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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난에 대한 동양적 이해, 어떻게 볼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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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난에 대한 동양적 이해, 어떻게 볼 것인가     들어가는 말
    지구상의 수많은 종교들과 사상들은 공통적으로 고통의 문제를 심각하게 다룬다. 왜냐하면 아무리 낙천적인 사람이라도 인간이 고통 가운데 있다는 것을 부인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인간의 삶이 고통스러운 것은 인간이 스스로 통제할 수 없는 불행한 일들(misfortune)이 인간의 삶에서 일어나고, 또 불행을 가져올지도 모르는 미지의 일들(the unknown)이 있기 때문이다. 성경은 인간이 전지전능한 존재가 아닐 뿐 아니라 오히려 죄로 인하여 고통 가운데 있는 존재임을 밝히고 있다. 인간이 전지하지 않다는 것은 인간이 알지 못하는 미지의 일들이 있다는 것을 의미하고, 전능하지 않다는 것은 인간이 통제할 수 없는 어떤 불행한 일들이 일어날 수 있다는 것을 함축하고 있다. 인간의 실존이 이러하기 때문에 모든 종교와 사상들, 즉 세계관들은 나름대로 고통(suffering)과 인도함(guidance)에 대한 설명체계와 이를 해결하기 위한 구체적인 실행방법들을 제시한다.1
    애니미즘 지역에서는 개종자들이 자신들의 당한 고통을 해결하거나 구체적인 일들에 대해서 인도함을 받기 위해 기독교 지도자를 찾아갔다가 실망하고 마을의 주술사에게 찾아가는 경우가 허다하다. 왜냐하면 주술사들은 이러한 일에 있어서 분명한 지침과 방법을 제시해주는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한국의 수많은 기독교인들이 점이나 사주관상, 점성술 등을 본 적이 있다고 한다. 그리고 어떤 점술가의 주장에 의하면 자기 고객의 삼분의 일이 소위 기독교인이라고 한다. 이러한 현상은 기독교 신학이 불행(misfortune)과 인도함(guidance)에 대한 적절한 성경적 설명체계를 제공하고, 또 교회에서 그것을 교육하는데 그다지 성공적이지 못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즉 기독교인들은 질병, 경제적인 어려움, 예기치 않은 죽음 등, 삶에서 일어나는 불행들을 경험한다. 또 직장의 선택, 배우자의 선택, 입시, 이사 등, 삶에서 구체적으로 요구되는 결정 사항에 부딪히게 된다. 그런데 불행과 인도함에 대한 성경적인 설명체계와 실행방법들을 적절히 제시받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렇게 되었을 때 많은 기독교인들은 민간신앙(fork religion)의 차원에서 비성경적인 설명체계와 실행방법에 의존하게 되고, 따라서 혼합주의에 빠지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샤마니즘, 불교, 유교 등, 동양적 세계관의 문화적 토양 위에서 세워진 한국교회는 고통과 인도함에 대한 성경적 설명체계와 실행방법을 분명하게 제시해야 할 것이다.
    이러한 작업을 위해서 우리는 먼저 무엇이 성경적이지 않은 것인지에 대해서 동양적인 세계관들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1. 샤마니즘
    한국 문화의 가장 기층에 깔려있는 것이 샤마니즘이다. 샤마니즘은 애니미즘 중에서 특별히 공동체를 위한 주술을 수행하는 샤만의 역할이 특별히 강조되어진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샤마니즘은 보다 폭넓은 의미인 애니미즘이라는 관점에서 이해되어질 수 있다. 애니미즘의 세계관에서는 인간사나 자연사의 배후에는 초자연적인 영들이 있는 것으로 간주한다. 인간 삶에서의 불행은 초자연적인 영들을 노하게 하여서 저주를 받았거나, 혹은 초자연적인 힘들을 잘못 다루었기 때문에 생겨나는 것으로 간주된다. 따라서 이러한 초자연적인 영들이나 힘을 조종하고 통제하기 위한 수단들이 바로 주술(sorcery), 혹은 마술(magic) 등의 행위이며 이때 사용되는 것이 부적, 주문이라고 할 수 있다.
