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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MF보다 더 어려울 때 교회도 살고 목사도 사는 방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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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MF보다 더 어려울 때 교회도 살고 목사도 사는 방법   목회자에게 두 개의 직업을 허용하라
한국교회가 회복되기 위해선 목회자에게 두 개의 직업을 허용해야 합니다. ‘한국교회의 회복과 목회자에게 두 개의 직업을 허용하는 것과 무슨 상관이 있는가?’라고 질문을 하실 분들이 있을 줄 압니다. 그러나 한국교회가 진정 새로워지고 회복되기 위해선 목회자에게 두 개의 직업을 허용해야 합니다. 교회에 대한 목회자의 의존도가 높아질수록 부패와 타락이 일어나기 때문입니다. 한국교회의 부패와 타락에는 목회자의 잘못이 큽니다. 그러나 동시에 교인들의 잘못도 적지 않습니다. 한국교회가 부패하고 타락했다는 것은 목회자만 잘못했다는 것이 아닙니다. 교인들 역시 잘못했기에 한국교회는 부패하고 타락했습니다. 그래서 비신자들은 총체적으로 ‘한국교회가 타락했다’라고 합니다. 그 한국교회는 바로 목회자를 포함하여 교인들입니다.

고정관념과 이중 잣대를 깨야한다.
목회자가 잘못할 때 해결방안이 있습니다. 목회자들이 잘못하는 것을 지적하고 알려주면 됩니다. 충분히 가능한 일입니다. 교인들의 수에 비해 목회자의 수는 훨씬 적기 때문에 세미나, 책, 교육을 통해서 목회자의 잘못을 지적하고 고치도록 하면 됩니다. 그러나 교인들이 잘못된 생각과 행동은 고치기가 어렵습니다. 교인들의 숫자가 목회자들에 비해 훨씬 많기 때문에 잘못을 지적하기도 훨씬 어렵습니다. 거기다가 교인들의 고정관념이나 이중 잣대를 깬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깝습니다. 바위보다 단단하기 때문입니다. 고정관념이나 이중 잣대는 눈에 보이는 것도 아닐 뿐만 아니라 고쳐야 한다는 필요성을 느끼는 교인들도 거의 없기 때문에 더더욱 어렵습니다. 한국교회가 거듭나기 위해선 목회자의 개혁도 중요하지만 절대 다수인 교인들의 개혁은 더욱 중요합니다. 교인들이 갖고 있는 고정관념이나 이중 잣대를 깨지 않는 한 한국교회는 희망이 없을 것입니다. 그럼 지금부터 한국교회 교인들이 갖는 고정관념과 이중 잣대를 깨는 방법을 제시하면서 글을 시작하려고 합니다.   

내가 하면 로맨스 남이 하면 불륜
주위에서 흔히 들을 수 있는 말 중에 ‘내가 하면 로맨스고 남이 하면 불륜이다’는 말이 있습니다. 이 말처럼 이기적이고 자기중심적인 말은 없습니다. 누가 하던 로맨스는 로맨스이고, 누가 하던 불륜은 불륜이어야 하는데, 자신이 하면 로맨스가 되고 남이 하면 불륜이 된다는 말은 철저한 이중 잣대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입증하는 것입니다.  변치 않는 진리를 추구하는 교회역시 예외는 아닙니다. 교인들은 목회자의 책임과 권한에 대한 견해가 일관적이지 않습니다. 책임을 지적할 때는 확대하려고 하고, 권한을 이야기할 때는 축소하려고 합니다. 이렇듯 교인들은 항상 이중 잣대를 가지고 목회자를 평가합니다. 그리고 그 이중 잣대는 항상 자기중심적입니다. 예를 들어볼까요?

극단적인 이중 잣대의 사례
극단적인 예입니다. 어느 저녁 퇴근을 하는 남자가 있었습니다. 그 남자는 막걸리라도 한잔 걸친 기분 좋게 노래를 흥얼거리며 집을 향하고 있었습니다. 동네에서 그를 알던 사람들은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오늘 기분 좋은 일이 있나봐?”라고 하면서 반겨줍니다. 그 사람은 교회에 열심히 출석하는 집사였습니다. 똑같은 상황입니다. 다른 한 사람 역시 술을 한잔 마시고 기분 좋게 집으로 돌아가고 있었습니다. 술을 마신 탓인지 얼굴이 붉어져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를 보는 사람들의 표정은 매우 놀라다 못해 상기되어 있었습니다. “아니 저 목사 미친것 아냐? 술을 마시고 거리를 활보하네. 세상 말세야 말세!”

