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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초대교회부흥약사(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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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장 한국교회 부흥과 선교사

한국교회사에서 부흥을 논할 때 가장 중요한 사건은 1907년을 전후한 대부흥운동이다. 이 부흥운동이 한국교회의 영적·교세적 부흥을 가져왔으며 이후 한국교회의 지속적인 부흥의 역사적 기틀이 되었다. 오늘날의 한국교회가 있게 된 것은 전적으로 성령의 역사하심에 있으며 이것이 부흥운동으로 나타난 것이다.

성령의 역사는 죄의 생활을 하던 세속의 사람들을 거룩한 하나님의 백성으로 변화시키기에 충분하였다. 초기 한국의 부흥운동을 통해 나타난 죄의 고백과 회개운동은 전통종교와 사회문화와는 다른 새로운 기독교 개인 및 사회문화를 형성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이러한 변화가 결코 한국의 전통적 문화를 버린 것이 아니며, 서구의 문화를 그대로 답습한 것도 아닌 한국적 기독교 문화를 형성한 독특한 토착 기독교 문화가 된 것이다. 성령께서는 이런 문화적 특성을 한국을 구원하시고 부흥시키시는 도구로 사용하신 것이다. 이 토착적 기독교 문화가 한국교회의 전무후무한 부흥의 불기둥 역할을 하였고 한국 기독교 100년사의 전통으로 자리잡게 되었다. 또한 이 전통은 초기 한국 기독교의 부흥뿐만 아니라 이후 교회의 지속적인 부흥의 기초이며 힘이 되었다.


1-1-1. 부흥의 의미

한국에서의 부흥운동은 갑작스런 교세의 급증을 가져오는 양적인 변화는 아니었다. 숫적 성장은 복음의 전래기부터 폭발적이었다. 오히려 부흥운동은 영적 각성을 통하여 참 그리스도인으로 거듭나고 성령의 능력으로 충만을 받는 운동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다시 말하면, 부흥운동은 사도행전 8장 14절로 17절에 나타나 것처럼 예수는 믿었으나 성령을 받지 못한 신자들에게 성령의 은혜를 체험하고 그리스도의 증인들로 거듭나게 하는 계기가 되었다. 아울러 민족적·사회적 목적의 호교론자들까지 순수한 신앙으로 변화시켜 순전한 교회로 정화하는 운동이었다.


1-1-2. 부흥의 준비

1866년 9월 3일은 대동강가에서 무릎을 꿇고 이 나라 민족의 구원을 위하여 최후의 기도를 드리며 순교한 토마스 목사가 거룩한 피를 흘려 하나님의 보좌를 흔든 사건이 있던 날이다. 이후 하나님의 기적같은 역사로 부름을 받은 일단의 한국인들이 복음의 씨앗을 뿌리고, 그 익은 곡식을 기쁨으로 거두어들일 선교사의 파송을 요청하였다. 일본 땅에서 예수를 믿은 이수정은 미국에 선교사를 보내 달라는 편지를 쓰면서 이렇게 말하였다.
"만일 미국교회가 이를 듣지 않으면 어떤 방법으로도 하나님이 한국에 사람을 보내겠으나 그의 공로는 한국교회 역사에 길이 남을 것이다."
이러한 편지를 받은 미국은 1885년 최초로 임명된 장로교회 선교사 언더우드(Horace G. Underwood), 감리교회 선교사 아펜젤러(H. G. Appenzeller) 등 선교사들을 파송하여 한국 선교가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그러나 그들의 선교는 사도행전 8:14-16처럼 복음만 전할 뿐 성령이 역사하시는 부흥은 아직까지 일어나지 않았고, 오히려 그들의 사역은 성령의 오심을 받아들일 준비를 시키는 사역이었다.


1-1-3. 부흥의 징후(徵候)

성령께서 불같은 역사로 이 나라와 민족을 타오르게 하는 1907년의 사건이 있기 전, 이미 여기 저기서 성령의 역사는 불붙기 시작했다. 남감리회 선교회의 거점인 송도(지금의 개성)에서는 1901년 10월 남·북감리교 연합으로 개최한 신학회가 열렸다.  신학회 수업 시작부터 끝날 때까지 '성령이 강하게 임재하여' 참석한 이들이 '마음이 뜨거워지면서 새롭게 다짐하는' 역사가 있었다. 처음으로 한국교회 성도들이 성령의 임재를 경험한 사건이었다.
이와 같은 성령의 역사는 1903년 1월 구정을 맞아 송도에서 열린 신년 기도회에서 한층 더 강하게 나타났다. 북부의 한 교회당에서는 매일 오전 11시부터 12시 30분까지 전도하고 저녁에는 기도회를 하였는데, 기도의 열기는 갈수록 뜨거워지고 그와 함께 오순절 성령의 강한 역사가 영적 각성을 수반하여 모인 회중에게 나타났다.
당시 그 현장에 있었던 문경호전도사는 신학월보에 송도의 영적각성 움직임을 보고하며 다음과 같이 증언하였다.