    폴 히버트는 애니미즘 지역의 사람들이 행운을 가져온다고 믿는 힘들로서 축복(blessing), 맹세(oath), 공덕(merit), 마술(magic), 지령술(geomancy), 운수(luck) 등을 열거하고 있다. 또 애니미즘 지역의 사람들이 불행의 원인으로 간주하는 것들로서, 죄(sin), 마법(witchcraft), 주술(sorcery), 악한 시선(evil eye), 악한 언사(evil mouth), 조상, 정신적 질병 등, 인격적인 영들에 의해서 유발되는 것과, 운명(fate), 점성술, 불운(bad luck), 흑마술(bad magic), 부정(pollution), 터부(taboo)를 범함, 물체의 침범, 신체적 질병 등, 비인격적인 힘에 의해서 유발되는 것들을 열거하고 있다.2
    히버트는 또한 애니미즘 지역의 사람들이 초자연적인 영들로부터 인도함을 받기 위해서 사용하는 것으로, 맹세(oath), 조건부 저주(conditional curse), 교령술(necromancy), 예감(presentiment), 예언(prophecies), 꿈, 환상(vision), 변성의식(trance), 방언(glossolalia), 등을 들고 있다. 그리고 비인격적인 기계적인 방식으로 인도함을 받는 방법으로서 점(divination), 제비 던지기(casting lots), 징조(omen), 점성술(astrology), 시련을 통과함(ordeal) 등을 들고 있다.3
    반리넨(Gailyn VanRheenen)에 의하면 이러한 애니미즘 세계관의 특징은 불행을 막기 위해서 초자연적인 영들이나 힘을 조종(manipulate)하고 통제(control)하는데 있다고 본다. 그리고 이러한 세계관이 기독교 안에 침투했을 때 하나님을 주관자로 대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불행을 막기 위한 종으로 조종하려고 한다는 것이다. 반리넨은 애니미즘의 특징은 어떤 힘이든지 자신들의 즉각적인 문제를 해결해 줄 수 있는 힘을 찾아서 그것을 조종하려는 것이라고 말한다. 즉 창조주 하나님께서 일하시는 것을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초자연적인 영들이나 힘을 조종해서 자신이 닥친 불행을 피하고 미지의 것들을 준비하려고 한다는 것이다.4
    애니미즘의 사람들이 보여주는 이러한 태도는 오늘날 과학주의가 팽배한 현대에도 그대로 나타난다. 즉 샤마니즘이나 애니미즘의 사람들은 주술적인 방법으로 어떤 힘을 사용하려고 하는 반면에, 과학주의자들은 과학적 방법으로 어떤 힘을 사용하고, 그것으로 인간의 불행을 막고 미지의 것을 예비하려고 하는 것이다. 애니미즘이나 과학주의의 공통점은 불행을 해결하고자 하는 주체가 인간에게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우주에 어떤 메카니즘적인 법칙이 있어서 그 법칙에 입각해서 어떤 힘을 끌어다 쓸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세계관에서는 하나님을 포함한 모든 초자연적인 영들이 법칙 아래에 있다. 그러나 성경적 세계관에서는 하나님이 모든 법칙 위에 계시다. 그러므로 애니미즘적 세계관에 감염된 사람은 하나님을 주인으로 인격적인 관계를 맺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조종하려는 기계적인 관계를 추구하게 된다.

2. 불교
    불교는 그 문제의식의 출발부터 "고통"에서 출발하고, 또한 해결하고자 하는 문제의식의 지향점도 "고통"의 문제 해결에 있다. 석가모니는 생로병사로 고통받는 사람들을 보고 마음에 고통이 일어나서, 출가하여 수행하여서 깨달음을 얻고 붓다가 되었다고 한다. 그래서 불교 세계관에서 가장 핵심적인 개념은 고(苦), 즉 고통이다. 불교의 사성제(四聖諦) 중에서 첫번째인 고(苦)는 현실의 상태를 나타낸다. 그리고 집(集), 멸(滅), 도(道)는 각각 현실이 고통스러운 원인, 고통을 없앨 수 있음, 그리고 고통을 제거하는 방법을 말한다. 불교의 삼법인(三法印) 중에서 하나가 일체개고(一切皆苦), 즉 "모든 것은 고통"이라는 교리이다.
