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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 개척 준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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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제가 목회학 박사를 받기 위해 미국의 풀러 신학 대학원에 제출한 논문을 학문적인 관점이 아닌 실제적인 상황으로 제 편성한 것입니다. 그리고 제가 교회를 세 번 개척하면서 경험한 일들을 예로 들었습니다. 특별히 교회를 개척하면서 잘했던 일보다 실수를 해서 시행 착오를 많이 해서 당했던 여러 가지 애로 점들을 기록했습니다. 이 글이 학문적인 가치는 없겠으나, 교회를 개척하시려는 분들에게 다소나마 참고되어 도움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이 논문은 서울에 새롭게 형성되는 변두리 주거 지역(대 단지 아파트 지역)에서의 교회 개척을 논했기 때문에 농촌이나 기존의 주거 지역에서 교회를 개척하시는 분들에게는 맞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이 점을 양해해 주시기 바랍니다.
제 1장 : 교회 개척의 준비
목회와 교회 설립에 대한 수많은 책들이 있다. 그러나 이런 책들 가운데 어떤 책들은 전적으로 한 교파에 국한된 책들이고, 또 실제로 다 대 도시에서 크게 성장한 교회들을 중심 해서 쓰여졌다. 그러나 성서 대학이나 신학 대학을 갇 졸업한 이들에게나 교회를 개척하고자 하는 목회자들에게 알맞은 저서는 그런 성공적인 목회를 해서 대 교회가 된 경우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 그들에게 필요한 것은 건강한 목회 신학에 입각한 교회 설립의 동기와 장소 방법들을 가르쳐 주는 것이다. 어떤 사람은 지나친 경제적인 부담을 안고 교회를 설립하여 파산하기에 이르고, 어떤 사람은 경제적인 형편에 마추어 교회를 설립하다 보니 성장의 가능성이 전혀 없는 곳에 교회를 설립하여 좌절되는 경우도 있다. 어떤 경우에는 사명이 없는 성도들과 교회를 설립하였기 때문에 교회에서 배척을 당하는 일도 흔히 있는 일이다. 유능한 목회자란 낯선 지역 사회에 들어가서 건물의 이층이나 천막을 치고 난로도 지피고 비로 청소도 하고 걸레질도 하며 목수 일도하고 청소부 일도 하면 서 그 동네 사람들을 불러 예배를 드리고 설교도 하며 질문에 답을 하면서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쳐 사람들을 그리스도인으로 만들 줄 아는 목회자일 것이다. 그래서 나는 이 글에 교회를 개척하기 전의 준비 과정과 100명-300명 정도의 성도들이 모이도록 성장하는 약 3년 정도의 과정을 기록했다.
교회를 개척하기 위해서는 여러 가지 준비가 있어야 한다.
1. 교회 개척의 성경적 근거를 확인하라. 교회 개척의 성경적 근거를 확인하는 일은 매우 중요하다. 이것은 교회를 개척하는 사람으로 하여금 어떤 어려움에서도 좌절하지 않고 도중에 포기하는 일이 없도록 해 주는 힘이 된다. 그것은 교회를 개척하는 일이 하나님의 가장 고상하고 시급한 뜻이라는 확신이 되기 대문이다.
목회자가 새로운 교회를 세운다는 것은 하나님의 특별한 축복이다. 주님께서는 이 세상에 교회 없는 곳에 교회를 세우시기 위해 12사도를 세우셨다. 즉 주님께서는 사도들이 해야 할 가장 우선되는 사명은 교회를 개척하는 일이라는 것을 분명히 말씀하셨다. 주님께서는 사도들에게 “너희는 온 천하에 다니며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하라”(막 16:15)고 하셨다. 이 말씀은 주님께서 사도들에게 아무 제한도 없이 이 세상의 모든 국민들 사이에 복음을 전파하므로 써 그리스도의 나라 즉 교회를 개척하라는 말씀인 것이다.