"송도 북부 본교회당에서 전도하였는데 아침에는 열한시부터 열두시 반까지는 전도하고 저녁 일곱시부터 아홉시까지는 기도회를 열고 형제 자매들이 각각 간증을 하게 하였는데, 교인들이 점점 늘어 회당에 앉을 틈이 없게 모여 예배를 하였다. 이때에 성신님이 예전 오순절에 일백 이십인을 감화시키듯이 예배당에 모인 형제 자매들에게 각각 감화하시더니, 하루는 기도할 시간에 온 회중이 눈물을 흘리고 슬피 우는 것을 보고, 또 하루는 형제 중에 가슴을 치고 대성통곡하는 것을 보고, 또 하루는 기도할 때에 마음이 비참하여 울면서 기도를 하였으며, 또 하루는 각각 울면서 간증함으로 온 회중이 서로 비참하여 얼굴을 숙이고 눈물을 먹었더라."
    
"사도행전에서 나타났던 철저한 회개운동이 일어났다. 자연히 성령의 은혜를 체험하고 주안에서 주시는 용서와 사랑의 기쁨을 체험한 이들은 둘씩 짝을 지어 동서남북으로 흩어져 송도 시내와 시내 밖으로 나가 열심히 전도하였다.  거리거리 찬미 소리요 전도하는 소리가 서로 연하여 그치지 아니하니 과연 천국이 가까웠더라"


1-1-4. 선교사들의 회개

그러나 무엇보다도 대부흥의 시발점은 이 땅에 복음의 사역을 위하여 들어와 있던 선교사들의 회개였다. 성령께서는 먼저 선교사들을 회개시키고 권능으로 충만케 하심으로 부흥의 도구가 되게 하였다. 이들은 한국의 고유한 문화와 전통을 무시하고 다만 선진국 선교사라는 이유 때문에 우월감과 교만함으로 일관하였던 것이 사실이다. 이런 그들의 처사는 자신의 선교 사역에 실패와 한국교인들과의 마찰을 면치 못하고 있었다. 오히려 선교사들이 원산 창전교회의 전계은 같은 사람들에게 기도생활의 게으름에 대해서 꾸짖음을 당하는 형편이었다. 그러나 선교사들의 회개를 통하여 양자의 간격이 좁아질 수 있게 되었고, 따라서 이때의 부흥운동은 선교사들의 회개에서 시작하여 한국 교인들에 의하여 심화되고 토착화된 회개운동이라고 평가하는 것이 옳을 것이다.  

1903년 8월 선교사들이 원산에 모여 성경공부와 기도회를 하였다. 이 모임은 중국에서 활동하고 있는 남감리회 여선교사 화이트의 방문을 계기로 캐롤, 노울즈, 하운셀, 캐나다 장로회 여선교사 매컬리 등이 주도하였으며, 이들은 모임의 인도를 하디에게 부탁하였다. 이 당시 하디는 선교의 많은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그의 고백을 통해서 볼 때 실패의 원인은 자신에게 성령의 능력이 없기 때문이며, 능력이 없음은 성령의 능력을 순수하게 의지하지 못했기 때문이었음을 알 수 있었다. 하디는 그런 자신의 모습을 솔직하게 고백하였고 그 자리에서 성령의 은혜를 체험하게 되었던 것이다.

"성신이 내 안에 충만한 실증을 가지고서 나의 부끄러움과 혼미에 찬 얼굴로 나의 교만함과 마음의 포악함과 신앙의 부족함과 또 그 상태가 빚어낸 모든 결과를 자복하니 회중은 강한 죄의식과 회개의 신앙 생활 체험상의 작용을 비로소 깨닫게 되었다. 나는 그들에게 하나님의 약속을 믿는 단순한 신앙으로 내가 성신의 은사를 받았음을 알려주었다."

또한 일부 선교사들이 지니고 있던 '문화적 식민주의'(cultural colonialism) 의식은 자존심이 강한 한국의 선교 1세대들과 마찰을 빚어 선교에 어려움을 겪게 하였다. 이런 선교사들의 의식은 성령의 은혜를 체험하고, 목도하므로  변화되었고 비로소 선교의 열매를 맺을 수 있게 되었다.

"작년까지만 해도 나도 은연중 '서양은 서양이고 동양은 동양이다'는 식의 바람직하지 못한 관념에 사로잡혀 있었다. 동양과 서양이 함께 만날 수 있는 근거나, 둘 사이에 어떤 유사성도 찾을 수 없다고 생각했다.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나도 한국인들은 서양 사람들이 하는 그런 종교적인 체험은 할 수 없을 것으로 생각했다. 이번 부흥회는 내게 두 가지를 깨우쳐 주었다. 첫째, 표면적으로 본다면 한국인들이 서양인과 정반대되는 것이 수천 가지가 넘지만 본질로 들어가 근본적인 것으로 따지면 서양인과 한 형제로서 하나라는 점이었다.(중략) 둘째로, 부흥운동으로 깨달은 바는 동양인들의 경건한 생활이나 기도에서 보여주는 단순하면서도 어린아이 같이 순진한 신앙이 풍부할 뿐 아니라 깊이가 있어 서양인이 배워야 한다는 점이다. 우리가 이런 점을 배우지 않고서는 그리스도의 복음을 완전히 파악했다고 말할 수는 없을 것이다.

성령께서는 사도행전10:1-11:18에서처럼 성령의 은혜가 자신들 뿐 아니라 인종과 민족과 신분을 뛰어 넘어 모두에게 동등하게 주어진다는 사실을 친히 가르쳐 주셨다. 이렇듯 성령께서 사람의 미련함과 교만함까지도 깨뜨리시고 복음의 사역을 감당할 수 있도록 친히 역사 하신 것이다.

