나는 우리가 잘 아는 '아담(adam)이란 단어요, 또 하나는 '이쉬'(ish)입니다.
이 두 단어는 동일하게 '사람'으로 번역이 되지만 그 의미는 서로 대립됩니다.
아담이란 말은 흙으로 빚어진 연약한 인간의 비참함을 내포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쉬'는 여자와 대립되고(창2:23, 29:32), 짐승과도 대립되면서(출11:7) 강하고, 능력있는 존재자, 즉 인간의 존귀성을 표현하는 단어입니다.
그런데 바로 그 '이쉬'라는 단어가 여기에 사용되고 있습니다.

따라서 여기에 등장하는 '사람'은 인간의 모양으로 나타나기는 했지만, 강하고 능력있는 존재자 즉 오실 메시야, 제2위 예수 그리스도의 현현을 의미합니다.
이를 뒷받침하는 내용이 3절에 나타나 있습니다.
"다른 천사가 나와서 그를 맞으며" 여기에 '맞으며'는 '영접하며'란 뜻입니다.
그는 '척량줄은 잡은 그 사람'을 가리킵니다.
그래서 천사들이 그분을 영접하는 것입니다. 더 나아가 그분이 나타나는 순간 천사들이 긴장하면서 분주하게 움직이는 것을 보게 됩니다(4절).
만일 서로 같은 천사라면 이렇게 영접하거나 긴장할 아무런 이유가 없습니다.
이런 사실을 종합할 때 '척량줄'을 잡은 한 사람은 예수 그리스도임에 틀림없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등장인물을 정리해 놓고 보니, 이상한 부분이 있습니다.
2절에서 일개 소년에 불과한 스가랴가 척량줄을 잡으신 메시야 그분을 향하여 "네가 어디로 가느냐?" 이렇게 반말조로 묻고 있습니다.

어떻게 메시야를 향하여 이런 태도를 취할 수 있을까요? 바로 여기에 깊은 뜻이 있습니다.
인간 스가랴, 소년에 불과한 그의 눈에 비친 그분의 모습이 그만큼 초라하고 볼품이 없었다는 것입니다.
소년인 자신이 반말을 하면서, 무시해도 될 정도의 그런 나약하고, 힘없는 모습으로 나타나셨다는 것을 암시하고 있습니다.
우리 예수님은 초라하기 그지없는 모습, 목수의 아들로 이 땅에 오셨습니다.
말구유에 탄생하셨습니다. 탄생하셨다는 소식을 듣고, 소동은 했으나 예루살렘의 성이 그 어느 권력자도 그 분 앞에 나아가 경배하려 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의 어깨에는 정사를 메었고, 그의 손에는 척량줄을 잡고 계셨습니다.
여기 척량줄은 건축할 때 사용하는 도구입니다.
예루살렘이 지금 어떤 상황입니까? 슥1:18절에 보면 '네 뿔'의 환상이 소개되고 있습니다.
여기 '네 뿔과 네 공장'의 환상은 첫 번째 환상과 세 번째 환상을 보완하는 성격을 가지고 있습니다.
뿔은 권세를 상징합니다. 그 뿔이 네 개라는 것은 단순히 숫자적인 개념이 아니라, 사방으로부터 몰려온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그 네 뿔이 유대와 이스라엘과 예루살렘을 헤쳤습니다.(슥1:19) 사방으로부터 달려와 예루살렘을 초토화 시켜 버렸습니다.
그런데 그 현장에 공장, 즉 목수 네 명이 등장합니다(슥2:20) 이 목수들을 지휘하면서 '네 뿔'을 '떨어치려'(슥2:21)고 나타나신 분이 바로 손에 척량줄을 잡은 예수그리스도입니다.
그분이 다시 무너진 예루살렘을 회복시키시며, 쓰러져있는 자들을 일으켜 세우시며, 축복하시겠다는 것입니다.
'이르되 너는 달려가서 그 소년에게 고하여 이르기를 예루살렘에 사람이 거하리니 그 가운데 사람과 육축이 많으므로 그것이 성곽없는 촌락과 같으리라'(슥2:4) 그런데 슥2:4절에 이상한 부분이 있습니다.
'성곽이 없어지리라'는 부분이 있습니다. 성곽이 없으면 보호를 받을 수 없습니다.
그런데 이제 성곽이 없을 것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아니, 필요없게 되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무엇이 성곽을 대신한다는 말일까요? '여호와의 말씀에 내가 그 사면에서 불 성곽이 되며 그 가운데서 영광이 되리라'(슥2:5) 하나님께서 친히 말씀하십니다.
내가 그 사면에서 불성곽이 되리라. 5절에서 강조되는 단어는 '내가'라는 말입니다.
그런데 우리말 성경에는 '내가'가 한번 나옵니다.
그러나 원문에는 '두 번'이나 언급되어 있습니다. 그만큼 강조하고 있는 것입니다.
"내가 불성곽이 되어 주리라. 내가 '영광'이 되어 주리라" 하나님이 친히 우리와 함께 하셔서 보호하시겠다는 약속입니다.
지켜주시며, 사방으로 막아주시겠다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왜 하필이면 '불성곽'일까요? "이는 힘으로 되지 아니하며, 능으로 되지 아니하고, 오직 나의 신으로 되느니라"(슥4:6) 슥2:5절과 슥4:6절의 말씀은 서로 짝을 이루는 말씀입니다.
'내가'라는 단어가 강조되는 점에 있어서 그렇습니다.
인간이 쌓은 이 모양, 저 모양의 성곽, 바벨탑은 결코 그를 지켜주지 못하며, 영광이 되지 못합니다.(2:5)
모든 것은 힘으로 되지 않고, 능으로도 되지 않습니다. 오직 주의 성령으로만 가능합니다.
그렇다면 여기에 '불'(2:5)은 4:6절에서 어느 단어와 짝을 이룰까요? 바로 성령입니다.
그러므로 이 말씀 속에는 우리를 향한 약속과 함께 우리를 향한 약속이 담겨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성령으로 뜨거워지기를 원하고 계십니다. 불 성곽의 영향을 받아, 함께 뜨거워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소원이 있습니다.
'내가 불 성곽으로 너희 가운데 임하리라, 너희들도 뜨거워져라' 성령을 받았다는 것은 불 성곽 안에 보호를 받고 있다는 것을 뜻합니다.
동시에 함께 뜨거워져야 함을 의미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여호와의 말씀에 내가 그 사면에서 불 성곽이 되며 그 가운데서 영광이 되리라'(슥2:5) 우리 성령께서는 '불 성곽'이 되어 주시겠다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 불 성곽 안에 있습니다. 아니, 그 불 성곽을 모시고 있습니다.
성령을 모신 자의 모습은 '뜨거움'입니다. 성령께서는 우리 안에 '흥분된 마음'이 있기를 원하십니다.
불 성곽으로 찾아오신 성령을 의지하는 사람에게는 회복의 은혜를 허락하실 것입니다.
불 성곽을 경험하는 은혜가 있기를 간절히 소원합니다. (옥성석 목사)





고객센터 개인정보취급방침 서비스이용약관 기독정보넷공식트위터 Copyright © cjob.co.kr All rights reserved.
상단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