따라서 바울은 자기의 사도직을 증명하기 위해서 자기는 어느 한 도시를 그리스도께 인도하는 것이 아니라, 복음을 온 세상에 두루 전파하였고 다른 사람이 놓은 터 위에 교회를 세우지 않고 주님의 이름을 듣지 못한 곳에 교회를 세우노라 하였다.(롬 15:19-20)
사도라는 말은 원래 ‘보냄을 받은 자’라는 뜻이다. 교회의 사역 자들은 주께서 자기의 사자들로 파견 받은 사람들이기 때문에 교회에 파견된 사람들이 ‘사도’라 부름을 받은 것은 당연하다. 그리고 그들은 그리스도를 모르는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고 그들을 모아 하나님을 섬기게 하는 교회를 세우는 것이 였다. 바울은 사도들의 사명이 무엇인가를 세상이 확실히 아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일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열두 제자 이외에 바울이 첨가한 사람들도 특별한 칭호를 주어서 다른 사람들과 구별할 필요를 느꼈다. 그래서 바울은 다른 곳에서 “사도들에게 유명이 여김을 받았던” 사람들이라고 했는데 그들은 ‘안드로니고’와 ‘유니아’였다.(롬 16:7) 그러나 사도들을 엄격히 구별하여 말하고자 했을 때에는 주님의 명령을 받아 어디서든지 교회를 새롭게 개척하는 열두 제자들에게만 사도라는 말을 적용했다. 또 이것이 성경의 일반적인 용법이다. (마 10:1) 그러므로 교회를 개척하는 목회자들은 각각 그에게 맡겨진 교회를 다스린다는 점을 제외하면 사도들과 똑같은 성격을 가진 하나님의 종들이라 할 수 있다.
2. 최초의 한국의 교회 개척 현재 한국의 교회는 전 세계 교회의 모범이 되고 희망이 되였다. 이와 같이 되기까지 한국 교회를 위한 하나님의 특별한 은혜가 있었으며, 교회를 위해 죽도록 충성한 하나님의 종들이 있었다. 알렌과 언더우드 박사가 1884년 한국에서 선교를 시작한 이래 첫 개심자를 얻은 것은 2년 후였다. 어느 통계에 의하면 한국 교회는 매년 13%-15%씩 증가하는데 이것은 인구 증가율 2%보다 600%-700% 앞서는 것이다. 지난 70년대 중반부터 한국에는 연간 4,000개 이상의 교회가 새로 설립이 되였다. 그것은 매일 10개의 교회가 설립되는 것을 말한다. 그렇게 해서 선교 100주년이 넘은 지금 4,000만 인구의 1/4이 기독교 신자라는 말을 서슴없이 할 수 있게 되였다.
초창기 한국 교회의 부흥은 네비우스 방법에 힘입은바 크다. 1890년 한국에 서 활동하던 선교사들은 중국 지프(芝栗)에서 선교 활동을 하고 있는 John Nevice 목사 부부를 초청하여 두 주간 동안 함께 지내면서 장차 한국 교회의 선교에 지침이 될 만한 선교 방침을 세웠다. 그것은 신자는 누구든지 자기가 도전 받는 곳에 살면서 그리스도를 위한 사역 자가 되어야 하고 자기 생업에 종사하면서 이웃에게 그리스도를 전해야 하며 교회를 개척 설립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 선교 정책은 대단한 효과를 거두었다. 어떤 면에서 근대의 전도나 선교 정책도 이 정책에 유사한 점이 많다. 한국의 교회는 선교사들로부터 독립되어 전도를 하면서 비약적인 발전을 했는데 급속한 도시의 발전과 함께, 그 지역에 세워진 교회들이 그 지역을 담당하여 복음 전도에 노력했기 때문이다.
풀러 신학 대학의 피터 와그너 막사는 “교회가 개척 설립되고 성장해야 한다는 것은 하나님의 거룩하신 뜻이며, 죄인을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가시적인 사랑이다.”라고 말했다. 주님은 마태복음 28:18-20에서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 날까지 너희와 함께 있으리라”하셨고, 누가복음 19: 1에서도 “인자의 온 것은 잊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려 함이라”하셨으며, 요한 복음 3:16에서는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 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하셨다.