    불교에서는 고통의 원인을 인간의 인식의 왜곡에서 찾는다. 즉 고통은 욕구의 좌절에서 오며, 욕구는 어떤 사물에 대한 집착에서 오는데, 집착이 일어나는 이유는 이 세계에 대한 잘못된 인식, 즉 무명(無明) 때문이라는 것이다. 이 세계는 자기 고유의 본질이나 속성을 갖춘 실체(substance)의 집합이 아니며 계속 변화하고 있는 과정(process)인데, 그것을 인식하지 못하고 세계를 개별적인 사물들의 집합으로 보고서 집착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고통에 대한 불교의 설명체계에 의하면 고통은 본래 실재하지 않는데 잘못된 인식으로 인하여 고통이 발생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고통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깨달음을 얻어서 이 세계의 본래 모습을 볼 수 있어야 하며, 집착이 일어나지 않도록 속세의 일을 떠나야 한다는 것이다. 물론 이러한 관점은 원시(原始)불교의 입장이고 대승불교에 오면 재가자(在家者)의 수행을 인정하기는 하지만, 불교가 고통을 벗어나기 위한 방법으로 제시하는 것은 기본적으로 관념 내지 인식의 변화를 통한 것이다. 물론 이와 같은 방법은 승려적 종교(high religion)의 차원이고 민간종교(folk religion)의 차원에서는 애니미즘적 세계관과 실행방법이 혼합되어서 초자연적인 존재인 불보살(佛菩薩)을 조종하려는 태도로 나타난다.

4. 유교
    유교는 불교처럼 고통이라는 개념에 직접적으로 초점을 맞추지 않는다. 그러나 유교는 춘추전국 시대와 같은 분열된 중국이 야기하는 많은 고통들, 즉 전쟁, 불행한 죽음, 부상, 경제적 피폐 등을 보면서, 어떻게 하면 나라를 부강하게 하고 백성을 편안하게 할 수 있는가 하는 정치철학에서 출발한 것이다. 유교는 불교와는 달리 이러한 고통의 원인을 인간의 인식이나 관념에서 찾거나, 혹은 이 세상의 삶에서 거리를 둠으로써 해결하려고 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유교는 기본적으로 고통의 문제를 현실적인 것으로 보았고 그것을 정치적으로 해결하려고 했다고 할 수 있다. 유교는 통치자가 도덕적이고 훌륭한 인격을 갖추어야 백성들의 고통을 들고 편안하게 살 수 있게 한다고 보았던 것이다. 이러한 정신은 논어(論語)의 수기안백성(修己安百姓; 자기를 수양한 후 백성을 편안하게 함)과 주자(朱子)의 수기치인(修己治人)으로 나타난다. 이렇게 해서 유교가 추구하는 것은 요순(堯舜) 시대와 같이 성인(聖人)이 다스리는 이상왕국의 회복이었다.
