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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에 대하여(제2강) 하나님의 경륜 가운데 나타난 교회(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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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gksk 작성일15-01-13 13:54 조회3,418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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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2 강
하나님의 경륜가운데 나타난 교회⑵
마 16:13~20; 엡 2:8~22
 
    지금 우리가 교회가 무엇이냐? 무엇이 주님의 교회냐? 하는 점을 생각하고 있습니다. 사람이 어떤 생각을 할 때에 자기가 지금까지 보고 들은 것을 축적하여 생각하게 됩니다. 교회를 생각할 때도 그렇습니다. 지금까지 자기가 보고 듣고 배운 것으로 만든 인식을 가지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그것이 하나님의 말씀을 통하여 배우고, 차서 있게 전체적으로 배우고 깨달은 점을 가지고 생각하는 것이라면 문제가 없으나, 만약 그렇지 않다면 분명히 문제의 소지가 많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에서 얻은 지식이 아니면 분명히 참된 교회관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지금 우리가 경험하고 가는 교회를 생각하기 전에, 또 우리가 이리저리 사람들로부터 듣고 배우고 한 교회를 생각하기 전에 주님의 교회가 무엇이냐? 하나님의 말씀을 통하여 가르치는 주님의 교회가 무엇이냐 하는 점을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지난번에 ‘하나님의 경륜 가운데 나타난 교회’를 먼저 생각했는데 오늘 이어서 한 시간 더 생각하겠습니다.
 
○하나님의 경륜 가운데 나타난 교회
    지난번에 예수님께서 “내 교회를 세우리라!”(18절) 하신 점을 중요하게 생각했습니다. 오늘도 이 말씀을 중심하여 생각하면서 에베소서 2장의 본문도 연결하여 생각하겠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으시기 얼마 전에 친히 “내 교회를 세우리라” 하신 이 교회는 이미 창세전에 하나님께서 작정하신 교회라고 했지요? 에베소서 본문 바로 뒤에 3:9에 “영원부터 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 속에 감취었던 비밀의 경륜이 어떠한 것을 드러내게 하려 하심이라.” 하나님께서 포부를 가지고 무슨 일을 계획하셨는데, 그것이 ‘교회’라고 했지요? “하나님 속에 감취었던 비밀의 경륜”, 여기 ‘비밀’이란 교회를 두고 한 말입니다. 이 땅에서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을 다 교회로 불러 모으신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아주 중요한 일인데, 하나님께서 예수님의 대속의 공로를 믿는 자를 바로 천당으로 데려가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교회 안으로 불러들이십니다. 에베소에 살던 사람들을 하나님 교회 안으로 불러들이신 현실이 바로 이 에베소서 서신을 받는 교회입니다. 그것이 주님께서 ‘내 교회를 세우리라’ 하신 교회요 이미 그것은 하나님 품속에 있었던 것입니다.
    이런 교회가 지상에 어떻게 출현하느냐 하면, 주께서 가르쳐 주신 말씀을 깨달은 자들이 연합하여 내놓는 ‘공적 신앙고백’을 가지고 나타납니다. 공 교회의 ‘신앙고백’을 가지고 나타나는 것이 예수님의 교회입니다. 당시는 바로 제자들이 고백한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16절) 한 고백입니다. 당시에 이 고백은 현재 우리와 전혀 다른 아주 긴장되는 상황에서 한 고백입니다. ‘주’란 ‘왕’이라는 말인데, 천하의 왕은 하나님이지요? ‘하나님’이라는 말뜻입니다. 당시 모든 사람들이 로마 황제를 왕이라고, 신적인 존재라고 생각할 때에 예수님을 ‘왕이시다, 하나님이시다!’는 고백을 한 것은 큰일입니다. 그뿐 아니라 유대 사회에서는 이단자로 몰아서 죽이려는 그 예수님을 하나님으로 고백한 것은 큰 믿음입니다. 유일신관만 가진 유대에서 또 한분의 하나님을 고백한 것은 아주 큰 고백입니다. 2위일체적인 고백입니다. 또 ‘그리스도’란 ‘기름부음 받은 자’로서 인간의 죄를 사해주실 수 있는 ‘중보자’라는 뜻입니다. 참된 중보자란 사람으로는 안 되고 하나님이셔야 하고 그리고 사람이어야 하기에 그 2위 되신 하나님께서 참 사람의 몸을 입고 오신 것입니다. 그런 메시야(그리스도)로 고백한 것입니다. 물론 제자들이 당시에 유대인들의 사고에 많이 벗어나서 고백한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이는 인간의 이성의 판단으로 알 수 있는 문제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가르쳐 주신 계시의 지식으로 알 수 있는 것이다’ 하고 칭찬하신 것을 보면 분명히 당시 유대인들과는 다른 고백입니다. 그 고백이 나중에 오순절 성령강림 이후에 밝아졌습니다. 예수님 앞에서 한 고백이 성령 강림한 이후에 확실한 깨달음이 되어서 교회의 초석이 된 것입니다. 그런 교회의 기초가 될 자들이 지금 여기서 ‘신앙고백’을 표명한 것입니다. 주께서 이런 합당한 ‘신앙고백’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하셨습니다. 주님의 교회는 주님의 말씀의 가르침을 받아서 공적으로 표명한 ‘신앙고백’ 위에 선단 말입니다. 그런 교회를 또 주님은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 하셨습니다. 주님의 교회라면 음부의 권세도 이길 수 없습니다. 장차는 영광의 나라에도 능히 이르기 때문입니다.