교인들의 무서운 이중 잣대
목회자의 부인인 사모에 대한 이중 잣대입니다. 교회 일에 열심인 사모가 있습니다. 교회의 모든 일에 나와서 솔선수범합니다. 그러자 사모를 시기하는 교인들이 말합니다. “사모가 너무 설쳐대서 교회 꼴이 말이 아니야. 집에서 목사님이나 잘 보필하지 자기가 뭔데 나와서 설치고 다녀. 자기가 교회의 주인인줄 아는가봐?” 반면 교회 일에는 별로 나서지 않고 가정과 목사님만 보필하는 사모가 있습니다. 그러자 사모님을 시기하는 교인들이 말합니다. “다른 교회 사모들은 열심인데 어떻게 담임목사 사모가 코빽이도 안 보이는 거야? 그러니까 교회가 요 모양 요 꼴이지” 직업을 가진 사모에 대한 이중 잣대도 있습니다. 대학교수, 교사, 어린이집 원장, 의사의 직업을 가진 사모에게는 “우리 사모님이 최고야! 우리 사모님이 너무 자랑스러워”라고 말합니다. 점심시간에 식당에서 파트타임으로 아이들의 학원비를 버는 사모가 있었습니다. 그러자 교인들이 말합니다. “사모가 아주 돈 독(毒)이 올라서 별 짓을 다하는구먼. 저런 여자가 우리교회 사모라는 게 정말 창피해”라고 말합니다. 목회자가 좋은 차를 타면 ‘교인들의 피땀 어린 헌금으로 좋은 차를 타고 다닌다’라고 말하고 싸구려 중고차를 타고 다니면 ‘지지리 궁상이다. 허구한 날 예수님을 잘 믿으면 복 받는다고 하더니 저 꼴이 뭐야?’라고 말합니다. 이러지도 못하고 저러지도 못하는 것이 바로 목회자와 목회자 가정의 실상입니다. 너무 과장됐다고 생각하십니까? 그러나 사실입니다. 지금 한국교회 내에서 자행되고 있는 실제사례를 소개한 것입니다. 이렇듯 교인들은 목회자에 대해 이중 잣대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일부의 목회자를 제외하고는 목회자 가정의 삶이 곤고한 것입니다. 앞으로 이런 어려움은 점점 가속화 될 것입니다.

목회자의 직업을 허용해야 하는 이유
얼마 전에 250여명의 성도들로 구성된 어느 교회에서 담임목사 초빙을 위해 광고를 했는데 지원한 목사님들이 250명이상이었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이는 목회자 수급불균형이 이미 심각한 수준에 이르렀다는 것을 보여주는 단적인 예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미 우리나라에는 목사안수를 받았으면서도 목회를 하지 못하는 분들이 많이 있습니다. 목회를 하지 못하는 이유가 다양하겠지만 그 중 큰 이유는 교회를 개척하려고 해도 개척자금이 너무 많이 든다는 것입니다. 또 가까스로 개척을 하였다 할지라도 개척교회가 담임목사에게 생계비를 챙겨주어야 할 여력이 없는 교회가 대부분입니다. 대부분의 성도들은 목사는 헌신한 분들이기 때문에 희생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하다고 생각합니다. 한두 달 그렇게 희생하는 것은 가능하겠지만 세월이 흐르다보면 목회자도 지치고 그 가족도 모두 지치게 됩니다. 물가는 오르고 생활비는 점점 많이 들어가는 현상들이 나타나면서 목회자의 가정은 몇 배의 어려움이 있습니다. 그럼에도 어느 교단 헌법에는 목사는 세상에서 직업을 가지면 안 된다고 명문화되어 있습니다. 아직도 다수의 교인들도 목사님, 심지어 사모님까지도 세상에서 일하면 안 된다는 의식을 지금까지 가지고 있습니다. 이제는 뭔가 바뀌어야 할 시기라고 생각합니다. 그럼 어떻게 바뀌어야 할까요? 산적한 한국교회의 문제, 목회자의 문제, 목회자 생활의 문제, 부정부패의 문제, 권위주의적인 문제, 교인들의 이중 잣대 문제 등을 어떻게 해결해야 할까요? 저는 해법이 먼 곳에 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전무후무하고 아직 누구도 제시한 적이 없지만 저는 한국교회에 대한 해법이 그리 어렵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은 바로 목회자도 목회 이외의 직업을 갖는 것입니다. 목회 외에 다른 직업을 갖는 것을 이해하는 것입니다. 특히 교인들은 전통적인 생각을 버리고 목회자의 직업을 인정해주어야 합니다. 그것이 목회자도 살고 교회도 사는 길입니다. 