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삭개오의 크리스마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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삭개오의 크리스마스
마음에 평화가 있고, 평화를 전할 때에 진정한 성탄


오세용 krjohn316@hotmail.com
(눅 19:1~10)

제가 우리 아이들에게 오늘 설교제목인 '삭개오와 크리스마스' 하면 무엇이 떠오르느냐? 했더니 이구동성으로 말하기를 "서로 연결이 안 돼요" "전혀 공통점이 없어요" 하는 것이었습니다.

맞습니다. 전혀 연결점이 없습니다. 아기 예수가 탄생하실 때 삭개오가 목자들하고 베들레헴에 가서 경배했다거나 동방박사하고 같이 어쩌구 했다는 말이 전혀 없습니다. 오늘 본문 3절에 보면 그게 확실합니다. 저가 (삭개오가) 예수께서 어떠한 사람인가 보고자 하여… 그러니 삭개오는 예수님을 개인적으로 전혀 몰랐다 이 말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삭개오의 집에 가신 날이 예수님의 생일이었다는 기록도 전혀 없지요.

그런데 여기 본문을 보면 크리스마스의 모든 요소가 다 들어 있습니다. 오히려 복음서의 다른 탄생기사보다 더 구체적으로 크리스마스를 설명하는 내용이 들어 있습니다. 이 이야기에서 우리는 이 땅에 예수님이 오신 이유, 더 나아가 우리 개인의 마음에, 생활에서 오시는 이유를 분명히 알 수 있다 생각합니다.

성탄절은 아시는 것처럼,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날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오신 날을 중심으로 하여 구약과 신약이 나뉘고 심지어 영어의 알파벳도 나뉩니다. ABCD가 예수님이 오신 때를 기준하여 A는 D와 합쳐져서 이쪽에 있게 되고, B는 C와 합쳐져서 예수님 오시기 전을 표시하게 됩니다.

오늘 본문을 읽어보면 예수님이 오시기 전과 후가 구분되어지는 그러한 정황이 확실하게 나타납니다. 한번 오늘의 성경 본문(눅 19: 1~10)을 읽어 보도록 하겠습니다. 읽으실 때에 예수님이 오심을 기점으로 어떤 점이 달라지는가를 염두에 두고 읽으시기를 바랍니다.

(1) 예수께서 여리고를 들어 지나 가시더라. (2) 삭개오라 이름하는 자가 있으니 세리장이요 또한 부자라. (3) 저가 예수께서 어떤 사람인가 하여 보고자 하되 키가 작고 사람이 많아 할수 없어 (4) 앞으로 달려가 보기 위하여 뽕나무에 올라가니 니는 예수께서 그리로 지나가시게 됨이라. (5) 예수께서 그곳에 이르사 우러러 보시고 이르시되 삭개오야 속히 내려오라. 내가 오늘 네집에 유하여야 하겠다 하시니 (6) 급히 내려와 즐거워하며 영접하거늘 (7) 뭇사람이 보고 수군거려 가로되 저가 죄인의 집에 유하러 들어갔도다 하더라. (8) 삭개오가 서서 주께 여짜오되 주여 보시옵소서 내 소유의 절반을 가난한 자들에게 주겠사오며 만일 뉘 것을 토색한 일이 있으면 사배나 갚겠나이다. (9) 예수께서 이르시되 오늘 구원이 이집에 이르렀으니 이 사람도 아브라함의 자손이로다. (10) 인자의 온 것은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기 위함이로다.

그러면 먼저 예수님이 오시기 전에는 어떠한 상황이었나 살펴보십시다. 거기에는 죄악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공동체간에 평화대신 갈등이, 불화가 있었습니다. 여리고라는 동네에 삭개오란 사람이 살았는데 그 사람은 세리장이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연이어서 또한 부자라…고 표현합니다. 이 말, '세리장이요'란 말과 '또한 부자'란 말 사이에는 수많은 사연이 생략되어 있습니다. 먼저 생각해 볼 것은 두 문장이 원인과 결과의 관계라는 것입니다. 삭개오는 세리장이었으므로 그는 부자라는 말입니다. 이해가 되십니까?

제가 회사를 다닐 적, 신입사원이었을 때 세무서 출입을 한 적이 있습니다. 부가세신고를 하고 세금을 납부하는 것인데, 회사가 국영기업체라서 세금을 적게 신고할 것도 없고 세무서에서 우리 회사에 대하서 뭐 이래라 저래라 할 것도 없는 그러한 상황이었습니다. 그래서 담당자인 세무서 직원과 별 말 건넬 것도 없이 그냥 서류만 제출하는 정도였는데 어느 해 여름에 제가 서류를 가지고 세무서에 갔을 때의 일입니다.