    원시유교가 고통의 문제에 대한 형이상학적 설명체계를 갖지 못했던 것은 논어에서도 잘 나타난다. 공자는 "사람을 섬기지 못하면서 어찌 귀신을 섬기겠으며 삶을 모르면서 어떻게 죽음을 알겠는가"(論語, 先進) 라고 말하면서 인간의 고통 중에 가장 절정이라 할 수 있는 죽음의 문제에 대해서 언급하는 것을 회피하였다. 또 공자는 인간의 본성과 천도(天道)에 대해서 언급하지 않았는데 (論語, 公冶長), 이것은 유교가 기본적으로 형이상학을 지향하는 것이 아니라 올바른 사회적 관계의 실현, 즉 예(禮)의 실천을 통해서 이상적인 사회를 건설하고자 했던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공자 당시에도 중국에는 고통의 문제를 애니미즘적인 세계관과 실행방법에 입각해서 해결하고자 했던 사람들이 많이 있었던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나 기본적으로 공자의 입장은 이러한 태도를 반대했던 것을 볼 수 있다. 즉 공자는 조상인 귀신에게 드리는 제사는 효(孝)의 연장으로 인정하였지만 다른 귀(鬼)에게 드리는 제사는 도(道)에 맞지 않게 복록(福祿)을 구하는 것이기 때문에 아첨이라고 비판하였다 (論語, 衛靈公). "귀신은 공경하되 멀리하라"(論語, 雍也)는 공자의 가르침도 귀신의 존재를 부정하는 것은 아니지만, 초자연적인 영들을 통해서 자신의 문제를 해결하려는 태도에 대한 반대의 표시라고 할 수 있다. 흔히 우리는 제사를 유교적인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지만 유교는 조상숭배의 예법을 제공한 것이지 조상숭배의 기원이 유교에 있다고 볼 수는 없다. 조상을 숭배함으로써 고통을 제거하고 인도함을 받으려는 것은 애니미즘에서 전반적으로 나타나는 하나의 실행방법이라고 할 수 있다.

4. 노자와 장자
    노장(老莊) 사상도 역시 중국의 춘추전국(春秋戰國) 시대를 배경으로 나타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노자와 장자는 다소간의 차이가 있는데 고통의 문제에 있어서 노자가 보다 정치철학적으로 접근했다면 장자는 개개인의 관념에 보다 초점을 맞추고 있다. 공자와 마찬가지로 노자도 춘추전국이라는 난세에 고통을 받는 민중들을 보면서 그 원인을 분석하고 해결책을 제시한다. 노자는 모든 사회적 혼란과 그것이 야기하는 고통의 원인이 "인위"(人爲)에 있다고 보고 "무위"(無爲)를 주장한다. 노자는 춘추전국 시대의 정치적 분열과 전쟁, 사회혼란, 민생의 피폐 등이 인위적인 문화주의에 있다고 보고, 반문화주의적인 입장에서 문화주의인 유교를 비판한다. 노자의 무위와 반문화주의는 사회도피적이라기 보다는 오히려 사회적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방법이고 일종의 정치철학이라고 말할 수 있다. 노자는 "도(道)를 잃었기 때문에 덕(德)이라는 것이 생겼고, 덕을 잃었기 때문에 인(仁)이라는 것이 생겼고, 인을 잃었기 때문에 의(義)라는 것이 생겼고, 의를 잃었기 때문에 예(禮)라는 것이 생겼는데, 예는 충성됨과 신의가 부족한데서 생긴 것이고 분쟁의 시작이다"(老子 3장) 라고 말한다. 노자는 이러한 문화주의를 극복하고 무위의 정치를 실현하기 위해서 "작은 나라와 적은 수의 백성"으로 이루어진 공동체를 꿈꾼다. 노자의 "소국과민"(小國寡民)은 고통의 문제를 해결하려고 하는 노자의 방법론이다.
