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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학자가 본 한국교회와 언론” - 김명혁 목사 (강변교회 담임, 한복협회장)

먼저 한국교회에 대해서 말씀 드리겠습니다. 교회는 본래, 예루살렘교회 안디옥교회 빌립보교회는 물론 한국의 초대교회도, 세상의 소금과 빛의 역할 즉 착한 행실을 사람들 앞에 나타내 보이므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사람들로부터는 존경과 사랑을 받는 존재였는데, 한국교회는 고난이 그친 70년대부터 점점 세속화되어 소금과 빛의 역할을 수행하지 못하므로 존경과 사랑을 받는 대신 멸시와 비판을 받는 존재로 전락했다고 하겠습니다.

극단적인 예이긴 하지만 영락교회 설립 장로님의 딸인 김정란 교수가 최근에 이렇게 갈등과 불만을 토로한 일이 있습니다. “나는 교회 안에서 성장했다. 내 아버지는 대한민국 최대의 교회 중 하나인 영락교회를 창건하신 열 분 장로님 중의 한 분이시다. 나는 청소년기의 대부분을 영락교회 뜨락에서 보냈다. 교회는 나의 영혼의 깊은 터였다. 그러나 나는 더는 교회에 나가지 않는다. 그래도 나는 내가 여전히 예수쟁이라고 생각한다. 그 말은 내가 예수를 깊이 사랑하고 나의 어리석음과 죄 많음에도 불구하고 그를 나의 진정한 구원자로 여기고 따른다는 의미이다. 교회 뜨락에서 보낸 유년이 지나간 뒤, 갈등은 내 영혼 깊은 곳에서 신음처럼 치고 올라왔다. 나의 내면에서는 비참한 사회의 현실에 진정으로 눈을 주지 않는 대형교회의 무책임한 복음주의에 대한 불만이 서서히 싹터 올랐다. 대체 예수가 누구였던가? 그는 세상의 거지들과 함께 지냈고, 그 거지들이 유태의 사제들과 로마의 고위 정치인들만큼, 어쩌면 그들보다 더 높은 존재의 가치를 가진 자라는 것을 일깨워주었기 때문에, 체제의 종교적/세속적 울타리를 부수고 존재의 이상을 가르쳤기 때문에, 힘센 부자 사제들과 정치 권력자들의 손에 잡혀 죽었다. 부자들과 독재자를 위해 기도하고, 신도들로 하여금 세상에서 복을 받기 위해 진정한 천국을 잊게 만들고, 그들을 형이상학적으로 협박하여 1년에 수십억씩 긁어 모아 제 배를 기름지게 하는 대형교회 목사들은 예수의 친구가 아니다.” 김정란 교수의 불만의 표현이 지나치기는 하지만 이해할 수 있는 표현입니다. 저 역시 전에는 저의 신앙의 선배들과 스승들을 하나님처럼 높이 받들고 존경하고 사랑하고 순종했지만, 지금에 와서는 상당수의 소위 유명한 목사님들에 대한 존경과 사랑을 많이 상실하고 말았습니다. 왜 이렇게 되었습니까? 상당수의 한국교회가 교회 본래의 모습을 상실해가고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첫째, 기독교는 본래 영적이고 종말론적인 신앙 공동체였는데, 오늘의 한국교회는 지나치게 세속적이고 현세적인 집단이 되었습니다. 초대교회 신자들은 서로 만나면 하늘을 바라보면서 ‘마라나타’ 즉 ‘주님이 오십니다’ 라고 인사를 주고 받았지, 세상을 바라보면서 교회의 세력화 또는 정치화를 시도하지는 않았습니다. 어거스틴을 비롯한 우리 신앙의 선배들은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이요 성령의 전이지만 하나님의 도성과 동일시 할 수 없는 과도기적이고 불완전한 존재라고 지적했습니다. 그리고 어떠한 기독교화된 정치 사회 조직도 하나님 나라와 동일시 할 수 없다고 지적했습니다. 저는 개혁주의 전통과 로잔 언약의 전통에 서서 교회의 사회 및 정치 참여를 정당한 것으로 주장하지만, 교회가 사회 및 정치 문제에 집착해서 사회화 및 정치화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이 좌든 우든 중도든 마찬가지입니다. 그런데 오늘의 한국교회는 지나치게 정치에 관심을 기울이며 정치화 및 세력화하고 있습니다. 교회가 세력화하면 무서운 집단으로 전락합니다. 교회는 본질적으로 영적 도덕적 종말론적 신앙 공동체입니다.