별 대화도 없었던 담당자가 얼굴에 미소를 잔뜩 머금은 채 자기 옆자리에 앉으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날따라 너무 너무 살갑게 이것저것 이야기하더니 갑자기 종이를 한 장 내 앞에 내밀었습니다. 거기에다가 뭐라고 쓰는 데, 읽어보니 거기에는 "이번에 저 휴가갑니다"고 써 있었습니다. 그때 제 대답이 그랬어요, 아! 좋겠습니다, 휴가도 가시고, 그래 어디로 가십니까? 그러고 난 뒤 뭐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하다가 다시 회사에 들어갔습니다.

다녀왔다는 이야기를 하다가, 휴가 이야기를 상사에게 했더니 빙긋이 웃으면서 저에게 말하기를 그게 무슨 의미인줄 아느냐고 물었습니다. 제가 왜 그 말에 숨어 있는 의미를 모르겠습니까? 저는 다만 그렇게 말하는 그 얼굴이 미워서 그러니 그냥 지나갑시다 하니 상사분이 이렇게 말합니다.

돈으로 해결되는 사람에게는 돈을 주면 된다. 세상에는 돈 얼마 쥐어주면 그대로 끝나는 사람이 의외로 많다. 자네도 이제 사회생활을 하게 되는데, 그런 사람이 제일 대하기 만만한 사람이다. 그냥 웃으면서 얼마 만들어서 갖다 줘라. 그리고 경멸해주면 된다. 그런 사람은 돈 몇 푼에 자기를 파는 사람이니 마음껏 경멸해도 된다. 어떤 면에서 그 사람은 불쌍한 사람이다. 인생의 가치를 돈에 두는 사람처럼 이 세상에서 불쌍한 사람이 없다. 더 무서운 사람은 돈으로 해결되지 않는 사람이다. 자네만 그런 사람이 되면 된다.

그래서 돈을 얼마 만들어서 가져다 준 적이 있습니다. 그 일이 거의 20여 년 전 이야기이니까, 지금쯤 그 세무서원은 아마 부자가 되었거나 아니면 비리 공무원으로 짤렸거나 했겠지요. 그런데 그 사건을 어찌 알았는지 몇 년 전에 이런 제목의 영화가 나왔습니다. "나는 지난 여름 네가 한일을 알고 있다." 제가 뇌물 바친 것이 탄로가 났나 하고 가슴이 뜨끔했습니다.

그러니 오늘 성경본문, '세리장이요'와 '그는 부자라' 그 두 말 사이에 저와 세무서원 사이에 오갔던 말이 얼마나 오고 갔겠습니까? 그래서 결국 그는 부자가 되었다는 말입니다. 그러니 그때 저에게 멸시를 당하던 세무서원처럼, 삭개오에게도 사람들이 겉으로는 돈을 가져다 바치면서도 뒤로는 얼마나 멸시를, 욕을 했겠습니까? 그래서 그는 그 당시 사회에서 공공의 적, 죄인이었던 것입니다. 그 당시 이웃사람들의 평가가 7절에 나와 있습니다. "죄인의 집에 들어 갔도다." 한마디로 평가해서 그는 죄인이었습니다.

그 죄 때문에 그 가정에, 그리고 그가 속해있는 공동체에 긴장이 흐르고, 갈등이 생기고 결과적으로 평화는 없어졌습니다. 파괴된 평화, 바로 삭개오가 예수님을 만나기 전의 상황입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시기 전의 세상이 바로 그러했습니다. 죄로 말미암아 이 세상은 제정신이 아니었습니다. 그런 세상을 구원하기 위하여 예수님은 이 땅에 오셨습니다. 그냥 막연하게 추상적으로 전 인류를 위해서 오신 것이 아니라, 구체적으로 갑돌이, 갑순이를 위해서 오셨습니다. 그래서 삭개오를 위해서 오셨다는 기록이 바로 오늘 본문입니다.

그러면 다음으로 예수님은 어떻게 삭개오에게 오셨습니까? 예수님이 먼저 오시겠다고 하셨습니다. 3, 4, 5절을 읽어 보겠습니다.

저가 예수께서 어떤 사람인가 하여 보고자 하되 키가 작고 사람이 많아 할수 없어 앞으로 달려가 보기 위하여 뽕나무에 올라가니 이는 예수께서 그리로 지나가시게 됨이라. 예수께서 그곳에 이르사 우러러 보시고 이르시되 삭개오야, 속히 내려오라. 내가 오늘 네 집에 유하여야 하겠다 하시니 급히 내려와 즐거워하며 영접하거늘.