1903년 8월 원산의 선교사 모임 이후 하디는 한국의 부흥을 위한 성령의 도구로 대 변신을 하였다. 그가 인도하는 집회마다 영적 각성을 통한 부흥이 일어났다. 하디의 집회는 자신이 죄를 고백하며 영적으로 각성함으로 성령의 역사를 체험했던 것이 경험이 되어 죄의 자복과 영적 각성을 통한 집회가 되었다. 이러한 사실을 차재명은 다음과 같이 기록하였다.

"1903년 장·감 양교파와 침례회까지연합하여 창전예배당에서 한 주간 매야 집회하는 중 하리영(하디)은 은혜가 특수하였다."

하디는 1903년 8월 이후 1904년 11월까지 원산, 송도, 강원도, 서울, 인천 등을 돌며 집회를 인도하였다. 특히 그가 안식년을 맞아 미국으로 떠나기 전 가졌던 서울, 평양, 제물포 집회는 부흥운동의 영향을 한국의 주요 도시로 확대시키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1-1-5. 1907년 평양 장대현

하디가 주도하던 부흥운동이 밀러, 하운셀, 저다인 등 선교사들과 전계은, 정춘수, 김흥순 등 일부 한국인들에 의해 계속 되었는데, 전계은 등은 원산 거리를 누비며 기도하고 성령의 임재와 은사를 선포하며 대대적인 전도와 회개운동을 벌였다. 1906년 미국 북장로교 해외선교위원인 존스톤(H.A.Johnston)목사가 내한 평양 장대현에서 한국에서의 부흥운동의 필요성을 역설하며 영국 웨일즈지방과 인도 카시와지방의 부흥운동 소식을 전하였다. 여기서 존스톤은 하나님의 성령의 도구가 될 사람은 자원하라고 초청하였고 이 자리에서 한국의 부흥운동을 이끈 길선주목사가 헌신을 작정한 것은 하나님의 섭리였던 것이다. 1907년 1월 역사적인 대부흥의 막이 올랐다. 새벽기도회를 주도했던 길선주장로 등이 있던 장대현 교회에서 구정사경회가 열렸다.  이 집회가 있기 전부터 선교사들은 매일 정오 기도회를 가졌는데, 선교사들도 성령의 은혜를 받기 위하여 자신들이 먼저 죄를 털어 버려야 할 것을 알고 있었다.

성탄 다음 날부터 선교사들은 하나님의 권능을 받으려는 목적을 위하여 기도하고 있었다.

"지금까지 우리는 정오에 모였다. 우리는 우리들 사이에 피차 죄를 고백하며 집회를 시작하였다. 우리(선교사)가 비록 완전하여 흠이 없긴 했으나 우리가 기도하면서 원하는 축복을 받기 위해서는 상호간에 죄를 고백할 것이 있다는 것을 찾을 수 있었다."

낮에는 남자와 여자, 그리고 학생들로 나누어 각처에서 성경공부를 하였고 저녁 집회는 장대현 교회에서 연합으로 모였다. 그러나 기대 속에 시작된 첫째 날의 저녁집회는 기대와는 달리 '모든 것이 꽉 막혀 버린 듯, 생기가 없는 형식적인 것'이었다. 실망한 선교사들은 이튿날 정오 '하나님께 도움을 비는' 기도회를 가졌다.  성령의 임재를 간절히 기도한 선교사들의 기도는 그날 저녁집회에서 응답되었다. 헌트의 설교가 끝난 후 사회를 맡은 리(G. Lee)가 "기도합시다"라고 말한 후 그가 "나의 아버지여!"라는 말을 하자마자 밖에서부터 흠뻑 밀어닥치는 강력한 힘의 임재에 압도당했다 사람들은 통성으로 기도하기 시작했고 그 소리는 걷잡을 수 없이 터져나오는 기도의 맥이 온 영혼들에게 통하여 폭발되는 감격이었다.
"그 기도가 마치 큰 폭포소리처럼 들렸고 또 그 기도소리가 바다의 파도소리처럼 하나님의 보좌에 부딪치고 울려 퍼져 나가는 것만 같았다. 그것은 여럿이 외쳤던 소리였건만 기필코 하나였다. 그것은 유일하신 성령으로 거듭나는 경험, 한 분이신 아버지께로 들리움 받는 체험이었다."

집회가 끝난 후 많은 사람들이 돌아가고 5, 6백 명이 남아 계속 기도하게 되었다. 선교사들은 그들을 한 곳으로 모아 계속 집회를 인도하였는데 거기서 놀라운 장면이 전개되었다.  
"기도를 한 후 죄를 자백할 사람이 있느냐고 하는 순간, 성령이 회중 가운데 임하셨다. 한 사람씩 일어나더니 자기 죄를 자백하고, 울음을 터트리더니 마루 바닥에 쓰러져 손바닥으로 마루 바닥을 치면서 괴로워 몸부림쳤다. 어떤 사람은 '목사님 말해 주세요. 나 같은 놈도 소망이 있나요? 용서받을 수 있나요?' 하면서 마루 바닥에 쓰러져 통곡을 하며 뒹굴었다. 죄를 자백하는 중간 중간에 회중 전체가 통성 기도를 하였는데 남자 수백 명이 소리를 내어 하는 통곡 소리는 말로 형용할 수 없는 그런 것이었다. 그리고 다시  죄를 자백하면서 주체할 수 없는 울음을 터뜨렸는데 우리도 달리 어찌할 방법이 없어 울 뿐이었다."