이미 미국의 경우, 1990년도부터 신학대학원 안에 소위 겸직사역센터(Bivocational ministry center)가 있어서 세상에서 일하면서 목회하기를 원하는 신학생들을 격려하고 준비시키고 있습니다. 평소에는 택시운전기사로, 자동차 기술자로, 목수로, 선생님으로 일하면서 주말에는 교회에서 담임목사로 봉사하는 사람들을 위한 연구기관입니다. 신학생들로 하여금 많은 호응을 얻었고 실제로 많은 열매도 이는 것을 보았습니다. 특히 담임목사에게 사례비를 지급할 수 없는 작은 규모의 교회는 일하는 목사들을 선호하였습니다. 이것은 미국에서는 별로 이상한 일이 아닙니다. 전임사역자로 부름 받아 교회 사역만하는 분들도 있고 또 세상에서 직업을 가지고 사역하도록 부름을 받는 목회자도 있어야 합니다. 교회사정에 따라 전임 사역을 하는 분들도 있고 세상에서 직업을 가지면서 파트 사역을 하는 목회자가 있어야 합니다. 둘 다 귀하게 인정받아야 합니다. 최소한 세상에서 일하면서 목회하는 사람들을 잘못되었다고 인식하지는 않아야 합니다. 이런 제안을 했다고 분노할 목회자들이 많을 줄 압니다. 인터넷 서평에 별의별 비난과 공격을 가할 분들도 적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전화와 이메일을 통해 혹독한 인신공격을 하실 분들도 있을 것입니다. ‘교회를 무너뜨리는 악한 세력’이라고 공격하실 분들도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이젠 다시 생각해 볼 때가 되었습니다. 역사와 전통의 틀을 깨트릴 필요가 있습니다. 역사와 전통보다 더 귀한 성경이 언급하는 부분이기 때문입니다.

자유로운 목회를 위하여
제가 사역하는 호주 선교단체인 GCN(Go Christian Network)의 목회자들의 대부분은 공식적으로 두 개 이상의 직업을 가지고 있습니다. 대학교수로, 사회복지사로, 상담가로, 목수로, 작가로, 총회 직원으로, 방송국 직원으로, 회계사로, 치과의사로 일하다가 주일이 되면 교회에 가서 담임목사 및 사역자로 사역합니다. 전혀 어색하지도 않고 부담스럽지도 않습니다. 모두들 그런 분위기를 인정하고 받아들입니다. 저는 이런 모습이 바로 성경적 모델이라고 생각합니다. 저 역시 교회에서 월급을 받지 않고 사역할 수 있는 것은 작가로 활동하면서 얻은 수익 때문입니다. 그런 경제적인 수입으로 목회가 훨씬 자유로울 수 있었습니다. 그럼 왜 목회자도 두 개 이상의 직업을 가져야 할까요? 지금부터 자세히 설명하려고 합니다. 전통적인 입장을 가진 분 중에는 동의하지 못하는 분들이 상당히 많겠지만 시대적 변화와 상황을 생각하면서, 아니 더 나아가 한국교회의 개혁과 회복을 위해 숙고하시기 바랍니다.

목회자도 세상을 알아야 한다.
첫째로, 목회자도 세상을 알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한국교회의 문제는 목회자들이 세상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에서 시작됩니다. 목회자들의 설교가 피상적이고 막연한 이유 역시 세상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찬송가 204장 3절에 보면 ‘세상과 나는 간 곳 없고 구속한 주만 보이도다’라는 가사가 나옵니다. 저는 이 의미를 이해하지만 동의하지는 않습니다. 이런 식의 구별의식이 교회와 세상을 갈라놓습니다. 교회는 거룩하고 세상은 타락한 곳이라는 이분법적 사고는 버려야 합니다. 예수님은 하늘보좌를 버리고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신 것은 치밀한 계획 속에 이루어진 일이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세상을 구원하시겠다는 확연한 의지 아래 이루어진 일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예수님을 이 세상에 보내셔서 구원의 목적을 이루길 원하셨습니다. 하늘에서 마냥 기다리고 바라볼 수는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런 의미를 아셨던 예수님은 십자가를 앞두고 하나님께 이렇게 간절히 기도하셨습니다.