3. 교회에 대한 신학적 이해 하나님의 교회는 말씀 위에 세워지고, 사도적 신앙 고백 위에 세워져야 하는 것이 교회 개척의 신학적 대 전제다. 이것은 이 세상에 세워진 수많은 교회들 가운데 상당수가 하나님의 교회의 탈을 쓴 이리의 집이며, 사단의 거처이기 때문이다. 교회를 개척하는 사람들이 철저한 복음적 신학에 입각한 목회 신학과 교회 운영을 해야 한다. 오늘 날 많은 교회가 처음에 세워질 때 잘못된 신학과 인간적인 이상(理想)이나 성취 욕으로 말미암아 교회가 아닌 종교 기업으로 세인(世人)의 조롱을 받게 되었다. 교회의 거룩함과 신성함을 잃어버린 것이다. 교회는 장사꾼들이 장사하는 시장이 아니며, 주님이 말씀하신 데로 강도의 굴혈이 아닌 것이다. 그러므로 본 글에서는 개혁 주의 신학에 입각한 교회론을 염두에 두고 그 교회론에 입각한 실천적 사항을 논하고자 한다. 교회가 설립되고 성장해야 한다는 것은 하나님의 거룩하신 뜻이며 죄인을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가시적인 사랑이다.
교회를 개척 설립하고자 하는 사람이 어찌 사단의 집을 세울 수가 있을 것이며, 주님께서 경계에 경계를 거듭하신 강도의 소굴을 만들 수 있을 것인가? 그러므로 나는 여기서 칼뱅의 교회관을 소개하여 신학적으로 바른 교회를 세워야 함을 강조하고자 한다. 이 점에 있어 이 글을 보시는 다른 교파의 목회자들의 양해를 구하는 바이다.
칼뱅의 교회관 (칼뱅의 기독교 강요(김종흡.신목윤.이종성.한철하 공동 번역. 하권 1장 이하) 모든 경건한 자의 어머니인 교회 : 우리는 이 교회와 연합되어 있다. 1). 교회의 필요성 우리는 복음을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는 우리의 그리스도가 되시고 그가 가져오신 구원과 영원한 부에 참여하게 되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가 믿음으로 살고 하나님의 선하신 목적지에 가기 위해 외적인 도움이 필요하기 때문에 필요한 보조 수단을 마련해 주셨다. 그리고 하나님은 복음 전파가 활발히 전개되도록 이 보물을 교회에 마끼 셨다. 목사와 교사들을 임명하시고(엡 4:11), 그들의 입을 통하여 자기 백성을 가르치게 하셨으며 그들에게 권위를 주시고 신앙의 거룩한 일치와 올바른 질서를 위해 도움이 될 만한 것들을 모두 마끼 셨다. 하나님이 이렇게 교회를 세상에 세우신 것은 하나님의 자녀들을 품속에 모아 그들이 어린아이일 동안 교회의 도움과 봉사로 양육을 받고 보호와 지도를 받아 성인이 되고 믿음의 목적지에 도달하게 하려는 것이다.(막 10:9 참조)라는 말씀에 따라 하나님이 아버지가 되는 사람은 교회가 어머니가 되어야 하는 것이다. 이는 하늘에 있는 새 예루살렘의 자녀들이라고 말씀하신 바와 같다. “오직 위에 있는 예루살렘은 자유 자니 곧 우리 어머니라[갈 4:26]”