    이런 참 교회에 ‘천국 열쇠’를 맡기셨습니다. 19절에 “내가 천국 열쇠를 네게 주리니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 천국에 들어올 자를 받는 열쇠를 참 교회에 맡기셨습니다. 이 교회가 지상에서 하늘에 들어갈 자를 받아들입니다. 열쇠를 가지고 천국에 들어갈 자를 열어서 받으면 하늘에서도 수납하십니다. 그런 열쇠가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했지요? 당시로는 예수 그리스도를 바로 고백하는 터 위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증거 하면 천국에 들어갈 자를 받을 수 있습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도 수납하여 받으십니다. 이렇게 구원은 지상에 있는 참 교회를 통하여 됩니다. 누구든지 구원되려면 그리스도를 믿고 참 교회로 입회함으로 됩니다.
    다른 말로 이 지상에 예수님의 교회가 어떻게 출현하느냐?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고 나타납니다. 첫째, ‘공적 신앙고백’을 가지고 나타난다고 했는데 또 둘째는,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고 출현합니다. 신앙고백과 하나님의 말씀은 동전의 양면인데요, 예수님께서 제자를 데리고 다니시면서 가르치신 말씀을 잘 깨달은 그대로 표한 것이 신앙고백 아닙니까? 그 고백을 취하고 출현한 교회는 자연히 하나님의 말씀이 있지요. 사도 교회인 예루살렘교회는 주께서 가르쳐 주신 모든 진리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 진리의 말씀을 전할 때 천국 백성 될 자들이 일어나서 교회로 가입하게 됩니다. 누구든지 주를 믿고 동일한 신앙고백을 가진 교회에 입회하면 천국 백성이 됩니다. 분명히 주님께서 자기 교회에 ‘천국 열쇠를 맡기겠다’고 약속하셨기 때문입니다. 그 약속을 능력 있게 믿는 자들의 연합체인 교회에 ‘신앙고백’도 있고 또한 천국 문을 열고 닫는 열쇠, ‘말씀’도 있지 않습니까? 그 교회가 신앙고백의 터 위에서 말씀을 전하여 천국 백성 될 자를 받으면 하늘에서도 수납하십니다. 이같이 누구나 열쇠인 하나님의 말씀이 있는 교회로 구원이 됩니다. 영광의 나라에 들어갈 자를 바로 천당으로 불러 가시는 것이 아니라 교회로 다 부르십니다. 이처럼 예수님의 교회는 천국의 관문 역할을 하는 것입니다. 천국 백성을 구별하여 받는 일을 하는 것이 예수님의 교회입니다. 이런 교회를 사람이 인위적으로 만들 수 있습니까? ‘우리 교회하자’ 하고 만들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자기 말씀을 바르게 해명하는 것을 쓰셔서 한 사람을 구원하기도 하고 또한 교회를 내기도 하십니다. 하나님께서 하시는 말씀을 전하고 풍성하게 전하는 강단이 되어야 교회라는 이야기입니다. 제자들이 주를 따르면서 배운 그 진리를 생각하면 예루살렘교회는 진리의 말씀이 풍성하지 않았겠습니까? 그 풍성한 진리를 가지고 전하는 강단이라야 교회가 됩니다. 아무렇게나 성경을 찍어 붙여서 전하고 가르치면 천국을 여는 행위를 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합당하게 바로 해명하여 전하되 전체적으로 풍성하게 전해야 합니다. 그렇지 아니하면 하나님께서 쓰실 수 있는 것이 없어서 생명적 연합인 주님의 교회가 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교회가 서게 하고 천국을 열고 닫는 권세를 시행하게 하는 핵심입니다. 말씀이 바로 전달이 안 되면 개개인은 아무리 발버둥을 쳐도 생명이 활발하지 못하여 하나님의 교회가 될 수 없습니다. 열심과 충성 봉사로 교회가 서는 것이 아닙니다. 생명이 활발해야 교회가 서기도 하고 전진하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말씀으로 교회가 나옵니다. 이렇게 나온 교회가 바로 ‘내 교회를 세우리니’ 하신 주님의 교회입니다. 이는 이미 창세전에 작정하신 교회입니다.