이제 나는 세상을 떠나 이들을 뒤에 두고 아버지께로 갑니다. 거룩하신 아버지, 아버지께서 친히 이들을 돌보아주소서. 아버지께서 내게 주신 모든 사람들을 돌보셔서 아버지와 내가 하나인 것같이 이들도 하나가 되게 하시고 잃어버리지 않게 하소서. 내가 세상에 있는 동안 나는 아버지께서 내게 주신 아버지의 이 모든 식구들을 안전하게 보호하였습니다. 나는 이들을 지켜서 성경의 예언대로 멸망의 자식 외에는 한 사람도 멸망하지 않게 하였습니다. 이제 나는 아버지께로 갑니다. 나는 이들에게 기쁨이 충만하게 하려고 이들과 같이 있는 동안 많은 것을 일러주었습니다. 나는 이들에게 아버지의 말씀을 주었는데 세상은 이들을 미워하였습니다. 마치 내가 세상과 맞지 않은 것과 같이 이들도 세상과 맞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나는 아버지께 이들을 세상 밖으로 데려가시기를 구하지 않고 사단의 세력에서 지켜 주시기를 구합니다. 내가 세상에 속하지 않은 것같이 이들도 더 이상 세상에 속한 사람들이 아닙니다. 아버지의 진리의 말씀으로 이들을 가르치셔서 이들을 순결하고 거룩하게 하소서. 아버지께서 나를 세상에 보내신 것처럼 나도 이들을 세상에 보냈습니다.(요17:11-18 현대어성경)
이 간절한 기도가 예수님의 마음이었다면 예수님의 제자인 우리 역시 세상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세상에 속하지 않았지만, 세상의 유혹이 많을 것이지만, 사탄의 역사가 강하겠지만 그럼에도 세상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예수님의 간절한 마음이었습니다. 지금 한국교회는 세상으로 나아가려고 하지 않습니다. 직업을 위해, 입에 풀칠을 하기 위해 세상으로 나아가는 것은 마지못해 허락하지만 어떻게든 교회 안으로 불러드리려 합니다. 예배를 통해, 기도회를 통해, 셀그룹 모임을 통해 어떻게든 교회 안으로 끌어내려고 합니다. 좋아 보이지만 이것이 한국교회의 사명을 잃게 했고 부패하게 만들었던 원인입니다. 목회자를 지도자로 설정한다고 하면 목회자는 장교로, 평신도는 군인으로 묘사할 수 있겠습니다. 전쟁이 일어났습니다. 나가서 싸워야 합니다. 그런데 장교인 목회자는 진지 안에 숨어있으면서 군인들을 지휘하고 있습니다. 상황이 어떠한지, 어떤 문제가 발생하고 있는지, 어떤 승리방법이 있는지 파악하지도 못하고 진지 안에 숨어있는 목회자의 모습을 그려 볼 수 있습니다. 결과는 백전백패일 것입니다. 목회자도 세상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교회 안에 산적한 일이 너무 많아 어쩔 수 없는 특별한 경우가 아니라면 세상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그래야 세상이 어떤지 알 수 있습니다. 피상적이고 막연한 설교가 예수님님의 기도처럼 구체적이고 현실적이 될 것입니다.

교회업무를 분담해야 한다.
둘째로, 교인들에게 교회의 업무를 분담하기 위함입니다. 목회자들이 가진 잘못된 생각 중에는 ‘교회 일은 목회자가 해야 한다’는 고정관념이 있습니다. 잘못된 생각입니다. 초대교회가 집사를 세운 것은 교회업무를 전담하기 위함이었습니다. 분명히 말씀드리지만 교회업무의 담당자는 평신도인 교인들입니다. 목회자는 교회업무를 하려고 해서도 안 되고 해서도 안 됩니다. 만약 목회자가 교회업무를 전담하려고 한다면 그것은 월권인 동시에 교인들의 사명을 가로채는 악한 행위입니다. 그럼에도 왜 목회자들이 교회업무를 전담할까요? 교회 안에 머물고 있기 때문입니다. 목회자들이 교회 안에 머물다 보니 교회업무를 도적질하게 되는 것입니다. 교회업무를 독점하는 것이 성경적인 지지를 받지 못한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구약의 예를 들어가면서 ‘모든 교회업무는 목회자의 몫’이라고 합리화시킵니다. 그런 목회자를 세상 밖으로 몰아내야 합니다. 평신도들과 똑같이 세상 속으로 나아가게 해야 합니다. 그러다보면 자동적으로 업무가 분담됩니다. 교회업무는 평신도가, 말씀전하는 것과 기도하는 일은 목회자가 담당하게 됩니다. 얼마든지 가능한 이야기입니다. 그때부터 한국교회는 제자리를 찾게 될 것입니다.