2). 신자의 어머니로서의 교회 우리는 지금 가견적 교회에 대하여 논하면서 교회를 ‘어머니’라고 부르는 단순한 칭호의 중요성부터 배워야 한다. 이는 이 어머니가 우리를 잉태하고 낳았으며, 젖을 먹이고 우리가 이 육신을 벗고 천사와 같이 될 때까지(마 22:30), 우리를 보호하고 지도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생명으로 들어 갈 길이 없기 때문이다. 연약한 우리가 일생 동안 교회에서 배우는 자로 지내는 동안 교회에서 떠나는 것을 허락 받을 수는 없다. 뿐만 아니라, 교회를 떠나서는 죄의 용서를 받을 수 없고, 구원을 얻을 수 없는데 이것은 이사야가 “이는 남는 자가 예루살렘에서 나오며 피하는 자가 시온에서 나올 것임이라 만군의 여호와의 열심히 이를 이루시리이다(사 37:32)”라고 말하고, 요엘이 “누구든지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니 이는 나 여호와의 말대로 시온 산과 예루살렘에서 피할 자가 있을 것임이요 남은 자 중에 나 여호와의 부름을 받을 자가 있을 것임이니라(욜 2:32)”라고 말한 말씀에서 분명히 밝혀진 것이다. 에스겔도 그들과 같은 뜻으로 하늘 생명에 들어가지 못하도록 하나님에게 거절을 당한 자들은 하나님 백성의 호적에 기록되지 못한다고 했다. “그 선지자들이 허탄한 묵시를 보며 거짓 것을 점쳤으니 내 손이 그들을 쳐서 내 백성의 공회에 들어오지 못하게 하며 이스라엘 족속의 호적에도 기록되지 못하게 하며 이스라엘 땅에도 들어가지 못하게 하리니 너희가 나를 여호와 인줄 알리라(겔 13:9)” 그와 반대로 진정한 경건 생활을 촉진하고자 하는 사람들은 예루살렘 시민으로 등록된다고 했다 (참조 사 56:5]; 시 87:6). 그리고 시편의 다른 곳에서는 ”여호와여 주의 백성에게 베푸시는 은혜로 나를 기억하시며 주의 구원으로 나를 권고 하사 나로 주의 택하신 자의 형통함을 보고 주의 나라의 기쁨으로 즐거워하게 하시며 주의 기업과 함께 자랑하게 하소서(시 106:4-5)“라고 말했다. 이런 것들은 하나님의 부성 적인 은총과 영적 생명의 특별한 증거를 그 양떼들에게 국한시키는 것이다. 따라서 교회를 떠나서는 언제나 비참한 지경에 이르고 만다.
3). 교회와 信經은 어떤 관계가 있는가? 신경에서 우리가 교회를 ‘믿는다’라는 말은 보이는 교회뿐 아니라, 하나님의 선택을 받은 모든 사람들 - 죽은 신자들까지-을 의미한다. ‘믿는다’는 말은 하나님의 자녀와 불신자들, 하나님의 양떼와 사나운 짐승들 을 구별하기 위해서다. 이와 같이 구별을 명백히 하는 것은 그리스도의 은혜를 소멸시키기 위해 온갖 수단을 동원하는 마귀로부터 우리들을 보호하시기 위함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은밀한 선택과 내적 부르심을 생각해야 한다. 이는 하나님이 “그러나 하나님의 견고한 터는 섰으니 인침이 있어 일렀으되 주께서 자기 백성을 아신다 하며 또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마다 불의에서 떠날지어다 하였느니라(딤후 2:19)”하신 말씀에 잘 나타나 있다. 또한 바울의 말과 같이 그들은 하나님이 모두 인을 치셨기 때문이다. 그들은 거대한 군중 속에 보잘 것이 없는 자로 존재하는 것 같지만 하나님은 그들의 모든 것을 잘 알고 계신다. 그러므로 교회의 기초는 하나님의 선택이다. 우리가 교회의 연합을 생각할 때 이 교회에 접붙임을 당하였다는 것을 확실히 인식해야 한다. 즉 우리의 머리이신 그리스도 아래에서 다른 모든 지체들과 연합되지 않는다면 우리에게 장차 기업을 받으리라는 소망을 가질 수 없다.