 
○성경계시의 특성-성경에서 교회를 쉽게 알 수 없는 이유
    그런데 우리가 성경을 보면 ‘교회가 이렇게 이렇게 서야 하는 것이다’ 하고 상세하게 쭉 설명한 곳을 볼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교회가 구성되어 나타나려면 ‘이러이러한 절차에 따라 이런 것을 갖추어서 나타나야 주님의 교회다’ 하는 것을 차서 있게 설명한 곳이 없습니다. 그래서 참 교회가 무엇인지 잘 모를 수 있습니다. 그것은 성경계시의 특성 때문입니다. 성경계시가 그저 하나의 서술로 쭉 나열한 문서가 아닙니다. 실제로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역사의 현실에 있었던 사건과 어느 정황을 놓고 하나님께서 계시하신 것을 꼭 남길 만한 것을 선택하여 기록으로 남긴 것이 성경입니다. 하나님께서 직접 이 역사에 찾아오셔서 어느 정황과 사건을 놓고 ‘나는 이렇다’ 하고 계시하신 그 많은 계시들 가운데 구속사에 필요한 것만 뽑아서 남긴 것입니다. ‘교회가 하나 서려면 이러이러한 절차에 따라 이렇게 해야 한다’ 하고 하나님께서 한꺼번에 쭉 말하시면서 누가 받아 적도록 하여 나온 것이 아닙니다. 그렇게 기록된 성경이라면 일종의 경전에 불과합니다. ‘누가 무슨 말을 했다더라’ 하는 가르침이 나열이 되어 있는 것에 불과합니다. 그러면 다른 불경이나 저 이슬람의 코란경처럼 하나의 관념에 불과할 것입니다. 경전을 쭉 읽고 눈을 감고 마음을 가다듬어서 자꾸 되 뇌이고 하면 석가가 될 수 있다는 것이 불경 아닙니까? 그런 가르침이 되어버립니다. 성경은 사람의 심리나 사람의 생각이나 견해가 아닙니다. 그러니까 추상적인 가르침이 아니지요. 이 역사 속에서 실제로 일어난 사건을, 하나님께서 그 사건 사건마다에 ‘나는 이렇다, 이런 일을 한다’는 그 일들을 목격한 자들이 성령의 감동으로 하나하나 기록한 것이 생명의 말씀인 성경입니다. 그래서 이것이 바르게 해명이 되면 성령께서 쓰셔서 생명이 나게 됩니다. 난 생명이 풍성하게 자랍니다.
    그래서 성경은 사건이 일어난 그때의 정황이 있고 그 정황을 놓고 하나님께서 무슨 말씀을 하시고 기적도 베푸시고 그것을 또 설명도 하신 것이 쭉 나옵니다. 그래서 교회를 말씀하는 것도 ‘이러이러한 절차를 거쳐서 이렇게 건설하라’ 하고 한꺼번에 설명한 곳이 없습니다. 어느 상황에서 ‘교회는 이것이다’ 하고 ‘내 교회를 세우리라’ 하셨습니다. 제자들이 주를 합당하게 고백한 것을 보시고 그 상황 위에 ‘내 교회를 세울 것이다’ 하셨습니다. 그리고 세울 때는 또 ‘이러이러한 절차를 따라야 한다’는 다음 단계의 설명이 없습니다. 그런 설명을 할 상황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한참 후에, 주께서 부활 후 승천하시기 직전에 가르쳐야 할 긴박한 상황이 되어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라” 하셨습니다. 마태복음 28:19. ‘내 교회를 세우리라’ 하시고 이어서 세우려면 ‘세례를 받아야 한다’ 하고 가르쳤으면 알기 쉬웠을 텐데 한참 뒤에 ‘세례’를 말씀하셨습니다. ‘세례’란 ‘언약민이다’ 하는 표징 아닙니까?(창 17:11) 약속을 버리지 아니하고 교회를 이루고 있으면 영원히 구원이 됩니다. 주님의 교회를 이때에 좀 더 가르친 것입니다. ‘말씀을 전파하여 제자가 나오면 삼위 이름 안으로 세례를 주라’ 하고 가르치셨습니다. ‘삼위 이름 안으로 세례를 주라’는 말씀은 ‘교회를 구성하라’는 뜻입니다. 그리고 이어서 20절에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찌어다 내가 세상 끝 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셨습니다. 이제 교회가 구성이 되면, 또 개인은 입회하게 되면 그것으로 끝이 아니라 계속하여 예수님께서 분부하신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는 것입니다. 교회가 섰으면 예수님께서 분부하신 모든 말씀을 가르쳐야 합니다. 