둘째, 기독교는 본래 가난한 자들과 병든 자들과 죄인들과 소외당한 자들과 이방인들에게 사랑의 손길을 펴는 약함과 착함의 종교였는데, 상당수의 한국교회는 경제성장주의와 영합하면서 부자들과 기득권자들의 편에 서는 강함의 종교로 탈바꿈해가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가난한 자가 복이 있다고 선언했고 병든 자들과 죄인들을 위해서 세상에 오셨다고 말씀했고 사마리아와 갈릴리와 두로와 시돈의 버림 받은 이방인들을 찾아가서 그들에게 구원과 치유의 복음을 전했습니다. 물론 기독교는 공산주의처럼 사회 계급의 갈등과 싸움을 조장하는 종교는 아닙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구약의 기독교나 신약의 기독교는 너무나 분명하게 가난한 자들과 병든 자들과 나그네들과 고아와 과부들과 이방인들에 대해 적극적인 관심과 사랑을 나타내 보이는 약함과 착함의 종교입니다. 한경직 목사님의 신의주제2교회와 영락교회가 주력한 것은 가난하고 약한 자들을 돌보는 일이었습니다.

셋째, 기독교는 본래 화해와 화평의 종교였는데, 오늘의 한국교회는 정치 이데올로기에 편승한 나머지 이념적인 갈등과 증오와 대결로 치닫게 되었습니다. 예루살렘 교회와 안디옥 교회는 십자가의 정신과 성령의 역사로 각종 사회적 계급과 인종적 차별을 극복하고 화해와 화평을 이루었습니다. 유대인과 헬라인은 물론 원수들과의 화해와 화평을 도모했습니다. 모든 사람들이 함께 모여 음식을 먹으며 사랑의 교제를 나누었습니다. 교회는 시작부터 이질성과 다양성을 극복하고 수용하는 가운데 조화와 통일을 이루는 샬롬의 공동체였습니다. 그런데 지금 한국교회는 친북 반북적 이념과 친미 반미적 이념의 갈등으로 증오와 대결로 치닫게 되었습니다. 사실은 북이나 미나 우리나 모두 불쌍한 존재들입니다. 지나치게 적대할 필요도 없고 지나치게 의지할 필요도 없습니다. 기독교는 모두를 향해 긍휼과 용서와 사랑을 나타내 보이는 화해와 화평과 사랑의 종교입니다.

넷째, 기독교는 본래 그 신앙의 특성상 회개의 종교였는데, 오늘의 한국교회는 자기의 허물은 감추고 다른 사람들의 잘못을 지적하고 정죄하는 심판의 종교로 탈바꿈하게 되었습니다. 자기의 옳음을 들어내고 상대의 그름을 지적하고 고발하는 부끄럽고 불행한 집단으로 전락하게 되었습니다. 사실 한국교회는 길선주 목사님의 회개와 죄 자복으로부터 시작한 교회였고 이성봉 목사님과 김치선 목사님의 회개운동 전개로 부흥 성장한 교회였고 박윤선 목사님과 한경직 목사님의 회개의 고백으로 그 생명을 유지해간 교회였습니다. 그런데 오늘의 한국교회는 회개하고 통곡하라는 소리는 외치지만 오히려 자기의 옳음을 들어내고 다른 사람들의 잘못을 지적하고 정죄하는 증오만 쌓아가고 있는 것 같습니다. 김치선 목사님은 매년 1월 1,2,3일 교회당 안에서 신자들과 함께 금식하며 회개의 기도를 인도했습니다. 교회는 근본적으로 죄인들이 나아와서 겸손히 회개하며 죄사함 받는 구원의 장소입니다.

이제 언론에 대해서 간단하게 말씀 드리겠습니다. 저는 언론의 목적과 사명을 세 가지로 생각하고 싶습니다. 그것은 역사의 목적과 사명과도 같은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첫째 언론의 목적과 사명은 인물과 사건의 동향에 대해 신속하고 정확하고 공정한 보도를 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오늘날 상당수의 한국교회의 언론은 보도의 정확성과 공정성과 보편성을 결여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사주의 영향과 돈의 영향을 받고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둘째 언론의 목적과 사명은 인물과 사건의 동향에 대한 보도와 함께 균형 잡힌 평가와 해석을 첨부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오늘날 상당수의 한국교회의 언론은 보도의 정확성과 공정성을 결여하고 있는 것은 물론 균형 잡힌 평가와 해석을 거의 하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대부분의 경우 사진 촬영 같은 보도에 그치고 맙니다. 기자가 갖추어야 할 시대적 및 역사적 안목을 구비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셋째 언론의 목적과 사명은 인물과 사건의 동향에 대한 보도, 평가, 해석과 함께 바람직한 방향을 설정하고 제시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오늘날 상당수의 한국교회의 언론은 방향제시의 사명을 제대로 수행하고 있지 못하다고 생각합니다. 이것 역시 기자의 안목의 부족과 아울러 훈련의 부족과 함께 한국교회의 격려와 지원의 부족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제가 최근 기독 언론인들이 모인 모임에서 부탁한 말씀을 여기 인용하므로 말씀을 맺으려고 합니다. 제5회 기독언론인 세미나(10.15)에서 “한국 기독언론의 현황과 전망(기대)”이란 제목으로 말씀 드린 강연의 마지막 부분을 인용합니다.