헌금을 올바로 사용하는 방법
셋째로, 교회헌금을 올바로 사용하기 위함입니다. 교회헌금이 교회사역을 위해 사용되는 것은 바람직한 일입니다. 그러나 헌금의 대부분이 목회자의 사례비를 위해 사용된다면 교회는 사회와 선교를 위한 사명을 감당하기 어려워집니다. 현재 한국교회 헌금의 50%이상이 목회자 사례비로 지출되고 있는 현실입니다. 엄밀하게 말씀드리며 그 이상입니다. 작은 교회는 작은 교회대로, 중형교회는 중형교회대로, 대형교회는 대형교회대로 헌금이 인건비로 지출되는 비율이 대부분입니다.  비신자들은 항상 교회의 불분명한 헌금사용에 대해 지적합니다. 그럼에도 한국교회는 그들이 납득할만한 해명을 하지 못합니다. 그 이유는 교회사정상 밝히기 어려운 특별사정도 있겠지만, 그것보다는 지나치게 많은 부분이 목회자를 위해 사용되기 때문입니다. 그런 헌금사용을 비신자들은 동의하지 않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목회자의 승용차, 호화주택, 별장, 옷차림을 지적하게 되는 것입니다.

목회자의 특별 혜택을 중단하라
한국교회는 목회자의 차량과 사택에 대해 헌금사용을 중단해야 합니다. 교회업무를 위한 숙소와 차량은 허용할 수 있지만, 목회자의 특혜를 위한 사택과 차량제공은 중단되어야 합니다. 한국경제가 어렵고, 기독교 초창기에 목회자들의 생활자체가 어려웠을 때에 좋은 의미로 사택을 제공했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교회 옆에 사택을 지어놓고 목회자 가족들이 거처할 수 있는 공간을 만들어 준 것은 감사한 일입니다. 저도 목회자의 자녀로 그런 혜택을 받은 것이 사실입니다. 하지만 시대가 달라졌습니다. 이제 더 이상 그런 사택에 머무는 목회자들이 없어졌습니다. 일부 지방에는 존재하지만 이젠 대부분의 목회자들이 교회 옆에 거처하는 것을 기피하는 실정입니다. 이젠 목회자들도 자신이 교회로부터 받은 사례비와 현장에서 수고하여 얻은 수입으로 자신의 사택을 준비해야 합니다. 자동차도 마찬가지입니다. 교인들의 피땀 어린 헌금을 가지고 좋은 자동차를 구입하여 타고 다닌다는 것은 아무리 생각해도 불편한 일입니다. 하나님께 드려진 헌금이 고급 자동차가 된다는 것은 어불성설입니다. 대기업의 CEO가 아니면서 그런 혜택을 받는 것은 납득할 수 없는 현실입니다.  저도 한국에서 목회할 때에도 차량과 사택을 제의받았습니다. 그러나 도저히 불편해서 교회에서 제공하는 차량과 사택을 받지 않았습니다. 제 형편에 맞게 차량을 구입하여 타고 다녔고, 자택도 대출을 받아 구입했습니다. 그랬더니 얼마나 마음이 편하고 좋은지 모르겠더군요. 어려운 형편 속에서 헌금을 드리는 교인들의 헌금으로 꼭 좋은 자동차와 사택을 제공받는 것이 불편했습니다. 물론 생각하기 나름이겠지만 이젠 목회자에게 차량과 사택을 제공하는 특권과 혜택이 한국교회에서 사라져야 할 관행이라고 생각합니다.