그런 교회를 ‘내가 세상 끝날까지 함께 하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이렇게 ‘교회를 세우리라’ 하신 약속 이후에 멀리 떨어진 다른 상황에서 ‘제자를 삼아 세례를 주라’는 말씀을 하시고 또 교회를 실제로 이루면서 계속 ‘주의 말씀을 가르치고 배워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고 하셨습니다. 그것이 예루살렘교회에서 비로소 실현되었지요? 오순절에 성령이 강림하신 이후에 예루살렘교회라는 것이 서게 됩니다. 주의 보내심을 받은 제자들이 청중들 앞에 나서서 담대히 그리스도를 전할 때에 청중들이 ‘어찌할꼬?’ 하고 마음의 찔림이 일어났고 ‘회개하고 예수를 믿으라’한 사도의 가르침을 따라서 ‘세례를 받고 성령을 받으므로’ 교회가 출현한 것입니다. 그렇게 하여 선 것이 예루살렘교회입니다. 그리고 계속하여 예수님께서 분부하신 모든 말씀을 자꾸 가르치고 더 가르쳐서 거룩한 공동체로, 서로 아끼고 사랑하는 공동체로 향상해 갔습니다. 이런 것을 다 같이 놓고 보면 교회가 어떻게 서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성경을 볼 때 여기저기 전체적으로 자꾸 배워서 깨달아야 바로 알게 됩니다. 한쪽 면만 보고 말면 균형 있는 지식이 되지 않습니다. 교회를 잘 모르게 됩니다. 말씀을 전체적으로 배우고 깨달아야 종합할 수 있고 그럴 때에 하나의 그림으로 ‘아, 교회는 이런 것이다’ 하고 그릴 수 있습니다. 그러면 예수님의 교회를 바로 알고 구현하여 갈 수 있게 됩니다.
 
○본질의 교회의 그림
    오늘 에베소서의 본문도 에베소 지역에 예루살렘교회와 같은 교회 하나가 나타났음을 알 수 있게 합니다. 여기 말씀은 사도들이 이룬 예루살렘교회가 설 때와는 조금 나중에 선 에베소 지역의 교회를 놓고 가르친 말씀입니다. 그러나 그 에베소교회가 별다른 교회가 아니라 20절에 “너희는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터 위에 세우심을 입은 자라” 했습니다. 교회는 사도들의 터 위에 세우심을 입은 것입니다. 그래야 합니다. 사도들이 믿는 신앙과 가르침(신학)의 노선 위에 선 같은 그리스도의 생명체여야지 독창적이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교회나 개인 신앙이 독창적이면 분명히 문제가 있습니다. 사도들의 신앙과 그의 가르침, 신학의 노선 위에 서야 합니다. 그런 교회가 ‘본질의 교회’입니다. 그 본질의 교회를 본문에서 그림 그리듯이 설명합니다. “너희는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터 위에 세우심을 입은 자라 그리스도 예수께서 친히 모퉁이 돌이 되셨느니라.” 여기 ‘터’가 나오고 ‘세운다’는 것이 나오고 ‘모퉁이 돌’이 나오지요? 무슨 그림입니까? ‘건물’입니다. 그 건물에 모퉁이 돌이 누구죠? 예수님이죠. ‘모퉁이 돌’이란 그 건물의 기초를 놓는 첫 번째 돌로서 선과 방향을 잡는 기준 역할을 합니다. 교회가, 예수님의 교회가 하나의 ‘건물’로 비유한다면 예수님께서 가장 요긴한 모퉁이 돌로서 어느 쪽으로 어떻게 방향을 잡고 인생길을 걸어가야 할지를 공동체에 오셔서 가르쳐 주십니다. 물론 강단을 빌려서 하나님의 말씀을 바로 풍부하게 해명하는 설교로써 하십니다. 그리고 여기 ‘터’가 나오는데 ‘터’는 누구지요? ‘사도들과 선지자들.’ 이 사람들 자체가 교회의 기초가 아니라 그들의 ‘신앙’과 ‘가르침’이 기초입니다. 하나님과 그분의 말씀을 믿었으니까 결국 그분과 그분의 말씀이 교회의 기초입니다.(고전 3:11)(시 18:31) 그 어떤 일이 있어도 주의 말씀을 구부리지 아니하고 또한 뒤로 물러서지 아니하고 믿고 전하고 전한 자들 아닙니까? 적들의 공격과 핍박과 곤고, 고난을 다 당하면서도 하나님의 말씀을 놓지 않은 자들입니다. 그들의 그 신앙과 그리고 또 풍성하게 가르친 말씀이 교회의 기초일 뿐 아니라 전진하게 합니다. 사도들 같으면 ‘서신서’들, 예수님의 행한 일들을 설명한 설명계시이지요? 예수님의 행적을 밝히 가진 자들입니다. 성경으로 말하면 ‘사 복음서’를 잘 깨달은 자들입니다. 또 청중들에게, 특히 유대인들 앞에서 구약의 선지자들의 말씀을 인용하여 가르쳤지요. 그런 ‘구약’의 말씀의 토대 위에서 교회가 선다는 것입니다. 결국 지금에는 구약의 전체와 신약의 전체의 말씀이 풍부하게 전파되는 교회가 예수님의 교회라는 것입니다.