과연 하나님은  모든 죄를 토설케 하여 거룩한 성전을 만드시므로 이 백성과 함께 거하시려 하셨던  것이다.
  
다음날의 집회에서도 이런 현상은 계속 되었고 더욱 강력한 성령의 임재가 나타났으며 집회가 끝날 때까지 이 같은 일은 이어졌다. 특히 이 날 이후 한국의 부흥을 이끈 길선주 목사의 회개와 설교는 한국교회사에서 대부흥의 개막으로 취급되는 중요한 것이었다. 1904년 웨일즈 부흥 운동 때 로버츠가 했던 역할을 이곳에서는 길선주가 한 것이었다. 길선주는 밧줄로 자신의 가슴을 단단히 묶고 그 한쪽 끝은 다른 사람에게 잡게 하고 강대상 옆에 앉아 있던 선교사에게 도와 달라고 말했다. 그는 그것이 죄에 얽메인 사람이 그 줄을 끊고 하나님께 돌아오려고 하는 행동임을 설명한 후 그것에서 빠져 나오려고 안간힘을 썼다. 하지만 단단히 묶인 밧줄은 쉽게 풀어지지 않았고 줄을 잡은 사람은 더욱 강하게 그 줄을 당겼다. 그러나 길선주가 있는 힘을 다하여 그 줄을 끊고 선교사에게 달려갔을 때  둘은 서로 끌어안으며 외쳤다 '할렐루야! 나는 자유다' 이 순간 숨죽인 듯 고요하기만 하던 회중들이 자리에서 일어나 자신의 죄를 자복하고 마루바닥에 넘어져 울부짖으며 회개하기 시작했다.
  
그 당시의 상황은 이러했다.

"인간이 범할 수 있는 가능성이 있는 죄는 거의 다 고백되었다. 사람의 체면은 이제 다 잊어버리고 오직 이 때까지 자기들이 배반하던 예수를 향하여 '주여 나를 버리지 마옵소서'라고 울부짖을 뿐이었다. 국법에 의한 처벌을 받는다든가, 또 비록 죽음을 당한다 하더라도 문제가 아니었다. 다만 하나님의 용서를 받는 것만이 그들의 유일한 소원이었다. 심지어 어떤 여신도는 청일전쟁 때에 어린아이를 업고 도망하다가 무거워 빨리 갈 수 없게되자 아기를 나무에 부딪쳐 죽이고 혼자서 달아났던 일을 자백하였다."
  
길선주가 집회를 인도하던 그날 밤의 모습을 정익로장로는 이렇게 증언하고 있다.

"그날 밤 길선주 목사의 얼굴은 위엄과 능력으로 가득 찬 얼굴이었고 순결과 성결로 불붙은 얼굴이었다. 그는 눈이 소경(길선주 목사는 시력이 약하였다)이어서 나를 볼 수 없었을 터이나 나는 그의 앞에서 도피할 수 없었다. 하나님이 나를 불러놓은 것으로 생각되었다. 전에 경험하지 못한 죄에 대해 굉장한 두려움이 나를 엄습하였다. 어떻게 하면 이 죄를 떨어버리고 도피할 수 있을까 나는 몹시 번민하였다. 어떤 사람은 마음이 너무 괴로워 예배당 밖으로 뛰어 나갔다. 그러나 전보다 더 극심한 조심에 쌓인 얼굴과 죽음에 떠는 영을 가지고 예배당으로 되돌아 와서 '오! 하나님 나는 어떻게 했으면 좋겠습니까'라고 울부짖었다"

이처럼 1907년 평양 장대현 교회에서 있었던 집회는 초대교회 마가의 다락방에서 있었던 성령의 불길 바로 그것이었고, 그 동안 있어 왔던 죄의 자백과 회개의 영적 각성운동을 대대적이며 전국적으로 번져 가게 하는 시발점이 되었다. 또한 그 이후 목회의 일들이 선교사들의 손을 떠나 한국인 목회자들에게로 옮겨지게 되었고, 한국의 목회자들이 중심이 되면서 영적 각성운동은 급속하게 전국으로 퍼져 나가게 되었던 것이다.

이와 같이 한국에서의 부흥운동은 주로 죄를 통회 자복하고, 하나님과의 막힌 담을 허물며 영적으로 거듭나는 종교적 체험으로부터 시작되었다. 여기서 하나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은 집회를 인도하는 인도자들이 중생에 대한 성령의 증거를 입증하거나, 그 증거로 죄의 고백을 의도적으로 유도한 것이 아닌데 심령 속에 영적 각성이 일어난 자신들이 죄를 청산하려고 자발적으로 하였다는 것이다. 아울러 이런 체험들이 그들의 개인 생활과 사회에 엄청난 변화를 몰고 온 것은 당연한 귀결이라 아니할 수 없다.


1-2-1. 하나님의 새로운 사회

부흥운동을 거치면서 한국의 기독교인들은 종래의 전통종교와 문화(양반, 유교)를 기반으로 한 윤리 체계와는 구별되는 기독교 윤리체계를 형성하게 되었다. 영적 각성을 통해 거듭남을 체험한 것처럼 윤리와 문화도 거듭났던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윤리는 교회 공동체 뿐 아니라 일반 사회에도 영향을 끼쳐 사회를 개혁하고 정화시키는 중요한 위치를 차지했던 것이다.