“첫째 믿을만한 언론이 되어주기를 바랍니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보도의 내용 선정과 그 보도의 서술에 있어서 정직성과 공정성을 기해야 할 것입니다. 이해관계가 있는 교회나 단체나 인물에 대한 사건을 주로 보도하면 그 보도는 이미 정직성과 공정성을 상실한 것입니다. 일부러라도 이해관계가 먼, 또는 자기와 입장이 좀 다른 교회나 단체나 인물에 대한 보도를 한다면 그리고 그 보도의 서술에 정직성 공정성 및 호의성을 기한다면 그 신문은 이미 보편성과 신뢰성을 지니게 되고 결국 믿을만한 신문이 될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지 못한 경우가 허다합니다. 자기와 입장이 다른 사람의 글은 물론 사진도 게재하기를 꺼리는 경우도 있습니다. 신문사의 입장만을 대변하는 보도는 지양되어야 할 것입니다. 상대방의 입장을 격하하고 자기의 목소리만 내는 편파적인 보도는 지양해야 할 것입니다. 정직성과 공정성과 포용성과 아량을 지닌 믿을만한 언론이 되어주기를 기대합니다.

“둘째 소망스러운 언론이 되어주기를 바랍니다. 참된 의미에 있어서, 역사는 물론 보도는 ‘단순한 사건 진술’이 아닙니다. ‘사진 촬영’이 아닙니다. ‘해석’이며 ‘평가’입니다. 물론 지나치게 불합리하고 독단적인 주관적 판단은 금물입니다. 여기에는 어떤 한 가지 입장에서 ‘벗어날 수 있는’ ‘초연의’(detached) 자세가 필요합니다. 즉 보편적이고 균형 잡힌 ‘역사적 안목’과 ‘시대적 감각’을 지니는 것이 필요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기본적인 자질도 지녀야 하지만 부단한 연구와 훈련이 필요합니다. 소망스러운 언론이 되기 위해서는 도덕적 무질서와 분열의 갈등에 빠진 오늘을 향해 영적 및 도덕적 개혁의 소리를 내면서 조화와 협력과 통일의 깃발을 들고 앞으로 나아가야 할 것입니다. 한국교회가 해결해야 할 가장 시급한 문제들을 분석하고 그 해결의 방향을 모색하고 제시하므로 독자들의 마음에 희망과 소망을 심어주어야 할 것입니다. 즉 양극화로 치닫고 있는 한국교회 안에 연합과 협력을 이룰 수 있는 방안을 모색하고 제시하는 일을 하여야 할 것이며, 한국교회가 상실한 영성 및 도덕성 회복을 위한 방안을 모색하고 제시하는 선도자의 역할을 감당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사회로부터 오는 비판의 소리를 겸허하게 받아드리면서 사회의 정의와 복지와 평화를 위해 소금의 역할을 감당하자는 지도자의 소리도 내어야 할 것입니다. 사회를 향해 사랑과 용서와 구원의 복음을 선전하는 선교적 사명도 수행하여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과거에 그랬듯이 사회와 나라의 발전을 위한 비젼까지 제시해야 할 것입니다. 그래서 한국교회와 사회의 소망이 되는 언론이 되어주기를 기대합니다.

셋째 사랑스러운 언론이 되어주기를 바랍니다. 냉철한 진리는 사람을 죽이지만 따뜻한 사랑은 사람을 살립니다. 참된 역사와 보도는 사랑의 마음으로 쓰여져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이 성경 저자들이 지녔던 마음과 가슴이라고 생각합니다. 언론이 사건과 인물들을 공정하고 정직하고 분석적으로 그리고 비판적으로 보도하여야 하지만 동시에 ‘뜨거운 가슴’을 가지고 보도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내리 치는 것만이 능사가 아닙니다. 양극화로 치닫는 정국을 냉정하고 정직하게 비판적으로 보도하면서도 그들의 입장을 조금은 이해하려는 ‘동정’(‘이해’)과 ‘사랑’의 눈으로 보고 보도할 때 그 보도가 전달하는 파급 효과는 전혀 달라질 것입니다. 그리고 사회 구석구석에 산재하는 눈물겹고 감동적인 아름다운 사건들을 많이 발굴해서 보도해 주기를 바랍니다. ‘사랑과 선행을 격려하는’(히10:24) 스승의 역할까지 할 수 있으면 더 바랄 것이 없을 것입니다. 그런 언론은 이미 만인의 사랑을 받는 사랑스러운 언론이 될 것입니다. 한국교회가 기독 언론의 발전을 위해서 관심과 격려와 사랑을 나타내 보이므로 기독 언론이 더울 더 사랑스러운 언론이 되기를 바랍니다.”부족한 사람의 발표를 경청해주셔서 대단히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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