    노자가 보다 사회적 관점에서 정치철학적으로 고통의 문제를 해결하려고 한 반면에 장자는 불교처럼 개인의 관념의 변화를 통해서 고통의 문제를 해결하려고 한다. 물론 장자도 역시 반문화주의적인 관점에 서 있다. 그러나 노자의 반문화주의가 사회적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것이라면 장자의 반문화주의는 개인의 절대적 자유를 추구하는 경향이 있다. 장자는 이러한 관념적인 절대 자유를 얻기 위해서 인식 혹은 관념의 전환을 시도한다. 즉 대립물의 대립을 넘어서야 참된 평안이 있다고 보는 것이다. 그래서 장자는 "성인은 옳고 그름을 조화하여 천균(天均; absolute balance)에서 쉰다"(莊子, 齊物論) 라고 말한다. 장자에 의하면 "모든 것은 이미 하나이기 때문에 구별할 수 없다"(莊子, 齊物論). 이러한 관념의 전환을 위해서 장자가 제시하는 방법이 바로 주객합일(主客合一)인데, 장자의 호접몽(蝴蝶夢)은 바로 주객합일을 우화적으로 나타내는 것이다. 주객합일의 관점에서 장자는 시비(是非)와 생사(生死)를 같은 것으로 보기 때문에 초상집에 가서 웃고 노래하는 반문화주의적인 일탈행동을 나타낸다. 장자의 방법은 인간이 겪는 고통의 절정이라고 할 수 있는 죽음의 이별을 경험한 사람 앞에서 관념의 전환을 통해서 그 고통의 실재를 부정하는 방법이라고 할 수 있다. 즉 장자에 따르면 사람들은 울 필요가 없는 것에 대해서 울고 있는 것이며 고통스러워하지 말아야 할 것을 고통스러워하는 것이다.

5. 도교와 기(氣) 사상
    철학으로서의 노장 사상과 구분하여서, 종교적인 집단으로서 무병(無病)과 장생불사(長生不死)를 추구한 도교도 고통에 초점을 맞춘 세계관이라고 할 수 있다. 도교는 인간의 고통 중에서 그 절정이라 할 수 있는 죽음의 문제에 도전하고자 했다고 할 수 있다. 도교는 죽음을 극복하기 위한 수단으로써 연단술(鍊丹術)에 의한 단약(丹藥)의 복용이나 단전호흡에 의한 기의 축적이라는 방법을 사용하였다. 그렇게 함으로써 노쇠화하여 죽게 되는 육체를 신선의 몸으로 변화시키고 죽음을 극복한 불사(不死)의 존재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하였다. 즉 도교에서는 불사는 단순히 육체의 노쇠화를 막는 것을 통해서 이루어진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이렇게 연금술에 바탕을 두고 죽음을 극복하고자 했던 시도는 중국 외에도 인도, 고대 헬라, 중세 유럽과 이슬람 등에서 보편적으로 나타났다. 이러한 시도는 오늘날 과학주의에 그대로 연결되어 있다고 보아야 한다. 즉 로보캅이나 육백만불 사나이 등은 과학을 통해 육체의 연약함을 극복하고 불사에 도전하고자 하는 인간의 생각을 반영하고 있다.
    그 외에도 민간도교에서는 축귀(逐鬼), 부수(符水)의 복용, 참회고백, 부적(符籍)과 주문(呪文)의 사용, 주술 등을 실행방법으로 가지고 있었는데 이것은 도교가 애니미즘과 연장선 상에 있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다. 기와 관련된 여러 가지 실천방법들도 애니미즘과 연장선 상에 있다. 즉 풍수지리는 애니미즘의 지령술(地靈術)과 조상숭배의 결합이며 사주(四柱)는 운명과 점성술의 결합이다. 운기(運氣)라는 것은 바로 기의 개념으로 인간의 운명의 법칙을 설명하려고 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것들은 고통과 인도함에 대한 애니미즘적인 설명체계가 기(氣)라는 보다 합리화된 개념과 결부되어진 것이라고 할 수 있다.

6. 고통에 대한 성경적 이해와의 비교
    이상에서 우리는 동양적 세계관에 나타나는 고통에 대한 이해와 해결책들을 살펴보았다. 동양의 세계관들은 기본적으로 고통을 가장 궁극적인 문제의식으로 삼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렇다면 성경은 고통을 어떻게 보고 있는가? 그것은 동양적인 세계관들과 어떤 차이가 있는가?