교회를 보편적이라고 부르는 것은 그리스도가 나누어 지지 아니하는 한(엡 1:13;고전 1:13. 참조)하신 말씀들이 교회가 둘이나 셋이 있을 수 없음을 말씀하신 것이다. 모든 선택된 사람들은 그리스도 안에서 서로 연합이 되었음으로 (엡 1:22-23]” 참조) 한 머리에 의존하여 서로 한 몸이 되고 한 몸에 달린 제자들 같이 (롬 12:5]; 고전 10:17, 12:12,27)” 서로 단단히 결합이 된다. 우리가 참으로 하나가 되는 것은 한 믿음과 소망과 사랑으로. 또 같은 하나님의 영 안에서 함께 살기 때문이다. 우리를 부르심은 우리 모두 영생을 받게 하시기 위함이시고, 하나님과 한 그리스도께 참여하게 하심이다.(엡 4:16, 참조)
우리 주변에서 어떤 경우에 교회가 사단의 시험을 받아 없어져 버린 것 같을지라도, 그리스도의 죽음의 열매를 반드시 살아 있어서 다시 힘있게 역사 한다는 것을 엘리야는 분명히 말했다.(왕상 19:18)
4). 성도가 서로 교통함 신경의 이 조항들은 외면적 교회에 적용된다. 즉 우리가 각각 하나님의 자녀들과 형제적 일치를 유지하며, 당연히 가져야 할 권리를 교회에 부여하고 두말 할 필요 없이 양떼의 일원으로서 행동을 해야 한다. 따라서 ‘성도가 서로 교통한다’라고 첨가하였다. 이 구절은 성도가 하나님에게 받은 은혜를 서로 나눈다는 점을 강조한다. 이것은 결코 교회의 분리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누가는 “믿는 무리가 한 마음과 한 뜻이 되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제 재물을 조금이라도 제 것이라 하는 이가 하나도 없더라[행 4:32]”라고 기록하고, 바울은 “몸이 하나이요 성령이 하나이니 이와 같이 너희가 부르심의 한 소망 안에서 부르심을 입었느니라[엡 4:4]”라고 말하여, 각 사람의 사유 재산권이 허락이 되었으나 사랑의 공동체를 이루었다는 것을 강조했다. 하나님은 모든 신자의 아버지 시며 그리스도는 모든 신자의 머리가 되신다. 성도들은 이것을 확신하여 그들이 각각 받은 은혜를 서로 나누어야 할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이 일이 우리들에게 어떤 유익이 되는지 탐구해야 한다. 우리가 교회를 믿는 증거는 우리 스스로 교회의 지체가 되었음을 확신하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흔들리지 않는 확고한 믿음을 가질 때 교회는 흔들릴 수 없는 것이며 넘어질 수가 없다.
그리고 이 믿음은 그리스도의 구원에 근거를 가지며 따라서 온 세계의 조직이 무너지더라도 교회는 흔들리거나 무너질 수 없다. 그 이유는 교회가 하나님의 선택에 의해 존립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교회는 영원 불변하시는 그리스도께 연결이 되어서 그리스도께서 자기의 지체가 찍기 기를 허락하시지 않는 것같이 신자들이 자기에게 멀어지는 것도 허락하시지 않기 때문이다. 그리고 우리가 교회의 품속에 있는 한 항상 진리의 빛 가운데 있음을 확신한다. 끝으로 우리에게 적용되는 하나님의 약속이 있다. “누구든지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니 이는 나 여호와의 말대로 시온 산과 예루살렘에서 피할 자가 있을 것임이요 남은 자 중에 나 여호와의 부름을 받을 자가 있을 것임이니라[욜 2:32]” “오직 시온 산에서 피할 자가 있으리니 그 산이 거룩할 것이요 야곱 족속은 자기 기업을 누릴 것이며[옵 1:17]”.라고 하셨다.