1-2-2. 거듭난 윤리

빛이 비추이면 숨겨졌던 것들이 드러나게 되어 있다. 그 동안 어둠 속에서 존재했던 윤리와 문화들이 하나님의 빛을 받으면서 그 실체가 드러나기 시작했는데 전에는 '죄의식'없이 행해지던 '봉건시대' 습관적 행위들이 새롭게 죄로 인식되기 시작했다. 이들이 자백한 죄의 내용을 보면 살인이나 간음, 절도, 거짓말, 폭행 등과 같은 인류 보편적 죄뿐 아니라 축첩, 조혼, 노비제도, 술, 답배, 조상숭배, 미신행위, 음담패설 등 예전에는 죄로 여기지 않았던 것들을 죄로 고백하며 통회한 사실을 보아도 알 수가 있다. 이런 영적 각성은 거룩한 삶으로 귀착된다.

서울 지역에서 매서인으로 활동했던 김씨라고만 알려진 사람이 있었다. 그는 첩을 멀리 내보내고 술과 도박을 금하고 애지중지하던 장죽을 버리는 것으로 신앙을 표현하였다. 홍성에서는 부흥회에 참석했던 교인이 첩을 두는 것이 죄인 것을 깨닫고 십 년 동안 데리고 살면서 아이까지 두었던 첩을 내보내 서울로 올라가 간호원이 되게 하였다. 강화에서는 감찰 벼슬을 지낸 조상정이란 교인이 사람을 물건 매매하듯 값주고 서로 매매하는 것이 곧 야만의 악습이라 하여 칠 년 전에 계집종 일인을 돈 수천냥 주고 사서 부리다가 그 문서를 교회에 드려놓아 불살라 없애고 그 계집종의 몸을 속량하여 자유케 하며 함께 하나님의 거룩한 자녀가 되었다. 영변에서도 노비 모녀를 부리고 있던 부인이 있었는데 교인이 된 후 딸 노비 몸값으로 삼백원이나 지불하였음에도 그를 팔아 넘기지 않고 오히려 자유를 주었고 나중에 결혼 할 때 마치 자기 딸처럼 예물을 마련해 주었다. 그 어미에게도 자유를 주었으나 그는 떠나지 않고 그 부인과 함께 살기를 원했다.

이상의 기록들은 당시 죄의 고백과 각성을 통해 하나님의 새 백성이 된 사람들이 하나님나라 윤리에 부합하는 삶으로 갱신되어졌음을 나타내는 것들이다. 이들은 성령의 강권으로 자신들의 삶을 스스로 고쳐 나갔던 것이고 새로운 윤리와 사회를 만들어 나갔던 것이다.


1-2-3. 배상행위

또한  이들은 과거의 잘못에 대하여 회개할 뿐 아니라 삭개오(눅19:8)처럼 배상의 책임을 기쁘게 감당하였다. 이들에게 있어서 회개는 눈물을 흘리며 죄를 고백하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남에게 손해를 끼친 사람들이 그 손해를 배상함으로써 피차 화목을 이루는 것이었다. 사람들은 각기 자기가 일찍이 손해를 끼친 사람들의 집을 찾아다니면서 상처를 준 사람들에게 사과를 하고 과거에 남의 재물이나 돈을 훔친 사람들은 그것을 갚아 주었는데 그것은 비단 교인들에게 뿐 아니라 불신자들에게도 그렇게 하였다.

1908년 2월 코리아 미션 월드지에 선교사 프레더릭 밀러가 소개한 경험담이다. 늙은 도박꾼 탕자였던 김씨가 회개하고 성령을 체험한 후 변화를 받았는데 그가 자신이 성령받은 체험을 다음과 같이 고백했다.

"그의 사촌 땅에 철도가 놓이게 되어 그 보상을 대신 받으러 간 일이 있었다. 사람들은 자신이 늙은 사기 도박꾼인 것을 알고 있었다. 그 돈을 받아 사촌에게 전해주자 사촌은 포기했던 돈이 들어왔다며 기뻐했다. 그런데 읍내에 나갔다가 주머니에 돈이 남아 있는 것을 발견하고는 '하나님이 주셨구나' 하고 그냥 집으로 갔는데 그날 밤 한숨도 잘 수가 없었다. 그는 다음날 아침 일찍 사촌에게 가서 그 돈을 돌려주었다. 그리고 그는 말하길 '만약 성령이 나의 탐욕적인 마음에 계시지 읺았다면 그런 일은 10년이 지나도 일어나지 않았을 겁니다' 라고."

평야에서도 이런 보상행위는 계속 되었다. 한 금광에서 일하던 청년 하나가 그곳에서 일하면서 날마다 조금씩 금을 훔쳐 집에다 모아 놓았는데 그 양이 상당한 것이었다. 그가 교인이 된 이후에 그것을 선한 일에 쓰려고 기회를 보고 있었다. 그는 주변 사람에게 좋은 본이 되는 사람이었지만 늘 마음에 숨겨진 죄로 인하여 괴로워하게 되었다. 그런 그가 집회에 참석하여 성령에 사로잡힌 후 그 금을 모두 금광 주인에게 돌려주었다. 그는 이것으로 인해 책벌 받는 것보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바로 되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하면서 회개하였다. 후에 그 금광 주인은 그를 더욱 신뢰하게 되었다.