    교회를 이렇게 ‘건물’로 비유하여 설명했는데, 이는 구약의 ‘성전’을 가지고 한 것입니다. 구약의 성전은 정체되어 있는 건물에 불과하나 신약의 교회는 살아 있는 건물로 세워진다고 가르칩니다. 21절 “그의 안에서 건물마다 서로 연결하여 주 안에서 성전이 되어가고.” 모퉁이 돌이 되시는 그리스도께서 지금도 살아계심으로 그 안에서 건물마다 서로 연결하여 성전이 되어가는 것이 교회라고 가르칩니다. 예수께서 살아있는 모퉁이 돌이 되시고 사도들이 건물의 기초가 되어 그 위에 교인들이 ‘산돌들’이 되어서 건설되어 갑니다. 정체되지 않고 향상해 가는 거기에 하나님께서 거주하시므로 ‘성전’입니다. 요즘도 교회당을, 건물을 자꾸 ‘성전이다, 성전건축하자’ 하는데 아주 많이 잘못 해석한 것이지요? 하나님의 경륜 가운데 나타난 교회는 하나의 그림으로 그린다면 구약의 ‘성전’과 같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단순한 건물이 아니라 ‘살아 있는 성전’입니다. 예수님도 살았고, 예수님께 연합한 지체들도 하나하나의 돌들, 벽돌이 되었다는 그림을 말하는 것이지 살아 있는 생명체들이 아닙니까? 살아 있으니 계속 향상해갈 수밖에요. 22절 “너희도 성령 안에서 하나님의 거하실 처소가 되기 위하여 예수 안에서 함께 지어져 가느니라.” 자라간다는 말입니다. 하나님께 더 가까이 자라갑니다. 이것이 무슨 예배당을 지어가는 이야기가 아니지요? 그리스도께 연합된 공동체가 장차 영광스러운 정점에 이르는 그때에 완성될 것을 목표하고 계속하여 전진합니다. 이것이 하나의 그림으로 가르치는 것인데, 하나님의 교회가 이미 창세전에 하나님의 계획 가운데 있었던 것이 여기 에베소 지역에도 나타난 것을 ‘건물’을 그려서 가르친 것입니다.
바울은 교회의 여러 그림을 가르치면서 크게 두 가지를 강조하여 가르쳤습니다. 하나는, 구속의 역사관점에서, 즉 하나님께서 선택하시고 약속하신 역사의 관점에서 ‘하나님의 백성’이란 그림을 가르쳤습니다. ‘백성’하면 ‘국가’를 그려주고 있지 않습니까? 택자를 구원하시고 언약관계를 맺으셔서 계속하여 이끄시는 구속역사의 관점에서 ‘나라’라는 그림을 보여줍니다. 또 하나는, 이 땅위에 실지로 존재한다는 점에서 ‘그리스도의 몸’이라는 그림으로 가르칩니다. ‘몸’하면 땅에 발붙이고 사는 우리 사람의 ‘몸’을 생각하지 않습니까? 그같이 교회도 몸과 같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리스도의 몸체’라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몸’이기 때문에 그리스도를 이 몸(교회)의 ‘머리’라고 했습니다. 앞에 에베소서 1:22에 보면 그리스도를 ‘만물 위에 교회의 머리로 주셨느니라’ 했습니다. 또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이니’ 했습니다. 이렇게 그리스도와 그 몸인 우리가 신령하게 연합이 되어 그가 말씀하시면 이 공동체는 순종하는, 그래서 그 몸입니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말씀의 통치를 받는 것이 자연스러운 것입니다.