그렇게 예수님이 먼저 네 집에 가겠다 하셨습니다. 삭개오의 집은 부정한 사람의 집, 죄인의 집입니다. 그런 사람의 집에 예수님은 먼저 내가 너의 집에 가야겠다 하시면서 오셨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잠깐 짚고 넘어 갈 것이 있습니다. 예수님이 삭개오의 집에 들어가는 것이 그 당시 상황으로 어떤 일이었는가. 예수님 당시 유대인들의 생각과 관습을 알아야 이 부분이 어느 정도 심각한 상황이었는지 이해가 가능합니다.

유대인들은 부정한 곳에는 아예 들어가지를 않았습니다. 그 정도가 어느 정도로 심했는가 하면, 요한복음에 보면 아주 극명하게 그 부분을 설명하는 장면이 나옵니다(요 18:28).

29절, 그러므로 빌라도가 (관정) 밖으로 저희에게 나아가 말하되
33절, 이에 빌라도가 다시 관정에 들어가 예수를 불러 말하되
38절, 이 말을 하고 다시 유대인들에게 나가서 말하되….

보십시오. 지금 예수님은 빌라도의 관정 안에 계시고 유대인들은 밖에 있습니다. 관정이 부정한 곳이라 하여 들어오질 않습니다. 그런데 나라를 다스리는 총독이 어떻게 거기에 대응하는가 하면 유대인더러 들어오라 하지 못하고 자기가 관정 밖으로 나갔다가, 다시 들어왔다가 하면서 심문을 하고 있습니다. 그 정도로, 총독조차도 그렇게 존중하고 있는 그러한 관습을 예수님께서 과감하게 깨부수는 것입니다.

그러길래 오늘 본문 7절의 표현이 아주 적절한 표현입니다. "뭇사람이 수군거려 가로되 저가 죄인의 집에 들어갔도다." 여기서 비난의 초점은 삭개오가 아니라 예수님입니다. 삭개오를 비난하는 것이라면 이렇게 말했겠지요. "죄인인 주제에 예수님 좋은 것은 알아가지고." 그렇게 사람들의 비난을 받으면서까지 예수님은 삭개오의 집에 들어가신 것입니다.

그렇게 예수님이 개인적으로 삭개오의 집에 들어갔을 때에, 삭개오의 마음에 들어 오셨을 때에 역사는 일어났습니다. 삭개오가 한 말을 한번 들어 보십시다. "주여 보시옵소서 내 소유의 절반을 가난한 자들에게 주겠사오며 만일 뉘 것을 토색한 일이 있으면 사배나 갚겠나이다."

그 말에 숨어 있는 뜻을 살펴봅시다. 삭개오는 자기 죄를 고백하고 있습니다. 막연한 죄가 아닙니다. 그저 하나님 앞에 입으로 고백하는 죄가 아닙니다. 자기 자신이 모든 것을 다 내어 놓는 고백입니다. 그리하여서 자기 죄를 고백하는 그 증거로 자기 재산의 반을 가난한 자들에게 내어 놓겠다고 합니다.

1907년 평양에서 대부흥이 일어났습니다. 그 당시 미국 선교사들이 먼저 자기 죄를 고백했습니다. 내가 내 사역을 하면서 시기심 때문에 다른 선교사보다 더 낫게 하려고 서로 시기했습니다. 이런 죄를 고백하고 나니 바로 성령님께서 역사하기 시작했습니다. 온 교회가 더 나아가서 온 지역이 죄를 회개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자마자 부흥의 큰 물결이 일어났습니다. 그 결과 각 교회마다 회개하고 자기가 훔친 물건들이 산더미처럼 쌓이기 시작했습니다.

여기 삭개오의 마음속에도 회개의 물결이 소용돌이 쳤습니다. 그 물결에 삭개오는 무릎을 꿇었습니다. 내가 내 죄를 고백합니다. 내가 지은 죄 때문에 내 가슴이 너무 너무 아픕니다. 그래서 나온 말이 내 소유의 절반을 가난한 사람에게 주겠다고 했습니다.

그 다음 말을 들어 보십시오. "만일 내가 뉘것을 토색했으면…." 이제 삭개오의 돌덩이처럼 굳었던 마음, 완악한 마음이 솜처럼 부드러워졌습니다. 지금까지는 세금을 걷을 때 어느 누구 한사람 사정 한번 봐주었던 적이 있습니까. 조금만 여유를 주세요, 내일까지만 말미를 주시면 세금을 내겠습니다 하고 애원하는 자기 이웃의 하소연에 한번도 귀 기울이지 않던 악독한 사람이었습니다.