선교사들의 보고서에서도 성령의 역사로 회개한 교인들에 배상행위가 줄을 이었다고 말한다.

"회개는 눈물과 자백으로 이루어졌다. 그리고 장소를 가리지 않고 배상하려고 하였고 그 후에 평안을 얻었다. 우리 선교사들은 지난 수년동안 우리한테서 훔쳐간 물건과 돈들을 돌려 받으면서 가슴이 찢어지는 것 같았다. 그토록 슬퍼하는 그들을 보면서 마음이 아팠다. 교인들은 시내 곳곳을 돌아다니며 그 동안 훔친 물건과 돈을 돌려주면서 해를 입힌 사람들을 찾아가 용서를 빌었는데 교인들끼리만 그런 것이 아니라 교인 아닌 사람들에게까지 찾아가는 바람에 시내 전체가 들썩거렸다. 어떤 상인은 교인이 상점에 찾아와 수 년전 불의한 방법으로 취득한 것이라며 상당한 액수를 내놓는 것을 보고 크게 놀랐다."
  
이것은 진정 초대 교회의 재현이라고 아니할 수 없으며 '이같이 너희 빛을 사람 앞에 비취게 하여 저희로 너희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마5:16)는 말씀을 직접 응하게 하는 현장으로서, 삭개오처럼 진정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만난 자들의 행적이라고 아니할 수 없는 것이다.

이런 현상에 대하여 1908년 감리교 감독 해리스(M.C.Harris)는 미국 감리회 볼티모어 4년 총회에 이렇게 보고하고 있다.

"이 부흥운동의 효과는 전적으로 훌륭하였다. 즉 교회의 신앙 수준이 더 높아졌고 미리 자상한 성경교육이 있었으므로 광신은 거의 없었으며, 정신이상 같은 경우도 하나도 없었고 수천 명의 신도가 올바른 마음의 자세를 세웠으며, 다수인에게 성직의 소명을 받게 하였고 그보다 더 많은 교회들이 성경을 공부하려고 무려 이천명의 대집회가 한 장소에서 거행되었으며 수천 명이 글읽기를 배우고 기독교를 알아보려고 문의하며 술 주정꾼, 도박꾼, 도적놈, 오입쟁이, 살인강도, 독선적 유학자들, 잡신을 섬기는 사람들이 다 그리스도 안에서 새 사람이 되었으니 옛 것은 지나가고 말았다."
선교사들은 온 교회가 이제는 깨끗이 청소되고 새로운 것이 되었다고 만족해 했던 것이다.

아울러 이들의 윤리변화는 개인의 실행으로만 끝나지 않았다. 이들은 토론을 통해 성결의 삶으로 나아가는 도덕적 기준을 설정하기도 했던 것이다.

"오후 사경회에서는 조혼, 교육, 청결, 흡연 등과 같은 주제를 놓고 공개적으로 토론을 하였다. 한국인들이 이런 문제들에 대해 토론을 벌이는 모습을 보면 그 열정이나 진지함에서 놀라울 정도다. 가장 놀라운 점은 이런 문제들에 대해 그들 나름대로 도덕적인 기준을 도출해내고 있다는 것이다.


1-2-4. 술·담배의 금지

이렇게 성령을 통해 교회 안에서 일어난 거룩한 삶의 윤리들은 범 국민적인 운동으로 확대되어 사회전반에 하나님나라의 거룩한 생활을 뿌리내리게 하였는데, 그중 한국교회가 언론을 통해 적극적으로 지적한 것이 술과 담배의 금지였다.

"개화를 크게 해하는 물건은 술인고로 옳게 생각하는 사람마다 이것을 없이 하기에 힘쓸지니 술은 바른 생애를 수고하여 모은 재물을 빼앗으며 검인과 죄인을 만들고 집을 망하게 하며 협잡과 뇌물과 사정을 성행케하여(중략), 국재를 남용하며(중략), 경제상으로나 도덕상으로나 술은 없이할 물건이거늘..."  

"형제들아 우리의 몸이 하나님의 거룩한 성전인줄 알지 못하느냐, 교인들도 술 담배를 멀리 하려니와  전도 선생들은 더욱 그럴지니라."

"흡연의 해되는 증거가 무엇이뇨? 여러 형제와 자매는 각각 자기 몸이 하나님의 전 됨을 알고 이런 무익한 관습을 거절하야 그 몸을 정결케 할 뿐 아니라 더욱 어린 자녀나 젊은 학도의 흡연하는 것을 금지하야 신체와 총명과 영혼과 경제를 온전케 하시기를 간절히 바라나이다."

또 개인적으로 술과 담배를 거절하자는 호소문을 신문에 낸 사람도 있었다.

"담배라는 것이 사람에게 해가 되는 것이요 조금도 유익 되는 것이 없는 물건이라. 위생에도 여러 가지 해가 되는 것인즉 어찌 해가 되는 것을 거절치 아니하리요. 담배라 하는 것은 슬픔이나 울화가 있는 사람이 항상 먹거늘 우리 구주님 예수를 만난 형제 자매야 슬픔이나 울화가 어디 있나뇨. 결단코 담배를 거절합시다. 담배를 거절치 못하옵시면 어찌 몸을 이길 수 있으며 성경에 가라사대 '몸을 이기어 날마다 그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지어다' 하셨으니 우리가 힘써 몸을 이기어야 하겠나이다. 우리 형제 자매가 다 하나님의 성전 된 줄을 생각하옵시면 좋겠나이다. 그런 고로 결단코 술과 담배를 거절하옵나이다. 아멘."