 
○보편의 교회
    어느 지역에 서든지 교회는 그리스도의 지휘계통 아래에서 섭니다. 그래야 같은 생명의 활동이 있을 것이고 같은 목소리가 나오지 않습니까? 에베소 지역에 나타난 이 교회는 예루살렘 사도들이 이룬 교회와 다른 교회가 아닙니다. 하나의 교회입니다. 다만 지역을 달리했을 뿐입니다. 예수님께서 ‘내 교회를 세우리라’ 하신 그 교회요 하나님 품속에 있던 교회입니다. 여기 에베소 지역은 당시 이스라엘 나라 바깥의 지역이지요? 소아시아의 지역입니다. 그래서 본문 12절에 “그때에 너희는 그리스도 밖에 있었고 이스라엘 나라 밖의 사람이라...” 했습니다. 불신자로 살았던 불쌍한 존재입니다. 그런데 “이제는 전에 멀리 있던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그리스도의 피로 가까워졌느니라.” 그리스도의 한 생명 안으로 편입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지역은 다르지만 예루살렘교회와 일치하는 주님의 한 교회입니다. 이렇게 지역을 달리하고 출현했어도 그리스도를 믿는 한 생명 공동체이므로 단순한 모임이 아니라 ‘교회’라고 합니다. 지역에 있는 교회 역시 주님의 교회 안에 하나로 존재하는 것이지 별다른 모임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의 한 몸입니다. 보편교회입니다. ‘보편하다’ 할 때는 마치 쉬운 예를 들자면 넝쿨 식물이 한 뿌리에서 여기저기 뻗어나가서 꽃도 피고 열매도 맺는 것과 같습니다. 농사를 지어본 사람은 아실 것입니다. 호박이 가을이 되면 온 밭두렁에 주렁주렁 열리는데, 여기저기에 열리기 때문에 여러 나무가 있는 것 같이 보이지요. 그러나 줄기를 타고 들어가 보면 결국 하나의 나무에서 나온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와 같이 하나의 주님의 교회가 시대와 상황을 달리하여 여기저기에 뻗어 나가서 이루게 됩니다. 예루살렘교회, 안디옥교회, 에베소교회 오늘 우리 하나로교회, 이렇게 됩니다. 그러나 이것이 다 주님의 교회이지 별다른 지체 하나에 불과한 것이 아닙니다. 한 뿌리인 ‘그리스도의 지체들’입니다. 그리스도의 한 생명에서 뻗어 나온 것입니다. 그래서 어느 지역에 서든지 ‘교회’라는 동일한 명칭을 씁니다.
 
○주님의 교회가 본질적으로 있어야 할 것 하나
    그런데 여기서 우리가 하나 꼭 생각하고 가야 할 것은 과연 하나님께서 작정하신 그 교회, 하나님 품속에 있던 교회가 ‘이 지상에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우리 교회가 과연 예수님의 교회냐? 하나님의 작정 가운데서 여기에 출현한 교회냐?’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부른다고 다 교회라고 생각하면 큰 오산입니다. 예수님 당시도 유대종교를 신봉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다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고 신앙했던 사람들 아닙니까? 그러나 예수님께서 ‘우리 함께 교회 이루자, 함께 교회 이룰 자들이다’ 하고 연합하지 않았습니다. 그것은 주님의 교회에 참여할 수 없는 자들이었기 때문이지요. 요한계시록 2:9에 “...자칭 유대인이라 하는 자들의 비방도 알거니와 실상은 유대인이 아니요 사탄의 회당이라” 했습니다. 그러니까 스스로들은 ‘우리가 하나님의 공동체이다, 하나님의 교회다’ 했으나, 자칭 그랬으나 실상은 ‘사탄의 회당이라’ 했습니다. 그러므로 교회를 구성하든지 개인이 참여하든지 반드시 생각할 것은 ‘과연 하나님의 교회이냐?’ 하는 것입니다. 이 땅에서 내 생활의 편의를 위하여 잠시 사용하고자 하는 자동차를 하나 구입하는 데도 얼마나 신중합니까? 이리저리 생각하고 고민하고 또 고민하여 구매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교회를 정하는 일을 너무나 쉽게 해버린다는 것은 참 위험하기 짝이 없는 일이지요. 내 생명을 맡기는 문제인데, 영원한 생명을 맡기는 일을 바로 생각지 못한다면 이보다 더 어리석은 것이 없을 것입니다. 반드시 그리스도께서 그곳에 불러 모으셔서 ‘내 교회다’ 하는 이 ‘주님의 것’이 되는 ‘보증’이 있어야 합니다. 누가 뭐라 해도 객관적인 보증을 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런 보증도 없이 목사가 ‘교회하자’ 하고 조직하면 교회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본질적으로 무엇보다도 그리스도에게 ‘연합’되어야 합니다(골 2:19; 롬 6:5). 