그건 네 사정이고 나는 내 일을 할 뿐이니까 여기 살림을 차압해야겠다면서 자기 이웃을 착취하던 그러한 마음이 이제 솜처럼 부드러워진 것입니다. 주여 예수님, 제가 만일 누구를 괴롭힌 적이 있다면, 내 말이 그 마음에 상처가 되었다면, 제가 그 벌을 받겠습니다.

그 마음이 왜 그렇게 변했습니까? 예수님이 그 가정에 오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그 마음에 오셨기 때문입니다. 그러한 삭개오의 변화에 대하여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결론지어 말씀하십니다. "오늘 구원이 이 집에 이르렀으니 이 사람도 아브라함의 자손이로다."

예수님을 영접하고 그 마음에 변화를 받아, 이제 삭개오는 구원받은 사람이 되었습니다. 죄인이 구원받는 것, 이게 바로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목적입니다. 바로 그 마음에 평화를 만들고 그 이웃에 평화를 가져다주는 바로 그것, 그게 바로 크리스마스입니다.

예수님이 탄생하실 때에 천군천사들이 부른 노래가 있습니다. 누가복음 2장 13절 "홀연히 허다한 천군이 그 천사와 함께 있어 하나님을 찬송하여 가로되" 14절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기뻐하심을 입은 사람들중에 평화로다." 땅에서의 평화를 노래했는데 그 말이 죄인이 구원을 받는 순간, 이제 이 땅에 이루어지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천군천사의 노래 중에서 주의해야 할 말이 있습니다. 평화가 어디에 있다고 했습니까? '사람들 중'입니다. 이 말은 무슨 말입니까. 너와 나 사이에, 사람들 중에, 이웃과 이웃사이에 평화가 있다는 말입니다. 어느 개인 한 사람에게만 평화가 있는 게 아니라, 그 공동체에 평화가 임한다 이 말입니다. 그게 진정한 평화입니다.

우리나라 속담에 매 맞은 사람은 발 뻗고 자지만 때린 사람은 웅크리고 잔다는 게 있습니다. 비록 맞은 사람은 발 뻗고 자면서 마음이 평화로울 수 있겠으나 그것이 한 사람만의 평화로 끝난다면 그 공동체에서는 아무 소용도 없는 것입니다. 너와 나 사이에 평화가 흘러야 합니다. 지금 앉아있는 우리 교회 안에서도 나와 너 사이에 평화가 흘러야 진정한 크리스마스입니다. 그래야 예수님이 오신 목적이 이 땅에 실현되는 것입니다.

그러한 결론을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10절 "인자의 온 것은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기 위함이로다." 예수님은 분명히 말씀하십니다. 내가 이 땅에 온 것은 잃어버린 자를 구원하러 온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짚고 넘어 갈 말이 있습니다. '잃어버린'이라는 말의 의미입니다. 잃어버린 사람이란 무슨 말입니까. 그 말의 주어를 알아보면 그 말의 의미를 확실히 알 수가 있습니다. '잃어버린'이란 동사의 주어는 누구입니까? 누가 그 사람을 잃어 버렸기에 잃어버린 사람이라고 합니까? 하나님입니까? 하나님이 그들을 잃어버린 것입니까?

하나님은 우리를 잃어버리지 않으십니다. 잃어버리지 않으시고 잊지도 않으십니다. 우리가, 우리 인간이 하나님을 잃어버렸고 하나님을 잊어버렸습니다. 우리 예수님은 그렇게 길을 잃고 헤매는 우리를 찾으러 이 땅에 오셨습니다. 그것을 오늘 본문 10절에서 예수님은 분명히 말씀하십니다. "인자의 온 것은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기 위함이로다." 이상 삭개오가 예수님을 만난 전말을 살펴보았습니다.

비록 크리스마스에 예수님을 만난 것은 아니지만 진정으로 예수님을 만나 변화되었기에 저는 오늘 설교제목을 '삭개오의 크리스마스'라 하였습니다. 이제 말을 맺고자 합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것이 남의 집, 이웃에게만 오신 것이라면 우리와는 아무런 관련이 없습니다.

삭개오가 예수님을 모시고 영접했을 때 그 마음에, 그 집에, 그리고 그 이웃에 평화가 임한 것처럼, 우리도 우리 마음에, 우리 가정에, 그리고 우리 교회에 예수님을 진정으로 영접해 모셔야만 "땅에서는 기뻐하심을 입은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라는 말씀이 이 땅위에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것이 진정한 크리스마스입니다. 그게 바로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목적이고, 그것을 마음에 새기고, 기념하기 위해 우리가 오늘 이렇게 모였습니다. 이것이 오늘 하나님께서 저를 통해서 저와, 여러분에게 그리고 우리 교회에게 하시고 싶은 말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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