이렇게 인쇄매체를 통해 계몽하면서 또한 교회 안에서는 교회법으로 강력하게 치리하였다. 감리교의 존스(G.H.Jones,1867-1919)선교사는 전도인, 권속, 속장들의 모임에서 술을 마시는 교인들을 즉시 출교 하겠노라고 경고하였고, 새문안 교회에서는 술을 먹는 교인을 치리하였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교인중 이기용이라는 사람이 있었다. 당회에서 그 사람이 술 먹은 일이 있다 하여 불러서 물으니 '약으로 먹고 시장하여 먹었다'고 하므로 오히려 당회에서는 이기용을 위하여 기도해주고 권면하여 보내었다. 이 사람은 그 후에도 노지순이라는 사람과 더불어 술을 마시기도 하고 화투 놀이도 하는 것이었다. 이러한 사실을 알게 된 당회에서는 이기용을 석달간 책벌에 처하였다."

또한 1931년 신정찬송가가 발행될 때 임배세 작곡의 금주가를 편인하여 아예 계몽운동을 노래하게 하였다.

   금수강산 내 동포여 술을 입에 대지마라
   건강 지력 손상하니 천치될까 늘 두렵다
   패가 망신될 독주는 빚도 내서 마시면서
   자녀교육 위하여는 일전 한푼 안쓰려네
   전국 술값 다 합하여 곳곳마다 학교 세워
   자녀 수양 늘 시키면 동서문명 잘 빚내리
   천부 주신 네 재능과 부모님께 받은 귀체
   술의 독기 받지 말고 국가 위해 일할지라
   아, 마시지 말라 그 술
   아, 보지도 말라 그 술
   조선 사회 복받기는 금주함에 있느니라.

1928년 장로회에서 조직한 절제회의 총무 송상석 목사는 좌수의 약지를 끊어 혈서를 쓰면서까지 당시 조선 총독에게 진정하여 미성년자 금주, 금연법을 제정하였다. 사실 이 당시 일본에서는 이미 미성년자 흡연이 1900년에 법률로 제정하여 금지되고 있었다. 하지만 일제의 식민통치가 근본적으로 우민화정책이었고, 따라서 한국에 유곽을 설치하고 공창제도를 도입하는가 하면 아편을 공공연히 허용하여 나라를 피폐케 했던 것이다. 그런 일제가 한국 청소년들의 건전한 육체와 정신 함양에 소극적이었던 것을 짐작 할 수 있는 것이다.

이런 일련의 금주 단연 운동의 결과로 한국교회 초기부터 예수 믿는다는 것은 술과 담배를 끊는다는 것은 동일한 것으로 이해되었고, 깨끗하고 단아한 신앙생활로 성결을 유지했던 것이다. 지금도 한국의 기독교인은 술과 담배를 하지 않는다는 전통을 갖고 있다. 이것은 사람의 몸이 하나님에게로부터 받은 것이므로 신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 건전한 삶을 유지해야 이 땅에 사는 동안  하나님이 주신 사명을 잘 감당 할 수 있기 때문인 것이다.    


1-2-5. 아편·축첩·공창폐지 운동

한국사회에서 아편은 이미 1892년에 널리 퍼져 그 폐해가 극심하였고 1904년에 이르러서는 심각한 사회문제가 되어 있었다. 아편은 혼란한 한국사회에 독버섯처럼 퍼져 사회윤리와 인간성을 파괴하고 마비시켜 나갔는데, 교회는 여론을 통해 아편의 해독성을 알리고 건전한 도덕적 인간상과 생활윤리를 제창하였다.

"대저 아편이라는 것은 사람에게 비상보다 더 독한 것이라 이것으로 집안이 패하고 몸이 죽고 나라가 망하는 것이니 사람이 가까이 할 것이 아니니라."

1916년 일본은 한국에 유곽업 창기 취제 규칙을 공포한다. 바로 공창 제도를 말하는데 처음에는 일본에서 건너온 일본 여인들에 의해서 매음 행위가 있었으나 세월이 흐르면서 한국 전체에 퍼져 나갔다. 1922년에 이르러서는 서울에만 일본 창기 766명 한국인 창기 12,000명에 이르렀다. 일제가 이렇게 공창제도를 합법화함으로 한국 사회는 도덕적으로 타락하고 정신은 날로 피폐되어 사회적으로 큰 문제가 되었다. 이에 교회는 절제운동의 일환으로 금주·단연·아편 금지와 함께 공창제도 폐지운동을 적극적으로 펼쳐 나갔다. 평양에서는 1923년 12개의 Y.M.C.A 단체가 모여 교풍 운동을 일으켰는데, 기생조합의 폐지와 무당 판수 조합의 폐지를 당국에 요구하는 계몽반을 편성하여 계몽에 앞장섰다. 1925년 장·감 연합 공의회에서는 구세군과 협력하여 사회봉사부를 조직 폐창운동을 벌였고, 1926년 장로교 총회 제 15차 총회에서는 기독교 면려회(C.E)를 통해 이 운동을 적극 후원하기로 결의하였다. 이 외에도 대한 여자절제회, 조선기독교절제회 등에서 공창폐지를 기독교 절제운동의 일환으로 적극 펼쳐 나갔다. 그러나 일제의 간교한 술책으로 기독교의 절제 운동들은 방해를 받았고, 이런 저런  핑계로 훼방을 받아 결국 공창제도는 일본이 전쟁에서 패하고 한국에서 물러간 후에야 폐지되었다. 아울러 교회는 일제가 퍼트린 공창제도의 폐지와 더불어 축첩금지 등 순결에 관한 계몽에도 적극적으로 나섰는데 교회 안에서는 이런 문제들이  영적 각성을 통해 자발적으로 청산되었고 오히려 일반 사회계몽운동으로 전개되었으니 빛과 소금의 사명이라 아니할 수 없다.