    무엇보다도 두드러진 차이는, 성경이 고통을 매우 중요한 문제로 심각하게 다루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성경의 궁극적인 문제의식은 "고통"에 있지 않다는 것이다. 즉 성경은 고통의 문제를 궁극적인 문제로 삼아서 출발하지도 않으며 고통의 제거를 궁극적인 목적으로 삼지도 않는다는 것이다. 성경은 죄의 문제 해결에 궁극적인 초점을 맞추고 있다. 그 결과로서 고통의 문제가 해결될 수는 있지만, 궁극적으로 성경이 고통의 문제 해결에 초점을 맞추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성경은 오히려 고통이 가지고 있는 긍정적인 면을 강조한다. 욥은 고난을 통해서 정금같이 연단되었고(욥23:10) 하나님을 아는 지식에서 성숙하게 되었다(욥42:5). 시편에서 시인은 고통을 통해서 자신이 연단되고 성숙하게 된 것에 대해서 감사하고 있다(시119:67,71). 베드로 사도도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예하는 것으로 즐거워하라"(벧전4:13)고 말하며, 바울 사도도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해서 고난도 함께 받아야 될 것이니라"(롬8:17) 라고 말한다. 성경은 고통이 우리의 죄를 회개케 하기 위해서, 다른 사람을 구원하기 위한 방편으로, 그리고 우리의 성화를 위한 도구로써 사용되어질 수 있음을 말하고 있다. 그리고 우리가 이 땅에서는 도저히 알 수 없는 하나님이 섭리에 의해서 고통이 발생할 수 있음을 보여준다. 그러나 성경은 우리의 삶에 고통이 발생하는 것은 궁극적으로는 하나님이 주권 하에 있는 것으로 본다.
    성경은 애니미즘, 혹은 샤마니즘에서 처럼 모든 고통을 초자연적인 영들의 소행으로 보지도 않으며 저주로 보지도 않는다. 우리가 경험하는 고통은 물론 기원적으로는 아담의 타락에서 온 저주라고 할 수 있으며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 때까지는 해결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삶에서 경험하는 고통이 그때 그때마다 어떤 초자연적인 영들의 저주라고 생각하는 것은 성경적인 관점이라기 보다는 애니미즘적인 관점이다. 하나님이 최고 주권자로서 고통을 허용하실 때 그것은 저주가 아니라 궁극적으로는 우리를 축복하기 위한 것이다. 기복신앙은 고통을 제거하고 현세적인 이익을 증대시키기 위해서 신을 조종하려는 태도이다. 그러나 성경에 나타나는 복의 개념은 전적으로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가진 상태로 묘사하고 있다(시1:1-2, 32:1-2, 마5:3-10). 그러므로 우리에게 요구되는 것은 하나님을 조종하려는 태도가 아니라 믿음으로 반응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고통의 풍랑 가운데서 방관하시는 분이 아니라 우리와 함께 인생의 배를 타고 계시고 우리와 함께 항해를 하시는 분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풍랑의 고통 가운데 "너희 믿음이 어디 있느냐"(눅8;25)는 음성을 들어야 한다.
    성경은 불교나 장자처럼 고통을 인식이나 관념의 전환만으로 해결되는 것으로 보지 않는다. 물론 고통에는 심리적인 요소가 많이 있지만 그것이 전부는 아니다. 성경은 고통이 관념이 산물만이 아니라 구체적으로 발생한 역사적인 산물임을 말해주고 있다. 즉 인간이 하나님 앞에서 범죄하여 타락했을 때 인간의 인식능력과 도덕적 능력, 그리고 자연계의 전락이 있었다는 것을 말해준다. 즉 인간의 타락사건은 인식능력의 전락을 초래해서 더욱 더 많은 미지의 일들(the unknown)을 초래했다. 도덕적 능력의 전락은 부당한 욕구를 발생시켜서 인간이 구체적으로 범죄하게 함으로써 고통을 초래하게 하였다. 자연계의 전락은 환경의 열악함을 가져와서 인간의 고통을 가중시키게 되었다.5 그러므로 성경은 관념의 전환만으로 고통이 종식되는 것이 아니라 신적, 우주적, 종말론적 개입에 의해서 역사적으로 고통의 문제가 해결될 것임을 말해준다. 그러므로 이 땅에서 기독교 신앙을 가지면 만사 형통하고 모든 것이 잘된다고 주장하는 것은 사실이 아니며 전적으로 애니미즘적인 신앙이라고 할 수 있다.