교회에의 참여는 힘이 강하여 우리를 하나님의 공동체 안에 머물게 한다. “서로 교통함”이라는 말 지체에 풍성한 위로가 있다. 주님께서 그 지체들에게 주시는 모든 것과 우리의 것은 우리들의 소유가 된다고 확신할 때 우리는 더욱 큰 소망을 가질 수 있게 된다. 그러나 이렇게 교회의 연합을 받아들이기 위해 꼭 우리들의 손으로 만지고 눈으로 보아야 하는 것은 아니다. 우리는 우리들의 이해에 미치지 못하는 교회를 꼭 눈으로 볼 수 없다고 해도 교회가 신앙의 영역에 속한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한다. 그리고 우리가 보이지 않는 교회를 인정한다고 우리 믿음에 손상이 가는 것은 아니다. 여기서 우리는 버림을 받은 자와 선택을 받은 자를 구별하라는 주님의 명령을 받은 것은 아니다. 그것은 우리의 일이 아니라 하나님의 일이다. 우리가 여기서 할 일은 하나님의 자비와 성령의 역사로 그리스도의 교제에 들어 간 사람들은 모두 하나님의 소유가 되었으며, 우리도 그 일원이 될 때에, 그와 같은 위대한 은혜를 나누어 받게 되었다는 것을 확신하는 것이다.
5). 교회를 통한 교육, 그 가치와 의무 (하나님을 대변하는 사역 자들을 멸시하지 말라) 바울의 글에 그리스도는 “만물을 충만케 하려고” “혹은 사도로, 혹은 선지자로, 혹은 복음 전하는 자로, 혹은 목사와 교사로 주셨으니 이는 성도를 온전케 하며 봉사의 일을 하게 하며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려 하심이라 우리가 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어 온전한 사람을 이루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 한데까지 이르리니[엡 4:11-13]”라고 하셨다. 이것을 보면 하나님은 일순간에 그 백성들을 완전하게 만드실 수 있으시나 그들이 교회에서 교육을 받음으로 장성 하시를 바라신다. 즉 하늘 교리를 전파하라고 목자들에게 명령을 하신 것이다. 그리고 모든 사람을 동일한 규정 아래 두셔서 모든 사람이 온유하게 배우겠다는 정신으로 이 일을 위해 임명된 교사들의 지배를 받게 하셨다. 이사야는 이미 오래 전에 그리스도의 나라를 구별하는 표지를 말했는데 “여호와께서 또 가라사대 내가 그들과 세운 나의 언약이 이러하니 곧 네 위에 있는 나의 신과 네 입에 둔 나의 말이 이제부터 영영토록 네 입에서와 네 후손의 입에서와 네 후손의 입에서 떠나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사 59:21]”라고 하신 말씀이 그 말씀이다. 그리고 그의 백성들이 점이나, 요술이나, 초혼 술에 기타 다른 미신에 빠지지는 것을 금하신 후에 “그 아들이나 딸을 불 가운데로 지나게 하는 자나 복술 자나 길흉을 말하는 자나 요술을 하는 자나 무당이나[신 18:10] 진언 자나 신접 자나 박수나 초혼 자를 너의 중에 용납하지 말라[신 18:11]; 너희는 신 접한 자와 박수를 믿지 말며 그들을 추종하여 스스로 더럽히지 말라 나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니라[레 19:31]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의 중 네 형제 중에서 나와 같은 선지자 하나를 너를 위하여 일으키시리니 너희는 그를 들을지니라[신 18:15]“ 참조) 그들에게 완전히 만족할 만한 것을 주시겠다고 하셨는데 그것이 바로 예언자들인 것이다. ”대저 제사장의 입술은 지식을 지켜야 하겠고 사람들이 그 입에서 율법을 구하게 되어야 할 것이니 제사장은 만군의 여호와의 사자가 됨이어 늘[말 2:7]“ 참조) 하나님은 옛날에 천사들을 통해 이 보배를 마끼지 아니하시고 땅에 교사들을 세워서 천사들의 직책을 충실히 수행하게 하심과 같이 지금도 사람을 사용하셔서 우리를 가르치시고자 하신다. 옛날에 율법만으로 충분치 못하다고 생각을 하셔서 제사장들의 입을 통해 배우도록 하신 것과 같이 (말 2:8 참조) 지금도 우리가 율법을 정독하기를 원하시고 우리들을 도울 교사들을 임명하셨다.