7시간 기도보다 세상으로 나가라    목회자도 이제 세상에 나가서 일을 해서 수입을 얻어야 할 때가 되었습니다. 허구한 날 7시간씩 기도한다고 교회 안에 머물지 말아야 합니다. 시간이 남아돈다고 밥값내기 족구로 시간과 재능을 낭비해선 안 됩니다. 세상에 나가서 정당한 일의 대가를 얻어야 합니다. 그러면서 얼마든지 예수님을 소개할 수 있다고 봅니다. 이제 한국교회의 목회자들도 사도바울과 같이 생활비를 충당해야 합니다. 목회자들이 먼저 그렇게 생각해야 하고, 교인들도 그런 상황을 이해하고 받아들여야 합니다. 그렇지 않고는 소형교회나 개척교회의 근본적인 문제를 해결할 수 없을 것입니다. 어느 교회에 부교역자로 나갔던 분이 보내주신 편지의 내용입니다. 가능한 그 분의 심정이 그대로 전달되기 위하여 편집 없이 그대로 올렸습니다. 내용이 좀 길지만 자세히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제 생각이 틀렸나요?
교회 건물이 지어진지 7년 되었다는군요. 재직이 모두 10명 정도(사모님, 아드님, 며느리 포함)인데, 교회재정은 별 어려움이 없다고 합니다. 교회재정은 특별히 사용되는 곳 없이 목사님 사례비 150만원(2달 전 까진 165만원), 나머지는 사택과 교회 공과금 및 운영비 외 저축으로 적금을 들고 있답니다. 선교나 구제는 물론이고 교회학교 예산이란 아예 없습니다. 중고등부 3명(그 중 2명은 집사님 자녀들), 주일학교 10명 정도… 실상 개척한지는 오래 되었지만 현재의 상황입니다. 목사님의 연세가 70세, 사모님이 67세로 모두 인자하신 인상으로 교회 사정을 잘 알지도 못하고 2달 전 부교역자로 사역을 나갔습니다. 성도님들의 얼굴에 기쁨이 없이 교회 분위기가 경직되어 있었습니다. 요즘 같은 세상에 이렇게 사람이 적은 교회를 섬기느라 모두들 힘에 겨워 그러겠구나 싶어 나름대로 교회와 목사님과 성도님들을 섬기고자 기도하며 최선을 다 해 보려했습니다. 그런데 참 많은 생각과 분노로 결국은 2달 만에 인내하지 못하고 사역을 그만두고 말았습니다. 개인적인 인상과는 달리 설교 자리에만 서면 시작부터 끝날 때까지 뚜렷한 이유도 없이 책망과 정죄로 자신의 감정을 억누르지 못하고 화내고 성난 어조로 질책하는 설교에 시간마다 기도가 꽉 막혀버립니다. 권면이나 위로나 소망의 말씀은 전혀 없이 오로지 정죄에서 정죄로 끝나는 설교로 온갖 자신의 감정을 다 토해 냅니다. 거기다 사모님은 절약이라는 이름으로 한겨울 새벽예배 때 ‘전기무릎팩’이란 것을 무릎에 혼자만 올려 덮고서 자신이 따뜻하다고 다른 사람들 추운 것은 생각지도 않고 난로를 피우지 않습니다. 피운 날은 설교 끝나기가 무섭게 꺼버립니다. 어쩔 땐 성도님이 주일 낮 반찬을 해오면 맛있는 것은 사택에 갖다 놔 버리고 아예 내 놓지도 않는 답니다. 성도님들이 섬길 줄을 모른다며(제가 보기엔 전혀 그렇지 않은데) 정작 사모님 자신은 얼마나 인색한지 저는 지금까지 그렇게 인색한 사모님은 처음 보았습니다. 김장철엔 교회재정으로 김장을 하는데 결혼해서 멀리 분가한 아들, 딸 김치까지 담아서 택배로 보내느라 교회 성도님들이 주일마다 먹을 김치까지도 모자란답니다. 그러면 사택에서 다 먹고 쳐진 김치만 갖다 놓는답니다. 교회에서 쓰려고 성도님들이 가져오는 그릇들도 예쁜 것은 모두 사택으로 가져가 버린답니다. 제가 가슴이 너무 아팠던 건 고등부 학생 중 1명이 엄마 없이 노동일을 하시는 아버지와 연년생인 누나와 셋이 살면서 모든 반찬을 시장에서 전부 사다 먹는 답니다. 겨울 김치도 그때그때 조금씩 사다 먹고요. 교인 수가 적어 교회재정이 열악하다면 그렇다고 이해를 하겠지만 교회재정의 절약 목적은 오직 최소한의 교회 유지비 외 모두 목사님 사례비와 사택에 필요한 일부의 생활비로 쓰기 위함이고, 어쩌면 김치 한통 내 성도의 어려운 가정에 담아 주지 못하는지…. 일일이 다 말씀드릴 순 없지만 어쨌든 가슴에서 분노가 일어 견딜 수 없었습니다. 목사님과 목사님의 가정을 위해서 성도가 존재하는 겁니까? 