    성경은 유교나 노자, 그리고 맑시즘이나 해방신학처럼 사회적 관계를 변화시킴으로써, 혹은 인위적으로 어떤 사회적 공동체를 만들어냄으로써 궁극적으로 고통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고 보지 않는다. 인간의 힘으로 만들어내는 고통없는 사회의 꿈, 즉 유토피아의 꿈은 실현될 수 없다는 것을 성경은 암시하고 있다. 성경은 하나님께서 인간들을 에덴동산에서 쫓아 내보내시고 에덴동산 동편에 그룹들과 두루 도는 화염검을 두어 생명나무의 길을 지키게 하셨다고 기록하고 있다(창3:23-24). 성경은 예수 그리스도가 재림하고 새하늘과 새땅, 새예루살렘이 도래한 후에 고통이 끊어질 것을 기록하고 있다. 인간의 힘에 의해서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모든 눈물을 씻기시고, 사망도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없는 세상을 만드시는 것이다(계21:1,4).
    성경은 기 사상이나 도교나 과학주의처럼 어떤 물질이나 에너지를 통해서 육체를 변화시키거나 죽음을 극복할 수 있다고 보지 않는다. 인간의 어떤 수행법이나 과학적 기구도 인간의 고통의 문제를 해결하거나 죽음을 극복하게 할 수 없다. 성경은 하나님을 떠나서 인간이 영원히 살 수 있을 것이라고 한 사단의 거짓말의(창3:4-7) 결과가 무엇이었는지 분명히 보여주고 있다. 죄의 문제가 해결됨 없이는 죄의 대가인 사망의(롬6:23) 문제도 해결될 수 없다.

맺음말
    고통과 미지에 대해서 어떤 이해를 하느냐에 따라서 세계관은 그 방향을 매우 달리할 수 있다. 복음은 기존하는 여러 가지 종교와 사상 등의 문화적 토양 위에 뿌려지는 것이기 때문에 고통과 미지에 대한 비성경적 세계관들이 은연 중에 교회에 들어오고 그것이 창질과 같이 교회를 부패시킬 수 있다(딤후2:17).
    인간은 타락으로 인하여 저주받아 고통으로 가득 찬 세상 속에서 살고 있기 때문에 고통받는 것이다. 그러므로 고통은 이 세상에서 사는 동안에는 불가피한 것이다. 그러나 모든 고통이 구체적으로 일일이 초자연적인 영의 저주로 인한 것으로 생각하는 것은 정당하지 않다. 부당한 욕구와 죄로 인한 고통이 있을 수 있고, 열악한 자연으로 인한 고통이 있을 수 있다. 성화와 연단을 위한 고통이 있을 수 있고, 타인의 구원을 위해서 받는 고통이 있을 수 있다. 그러나 우리는 모든 고통의 이유들을 다 추적할 수 없으며, 천국에 가서야 그 이유를 알게 될 고통도 있을 수 있다. 왜냐하면 고통은 인간의 인과율적 인식을 넘어서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기독교가 이 땅에서의 고통 문제 해결을 궁극적 목표로 삼지 않는다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 인류 전체적인 차원에서는 죄 문제의 해결이 완성되어질 때 고통의 문제도 완전히 해결될 것이다. 즉 그것은 죄로 인한 저주로부터 완전히 회복되는 새예루살렘에서야 이루어질 것이다. 성경에서 고통은 신비이다. 하나님은 하나님 자신의 고난을 통해서 인간의 죄 문제를 해결하셨다. 기독교는 예수의 제자들이 고통 가운데 믿음으로 하나님과 동행하며 하나님 나라를 성취하는 것을 말한다.