앞에서 이 땅에 출현한 교회가 갖추는 외적인 것은 ‘공적 신앙고백’과 천국 열쇠인 ‘말씀’이라고 했는데 이 문제는 앞으로 좀 더 생각하기로 하고, 그보다 먼저 ‘본질적으로 갖출 것’은 반드시 그리스도께 ‘연합’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한 뿌리에서, 혹은 한 머리이신 그리스도에게서 나왔다면 당연히 그리스도께 연합되어 있을 것이죠. 독창적으로 있는 교회라면 그리스도의 교회가 될 수 없습니다. 한 머리이신 그리스도께 연결되어 있어야 합니다. 진정으로 하나님의 경륜가운데 나타난 그리스도의 교회가 되려면 그리스도의 생명에 연결되어야 합니다. 요한일서 5:11에 “또 증거는 이것이니 하나님이 우리에게 영생을 주신 것과 이 생명이 그의 아들 안에 있는 그것이니라.”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영생’이고 또한 그 생명은 그의 아들 그리스도의 ‘생명’입니다.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을 주의 자녀들에게 ‘연결시켜’ 주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땅에 오셔서 ‘내 교회를 세우리라’ 약속하시고 구속의 성취를 위하여 죽으시고 모든 권세를 가지시고 하늘에 올라 교회의 ‘머리’로 계십니다. 거기에서 구원된 자들을 자기에게 다 ‘연합’시켜 주셨습니다. 모든 주의 자녀들은 다 그리스도의 생명을 받아서 연결되어 있습니다. 요한복음 10:28에 “내가 저희에게 영생을 주노니 영원히 멸망치 아니할 터이요...” 했습니다. 영생을 준다는 말은 무슨 물건을 주머니에 넣어주는 것과 같은 것이 아닙니다. 신령하게 연결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부활의 그 생명 가운데 뿌리를 두고 있습니다. 영광의 나라에 갈 때까지 계속하여 양식을 공급해 주시므로 생명이 더 풍성해져 가는 삶을 삽니다. 마치 나무에 붙어있는 가지처럼 생명의 진액을 받아서, 원뿌리에서 받아서 사는 것입니다. 나무에서 끊어지면 마치 생명이 있는 것같이 보이나 결국 말라버리는 것같이 그리스도의 생명에 연결되어 있는 자는 계속하여 양식이 공급이 되어 살고 더 풍성히 살지만 그 생명에서 끊어진 자는 잠깐 살아 있는 것 같으나 결국은 망합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에게 연합하여 생명을 공급을 받아서 살아가는 현실은 교회입니다. 우리가 참여한 교회가 ‘주님의 참 교회다’ 할 수 있어야 하고, 주님의 참 교회다 하려면 그리스도에게 생명적 결합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무엇보다 ‘그리스도의 생명으로 연합된 공동체이냐’ 하는 것을 봐야 합니다. 그리스도에게 연결된 생명이냐 하는 이 ‘생명문제’를 다루지 아니하고, 생명의 유무를 확인하지 아니하고 ‘우리 같이 예수 믿으니까 교회 이루자’ 하고 구성하면 교회가 되느냐 하면 안 된다 말입니다. 기독교라는 이름하에 찬송도 하고 기도도 하고 예배도 드리고 하기에 교회라는 명분을 가진 ‘종교단체’는 가능할지 몰라도 하나님의 경륜가운데 나타난 보편의 교회는 될 수 없단 말입니다. 그리스도의 생명 가운데서 성원들 한 사람 한 사람의 ‘생명’ 문제를 중요히 봐야 합니다. 그것을 증명해야 합니다.
 
○생명의 유무의 확증
    그러면 이제 생명을 어떻게 ‘증명’할 것이냐? ‘그리스도에게 연결되었다, 그의 한 생명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어떻게 증명할 수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무엇으로 생명의 유무를 확인할 수 있습니까? 한두 곳만 찾아보면 먼저 야고보서 1장입니다. 하나님께서 ‘생명문제는 내 소간이니 너희들은 잘 몰라도 상관없다’ 하고 그저 막연히 교회를 이루게 하셨을까요? 그렇지 않지요? 1:18 다같이 “그가 그 조물 중에 우리로 한 첫 열매가 되게 하시려고 자기의 뜻을 좇아 진리의 말씀으로 우리를 낳으셨느니라.” 여기 ‘자기의 뜻’이란 하나님의 뜻인데, 그분이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를 흠 없는 아들들이 되게 하십니다(엡 1:4~5). ‘진리의 말씀으로 우리를 낳았다’고 합니다. 꼭 우리가 엄마 배태에서 출생하는 것처럼 말씀합니다. 어떻게 낳느냐? 하나님께서 하시는 ‘말씀’으로 태어났다는 것입니다. 즉 복음의 말씀을 통하여 교회에 참여한 우리를 새로 지으셨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교회에 참여할 수 있는 생명의 탄생은 열심이나 기도나 종교 사업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 ‘진리의 말씀’으로 됩니다. 이런 진리의 말씀으로 태어난 자들이 ‘우리’, ‘교회’를 이룹니다. 그러므로 참 주님의 교회가 되려면 생명의 말씀으로 난 사실이 있어야 합니다. “진리의 말씀으로 우리를 낳으셨느니라.”