우리가 목사의 말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들을 때 이것을 아주 좋은 수단으로 삼아 우리들의 순종을 시험하신다. 또 한편으로는 우리들의 연약함을 고려하셔서 친히 우뢰같이 말씀하시면 우리가 도망을 할 것임으로 사람인 해석 자들을 통해 말씀하시므로 우리를 자신에게로 이끄신다.
4. 교회 개척자 자신의 준비 1). 목회 신학을 확립하라. 교회를 개척하고자 하는 사람은 여러 가지 유형이 있을 것이다. 어떤 이들은 신학교를 졸업하였으나 청빙 하는 교회가 없어 할 수 없이 교회를 개척하는 경우가 있을 것이며, 아에 처음부터 교회 개척에 사명을 가져 개척을 하는 사람도 있다. 또 어떤 사람은 안정된 교회의 부 교역자로 하나님을 섬기다 단독 목회의 열망을 가져 교회를 개척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교육 기관의 특수 목회를 했던 사람, 선교사로 파송되었다 돌아 온 목회자들------ 이렇게 교회를 개척하고자 하는 목회자의 유형은 다양하다. 그러나 어떤 동기에서 교회를 개척하려 하던 한가지 분명한 것은 하나님의 종으로서의 목회 신학이 확립되어야 한다. 목회 신학이 확립되지 아니하면 목회와 설교, 교회 운영등이 일괄성이 없게 된다. 나는 모 교파 신학교를 나와 목사가 된 사람이 교회가 잘 되어야 한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교회의 교파를 달리 하고 교회를 시작하는 것을 보았다. 이런 행위는 목사 자신과 성도들에게도 혼란스러움을 가져 온다. 그러므로 좀 지루한 감이 들지만 목회 신학에 대해 언굽을 하는 것이 좋을 것같다.
(1). 목회 신학의 의미와 목적 존 데이슨은 ’작은 교회의 목사들‘이라는 책에서 “목회 신학 (Pastoral Theology)”이라는 말은 목회자에 대한 신학적 제 견해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이런 관점에서의 목회 신학은 목회 후보생들의 신학적 견해를 검토할 때에, 매우 중요히 취급된 것이고, 여기서의 목회 신학이라는 것은 목회자가 주 예수 그리스도를 위하여 바치는 전 생애와 직무에 대한 마음가짐을 말한다. “목회”라 말은 한 지 교회를 담임한 사람의 일에만 특수하게 속하는 임무를 수행하여 나아가는 목회자에 관계되는 말이다. 그리고 “신학”이라는 말은 주로 하나님과 그의 말씀에 관계되는 말이다. 그래서 “목회 신학”은 목회자가 목회 사역을 수행하여 나가는 동안에 내내 어떻게 처신해야 할 것인가를 가르치는 것이 된다.“라고 했다. (2). 목회자란 무엇인가? “목회자”라는 말은 대부분의 교회에서 한 지 교회 회중의 우두머리를 가르치는 말로 쓰여진다. 영어의 “Pastor”는 본래 문자 적으로 “목자” 또는 “목동”을 의미하는 헬라어 포이멘을 라틴어로 본역한데서 유래된 말이다. 헬라어 포임네는 “양”을; 포임니온은 “양 떼”를; 그리고 포이미아노는 “먹이다, 떼를 돌보다, 양을 지키다”를 각각 의미한다. 그러므로 성도들을 돌보는 사람을 목사 혹은 목회자라고 부르는 것은 적합한 일이다. 이것은 신자들의 일반적인 명칭이 양들이기 때문이다.(시 95:7; 요 10:3-5, 11,14,16; 히 13:20; 벧전 5:2) 그리고 동일한 성직을 가르치는 다른 용어가 있는데 그것은 헬라어 “에피스코프”라는 말이다. 이 말은 “감독”이라고 번역이 되고, 또 다른 말은 “프레스비테로스”라는 말로 이 말은 “장로”라는 말로 번역이 된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자세히 살펴보면 목사와 장로, 감독은 동일한 한 직분을 가르치는 말로 쓰여졌다. 사도행전 20:17-18에서 바울이 에베소에 사람을 보내어 “장로들”을 청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그런데 이 장로들을 28절에서는 감독자들이라고 부르고 있고 야고보서 1:1에서도 이 명칭을 사용하여 “그들은 하나님이 자기의 양들을 치게 하신 자”라고 부르고 있다. 칼뱅은 “교회를 다스리는 사람들을 ‘감독’ ‘장로’ ‘목사’ 또는 ‘사역 자’라고 부르는 것은 성경에 이 말씀들을 구별 없이 사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말씀을 전하는 사람을 성경에서는 모두 ‘감독’이라고 부른다.