    한국의 기독교인들은 샤마니즘의 영향을 많이 받아왔다. 샤마니즘이나 애니미즘에서는 인간이 당한 위기, 고통, 인도함에 대해서 매우 구체적인 설명과 함께 해결책을 주는 것으로 여겨진다. 언제 어떻게 하라든지, 어느 방향으로 가라든지, 어느 학교에 원서를 내라든지, 푸닥거리를 해야한다든지, 조상이 노했다든지, 하다 못해 값싼 부적이라도 안겨준다. 이런 것을 찾아가는 사람들에게 기독교는 구체적이지 못하고 확실한 것이 아무 것도 없어 보인다. 기독교는 기본적으로 고통을 피하고 현세의 복을 가져오기 위해서 신을 조종하는 여러 가지 기술들을 가지고 있지 않다. 그러나 기독교는 위기에 처한 사람, 고통 가운데 있는 사람, 인도함을 구하는 사람들이 신을 조종하는 방법으로 끌려가지 않도록 할 수 있는 충분히 납득할만한 설명체계와 방법론을 제시해야 한다. 즉 폴 히버트가 말한대로 고통과 죽음, 그리고 인도함에 대한 기독교 신학을 더욱 발전시킬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6
    어떤 선교사가 애니미즘에서 개종한 사람이 자신의 죽어가는 자녀를 위해서 기도해줄 것을 요청하였다. 이 선교사는 만약 기도한대로 그 아이가 살아나지 않고 죽어버렸을 때 일어날 수 있는 일을 걱정하였다. 그것은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고 선교의 길을 막을 것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 개종자는 강권적으로 선교사의 손을 끌고 가서 자기 자녀의 몸에 손을 대고 기도하도록 하였다. 많은 신자들과 불신자들이 그를 지켜보고 있었고 그는 불편한 마음을 가지고 기도하였다. 그리고 며칠 후에 선교사의 기도와는 아랑 곳 없이 그 아이는 죽고 말았다. 선교사는 대단히 실망했고 이제 그의 사역에 종지부를 찍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 마을에서는 바로 이때 놀라운 일이 일어났다. 많은 사람들이 기독교에 대해서 관심을 보이기 시작한 것이다. 사람들은 그 아이의 부모가 보여주는 영생과 천국, 부활에 대한 소망에 충격을 받았다. 죽음을 극복하는 믿음을 보면서 그들은 기독교가 뭔가 다르다는 것을 느끼기 시작한 것이다.
    사실 기독교의 신비는 고난에 있다. 하나님은 고난을 통해서 당신의 궁극적인 인류구원 사역을 성취하셨다. 그리고 하나님은 그리스도의 제자들이 자기 십자가를 지고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눅14:27) 고난을 통해서 이 세상 사람들을 죄로부터 구원해내시기를 원하신다. 우리의 예상과는 달리 세상 사람들은 기독교인이 세상적으로 형통할 때 놀라워하지 않는다. 오히려 고통 가운데 소망과 성숙함을 드러내는 기독교인들을 보고 놀라는 것이다. 기독교인은 현세적으로 형통해야 한다는 잘못된 강박관념에서 벗어나야 한다. 고난은 기독교의 수치가 아니라 기독교의 신비이고 정수(精髓)이다. (목회와 신학, 2001년 2월호)

주(註)
1. 폴 히버트(Paul Hiebert)는 "Understanding folk religion" (Grand Rapids: Baker, 1999)에서 "well-being and misfortune"과 "guidance and the unknown"이라는 범주로 나누어서 기술하고 있다.
2. 폴 히버트, 위의 책, pp.133-174
3. 폴 히버트, 위의 책, pp.175-195
4. 게일린 반리넨(Gailyn VanRheenen), "Communicating Christ in animistic contexts," Grand Rapids: Baker, 1991, pp.218-236
5. 안점식, 세계관을 분별하라, 서울: 죠이선교회출판부, 1998, pp.65-90
6. 폴 히버트, 위의 책, pp.129-130, 164-165, 192-195
자료출처/  GMT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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