성도를 위해서 목사님이 존재하는 겁니까? 예수님님께서도 내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요 섬기러 왔다고 하셨고 기독교의 황금률은 남에게 대접을 받으려거든 먼저 남을 대접해야 하는 것인데 이 말씀이 과연 성도들만 듣고 행해야 하는 말씀입니까? 말씀을 가르치는 자가 먼저 말씀으로 가르침을 받아야하고 주장하는 자세가 아니라 먼저 본이 되어야 하는 것이 하나님의 말씀 아닌가요? 또한 제 소떼와 양떼의 형편에 마음을 두고 항상 성도들의 형편을(영적, 육적) 살피는 것이 진정 하나님이 원하시는 목자가 아닐까요? 하나님께서 통탄하실 한심한 삯꾼 목자들도 많지만 참 한심한 사모님들도 많다는 걸 다시 한 번 느껴봅니다. 주께서 우리를 존귀하게 지으셨지만 깨닫지 못하는 자는 멸망하는 짐승과 같으니…. 표현이 좀 과격한가요? 목사님 제 생각이 틀렸나요? 짧은 지면이라 함축해서 쓰느라 한심한 상태가 제대로 잘 전달이 될지 모르겠습니다. 목사님들의 진정한 권위에 대해서도 한마디 하고 싶은데 말이 너무 길어질 것 같아서요.
한국교회의 현실을 보는 글입니다. 글을 쓴 사람의 편협함보다는 한국교회의 자화상을 보는 것 같아 마음이 씁쓸해집니다. 교회마다 차이는 있지만 이런 문제로 인해 마음의 상처와 실망을 겪는 분들이 많습니다. 이 교회는 큰 교회도 아닌 작은 교회입니다. 전작인 [맞아죽을 각오로 쓴 한국교회 비판]에서는 ‘대형교회만 비판하고 작은 교회들의 문제점을 언급하지 못했다’고 이의를 제기한 독자도 있었습니다. 그것은 대형교회에만 문제가 있고 작은 교회나 개척교회에는 문제가 없다는 것은 말씀드린 것은 아니었습니다. 지역교회의 중요성을 언급하고자 함이었습니다.

받으려고만 하는 작은 교회
사실 대형교회에 못지않게 작은 교회의 소소한 문제들이 많습니다. 상처를 받고 교회를 떠난 분들의 대부분은 소형교회, 또는 개척교회를 통해 상처를 받은 분들입니다. 오히려 사람이 많은 대형교회에서는 담임목사님을 만날 기회도 없고, 교회의 사정을 파악하기도 힘들고, 거기다가 숨어 지내기에 좋기 때문에 여간해서 마음의 상처를 입을 일이 없습니다. 그래서 소형교회에 출석하는 분들이 대형교회로 수평이동하게 되는 이유가 되기도 합니다. 그럼 많은 교인들이 소형교회 또는 개척교회에서 마음의 상처를 입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그것은 담임목사님과 사모님의 사정을 쉽게 파악하고 헌금의 내역을 쉽게 파악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헌금이 선교, 교육, 사역을 위해 사용되지 않고 대부분 목회자들의 사례비로 사용된다는 사실에 충격을 받습니다. 그러면서도 목회자는 계속 대접을 받으려고 하고 교인들의 부담은 계속된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현실 앞에서 교인들의 부담은 이중 삼중으로 가중되고 상처를 받는 요인이 되는 것입니다. 목회자들 중에는 ‘나는 교회를 섬기는 일을 하기 때문에 교회에서 주는 생활비를 받고, 교인들이 제공하는 섬김을 받아야 한다’라고 주장하는 분들이 적지 않습니다. 말로는 ‘사랑은 주는 것’이라고 하면서 받으려고만 합니다. ‘내가 교인들을 위해 이렇게 수고했는데 교인들이 당연히 나를 섬겨줘야지’라고 생각합니다. 사실 그런 의식이 한국교회의 전통인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그런 전통은 나쁜 전통입니다. 그런 것 때문에 한국교회가 부패하게 되는 것입니다. 사도바울 역시 우리와 똑같은 사람으로서 이런 문제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사도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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