축첩의 타파는 교회가 사회에 끼친 영향중에서도 많은 부분을 차지하는데, 가정이 바로 서고 여성의 인권이 향상되는 사회 전반적인 구조의 변화를 불러오게 하였던 것이다.  당시의 한국 사회에서는 첩을 두는 일이 오히려 남성의 능력을 평가하는 기준이 되는 남성위주의 사회였다. 따라서 남성이 본처 외에 첩을 거느리고 소실을 두는 행위는 자연스러운 것이었다. 교회는 이것을 악덕으로 여겨 첩을 두는 자는 교회에 들이지 않았고, 교인 중 그런 일이 드러나면 내쫓기를 서슴치 않았는데, 새문안 교회에서는 1910년에 노병상을 축첩하였다 하여 출교시켰고 남편을 버린 여인과 부정한 일을 저지른 유호준을 여섯 달 동안 처벌하였다.

1897년의[ 조선 그리스도인 회보] 에 보면 이런 변화를 강조하는 계몽의 글이 있다.

"부부가 없으면 부자와 장유와 붕우가 어디로 조차 나리오? 부창부수하여 가사를 서로 다스리고 서로 도와주어 서로 알지 못하는 일이 없고 서로 의논치 않는 일이 없어야 하고, 안에 화평한 덕행이 능히 온 집안을 창성케 하나니, 그런고로 자사 가라사대 군자의 도는 부부에 비롯한다 하시니 사람마다 마땅히 이 말씀을 깊이 계경할 것이어늘, 부부가 서로 공경하니 일로써 사람이 부모를 떠나 그 아내와 한 몸이 된지라 하나님이 짝하신 바를 사람이 나누지 못한다 하신 고로 주를 믿는 사람은 한 지아비와 한 지어미로 몸을 바치거니와...."

이처럼 교회에서는 일부 일처를 교리화 했고 이것을 어길 시에는 제7계명을 어긴다 하여 책벌을 했는데 이것은 당시 한국사회로 보면 가히 혁명적인 일이었다.


1-2-6. 미신·우상타파

오기선 목사의 '십계요한'을 보면 기존에 죄로 여기지 않던 많은 것들을 죄로 인식하여 그것을  근절하기 위해 노력하는 모습을 볼 수 있다.


결론
그 동안 전통 윤리 안에서 죄로 인식되지 않던 많은 것들을 성령의 조명으로 죄임을 알게 되었고 교회 안에서 그것들을 근절시켰을 뿐만 아니라, 변하지 않으면 망할 수밖에 없는 당시의 사회와 문화를 전반적으로 바로 잡는 역할을 초대 한국교회는 훌륭히 감당했다. 아울러 교회가 세속에 물들지 않고 나아가서 사단의 계락에 무릎 꿇지 않는 아름다운 윤리를 전통으로 세워놓을 수 있었던 것은 성령의 강권적 역사로 부흥운동이 죄의 자백과 회개의 영적각성으로 충만하였기 때문인 것이다.
  
    하지만 오늘의 한국 교회를 보면 가슴아픈 현실을 말할 수밖에 없다. 비록 교세적으로는 세계의 어떤 나라보다 뛰어나지만 그 성장은 이미 멈추었고 감소추세로 접어들고 있다. 이것은 한국의 초대 교회가 세워놓은 성결의 전통들이 이 시대에 목회에 뛰어든 젊은 목회자들과 세속의 문화에 빠져든 연약한 기독교인들이 내세우는 합리주의적 교회윤리에 의하여 청산되어야 할 구습 취급을 받기 때문이다. 세상과 구별되지 않는 그들의 삶과 세속의 욕망들로 오염된 기독교 문화는 한국교회에서 성령의 역사를 점차 사라지게 하였고, 그 결과로 이런 아픈 현실이 오고 만 것이다. 그리고 교회의 흔들림은 한국 사회의 전반적인 타락과 윤리부제를 방조하였고 인간성을 상실한 사회로 미친듯이 달려가는 것을 방관할 수  밖에 없는 연약한 존재가 되었다. 한국의 교회가 하나님의 영광스런 교회로 거듭나기 위해서는 초대 한국교회에서 보여준 철저한 자복과 통회의 외침으로 하나님과의 사이에 쌓아 올린 죄의 담을 허물어야 하며 그때에야 비로소 성령께서 임재하시어 역사하여 주실 것이다. 우리는 이런 성령의 역사를 간절히 기도해야만 한다.

김태권 목사(캄보디아 선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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