(3). 목사의 소명이란 무엇인가. 웹스터사전에서는 이 말에 대한 해석으로 무려 16가지의 다른 해석들을 나열해 놓고 있다. 현재 우리가 관여하고 있는 유일한 의미는 “어떤 특수한 임무, 혹은 직업으로서의 소환(召喚)”이다. 그러나 이런 사전적인 소명의 정의를 내리기 보다는 성서적인 정의를 내리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목회자의 소명”이라는 말은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전파하라는 명령과 그 일에 관계되는 여타의 임무를 부여받았다는 것을 의미한다. 신구약 성경에서는 이런 사람들을 따로 구별하여 세워 사도, 선지자. 제사장, 사사, 목사들이라고 말했다. 히브리 기자는 히브리서 5:4에서 “이 존귀는 아무나 스스로 취하지 못하고 오직 아론과 같이 하나님의 부르심을 입은 자라야 할 것이니라”하였다.
(4). 소명에 대한 잘못된 인식 어떤 사람은 하나님의 소명에 대한 잘못된 생각을 가지고 있다. 그것은 대게 다음과 같은 것들이다. ①. 부모의 압력. 때로 어떤 부모는 자식이 하나님의 사역 자로 일하기를 바라는 경우가 있다. 만일 그런 단순한 부모님의 바램이 소명 인줄 알고 다른 부르심에 대한 증거가 없으면 아주 잘못될 수가 있다. 물른 부모님이 자식을 하나님께 드림으로 하나님의 종이 된 경우도 있다.(삼상 1:20-28) 그럴 경우에도 본인에게 하나님의 부르심에 대한 확신이 있어야 할 것이다. ②. 개인적인 야망. 목회자로서 세상을 성공하겠다는 야망은 결코 소명이 아니다. 그리고 목회에 대한 잘못된 인식으로 목사는 늘 집에 있으며 편한 직업이기 때문에 목회자가 되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하는 것은 결코 소명일 수 없다. ③. 봉사 정신과 희생 정신. 이웃을 위해 착함 마음을 가지고 희생하고 봉사하고자 하여 목회자가 되기를 바라는 경우도 소명을 받았다고 할 수 없다. 목회자는 이웃을 위해 헌신할 수는 있지만, 사회 사업가나 자선 사업가는 결코 아닌 것이다.
(5). 참된 소명 다음에 열거하는 이유들 가운데 하나, 혹은 전부는 한 개인의 목회 사역에 분명한 소명이 될 수 있을 것이다. ①. 목회 사역은 영적 사역이다. 영적이라는 세상 사람들에게 생소한 이 말은 목회자들에게 대단히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즉 하나님과의 관계에 있어서 인간의 내적이며, 불 가견적이고, 영원한 자질을 가르치는 말이기 때문이다. 목회는 적어도 이 수준에 올라 있는 사람에게 온전한 헌신적인 봉사를 요구하는 유일의 영적 소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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