    또 한 곳을 찾아보시지요. 베드로전서 2:2 우리가 잘 아는 말씀이지요? 다같이 “갓난아이들같이 순전하고 신령한 젖을 사모하라 이는 이로 말미암아 너희로 구원에 이르도록 자라게 하려 함이라.” 여기 ‘신령한 젖’이라고 했습니다. 무엇을 말하지요? 앞에서 말한 ‘진리의 말씀’입니다. 진리의 말씀으로 태어나는 것뿐만 아니라 이 말씀이 ‘신령한 젖’이 되어서 “구원에 이르도록 자라게 하려 함이라.” 이 말은 ‘영광의 나라에 이를 때까지 자라게 하는 것’이란 말입니다. 여기 구원은 최종 영광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을 말합니다. 진리의 말씀, 신령한 양식이 새 생명으로 태어나게도 하고 영광의 나라에 이를 때까지 장성하게도 합니다. 따라서 생명의 유무의 아주 쉬운 확인은 바로 ‘진리의 말씀’ 앞에 어떤 태도를 취하느냐를 보면 됩니다. 하나님 말씀 앞에서 자기를 내려놓고 살고자 하는 자는 분명히 그리스도의 한 생명 가운데 연합된 자입니다. 그런 자들이 신령하게 연합한 것이 지상 교회입니다. 지상 교회는 항상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 취하는 태도가 명확합니다. 희미하거나 불명확한 것이 아닙니다. 그러기 위하여 무엇보다 하나님의 말씀이 명확히 증거 됩니다. 그래야 합니다. 목사가 마음대로 이리저리 찍어 붙인 말씀을 가지고는 생명의 유무를 확인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말씀이 불명확한 교회는 한 생명 공동체의 교회라고 하기 어렵습니다. 오늘 이만큼 하시지요. 다음에 또 이어서 하겠습니다.
 
○기 도
    거룩하신 하나님, 하나님께서 그의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에게 연합한 저희를 긍휼히 여기셔서 이미 이 땅에서 주의 몸 가운데 연합하여 지체들로 영광에 이를 때까지 함께 사랑하며 생명적인 일치 가운데 행보해 나아가게 하시오니 감사하옵나이다. 자기를 지참하고 참여할 수 없는 이 거룩한 교회를 저희가 바로 배우고 깨달을 수 있게 하시니 감사하옵나이다. 이 세상 조직은 언제나 자기를 내함 하고 자기 실력과 기술, 재주를 다 발휘할 때 그 조직을 높이고 향상시켜 가게 하는 것이나 교회는 자기를 다 버리고 그리스도 안에서 새 생명을 날마다 받고 풍성한 그 생명의 양식의 말씀을 받아서 살아가는 것이옵나이다. 하나님의 거룩한 품속에 있던 교회가 이 땅위에 있고 여기에 저희를 참여시켜 주셨사오니 주님, 저희를 늘 성령과 말씀으로 다스리시옵소서. 저희는 항상 겸손히 말씀의 다스림을 받아서 나아가게 하여 주시옵소서. 거기에서 교회의 머리가 되시는 그리스도의 명예가 드러날 것이옵나이다. 저희 힘으로는 교회의 참된 모습을 드러내어 그리스도께 영예를 돌려드릴 수 없사오니 주님, 늘 주님만 철저히 의지하고, 주께서 말씀을 하실 때에 크게 듣고 나아가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상고할 문제
1.하나님의 경륜 가운데 나타난 교회가 되려면 무엇이 필요한지 말해보라.
2.성경에서 교회가 무엇인지 얼른 알 수 없는 이유 하나를 말해보라.(성경계시의 특성)
3.본질의 교회의 그림을 설명해보라.
4.예수님의 교회가 본질적으로 갖게 되는 것이 무엇인가?
5.생명의 유무를 어떻게 확증하는지 말해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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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교단 대한예수교 장로회
* 교회명 분당 하나로교회
* 담임목사 이상주
* 교회주소 경기도 성남시 분당구 이매동 120-2 성우빌딩(신한은행)5층
* 연락처 http://www.hanarochu.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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