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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에 대하여(제3강) 하나님 말씀의 중요성(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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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gksk 작성일15-01-13 13:56 조회3,609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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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3 강
하나님 말씀의 중요성⑴
마 16:13~20
 
    우리가 지금 교회가 무엇인가 하는 점을 생각하는데, 오늘은 하나님의 경륜가운데 나타난 주의 교회가 이 땅에서 어떤 것을 구비하고 있느냐 하는 것을 일정부분 생각하겠습니다. 한 시간에 다 생각하기는 어렵고 오늘, 그 다음 시간 연결해서 생각하겠습니다. 하나님의 교회가 이 땅에 세워지게 되면 외형적으로 무엇을 구비하여 있게 되느냐? 그래야 하느냐 하는 것입니다. 그 첫째로 하나님의 말씀이 구비되어 있다는 점입니다. 이를 오늘 생각하시지요.
 
○세상에 나타난 교회
    본문에 예수님께서 “내 교회를 세우리라” 하신 교회는 그에게 신령하게 연합한 주의 백성들의 모임입니다. 지난번 말씀을 연결하여 생각함이 좋을 것 같습니다. 건물이 교회라고 하거나 조직이 교회라고 하는 것은 큰 잘못이지요. 예수님께서 ‘교회’(ἐκκλησια)라는 말을 쓰신 것은 ‘바깥으로 부름 받은 무리’를 묘사한 말입니다. 이 말 자체가 교회의 모든 개념을 충분히 다 가르치는 것은 아니지만, 중요한 점은 ‘바깥으로 부름을 받은 회중’이라는 사실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를 통하여 이 세상에 처한 자들을 바깥으로 불러내셔서 거룩한 무리를 지어 살게 하셨다는 것입니다. 이는 단순한 무리가 아니라 그리스도께 뿌리를 두고 사는 생명적 공동체입니다. 장차는 영광의 나라에 능히 이를 수 있는 영원한 생명을 가진 공동체입니다. 이 공동체가 이미 영원하신 하나님의 품속에 있었던 것이라 했지요? 이 땅에 현존하기 때문에 사람의 몸을 비유하여 ‘그리스도의 몸’이라는 것을 강조합니다. 그 ‘머리’는 물론 ‘그리스도’입니다. 그를 머리로 하여 지체들로 구성된 신령한 몸이 교회입니다. 이 ‘몸’을 생각할 때 조직체가 아니라 유기체임을 금방 알 수 있지요? 이런 신비한 몸, 연합체인 교회는 이미 만세 전에 하나님의 품속에 있었다고 했는데, 때가 되어 예수님께서 이 역사 속에 들어오셔서 ‘내 교회를 세우리라’ 하셨습니다. 그리고 이 교회를 지상에 출현시키기 위하여 자기 몸을 십자가에 내어주시고 많은 지체들을 얻으셨습니다. 그 지체들의 연합체가 교회이지요? 예수를 믿고 구원이 되면 누구나 참여할 수 있는 보편의 교회입니다. 그 많은 지체들 중에 어느 지역에서 몇 명이 모일지라도 ‘보편의 교회’라고 합니다. 시대나 지역을 달리하고 모이기는 하나 주님의 교회에 참여한 지체들이 거기에 모였다면 단지 지체라고 하지 않고 ‘교회’라고 합니다. 교회는 본체의 교회에 속한 자들이 그 시대의 지역 특성에 따라 연합한 것입니다. 누구든지 본체의 교회에 속하면 바로 천당을 가든지, 천당 가기 위하여 잠시 대기하여 있든지 해서 개인적으로 사는 것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의 지체로 다 연합하여 그 지역 교회를 이루고 삽니다. 주를 믿는 그 시로부터 개인은 없어지고 그리스도의 지체가 되어 사는 것입니다.
    이런 신비한 교회를 오늘 강단에서 가르치는 일이 미흡하고 또 소홀히 함으로 많은 신자가 개별적으로, 개인적으로 하나님과 관계를 맺고 사는 것처럼 생각합니다. 개인주의 신앙입니다. 이 개인주의 신앙은 이 세상의 개인주의, 혹은 민주주의 시민과 다를 바 없습니다. 교회는 세상과 전혀 다른 하나님의 공동체인데, 개인주의가 팽배해 있다는 것입니다. 개인주의를 불식시키는 말씀이 성경 여러 곳에 있으나 우리가 잘 아는 갈라디아서 2:20입니다. 신자를 대표하여 바울이 말합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주를 참으로 믿는다면 그리스도 안에서 그의 ‘수족’으로 사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께 연합한 지체로 한 몸, 교회를 이루고 삽니다. 영광의 나라에 들어가면 이루게 될 거룩한 ‘사회’를 이미 이 땅에서 ‘교회’를 통하여 이루고 전진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생애동안 이미 이 땅에서 주께 연합하고 교회에 연합하고 천국 행보를 합니다. 하나님께서 베푸신 모든 은혜를 받아 누리면서 사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개인적으로 산다는 것은 구원의 참 뜻이 아닙니다. 주께 연합한 지체들의 연합체인 교회에 참여하여 지체로 살아야 구원됩니다. 이들이 장차 영광의 나라에 들어갑니다. 이런 가르침을 교회라는 이름을 붙이고도 별로 안 가르치니까 우리가 처해 있는 이 현실은 교회를 통하여 구원의 신앙이 된다는 사실을 잘 모르는 실정입니다.
 
○교회에 주신 권세-열쇠인 말씀을 맡기심
    교회는 ‘하나님 품속에 있던 것이 나타난 것이라’ 했는데 이 땅에 나타나면 무엇을 갖추게 되느냐 하는 것입니다. 무엇을 갖춘 교회가 참 교회냐 하는 것입니다. 성경 한두 본문을 잡아서 이것을 다 알 수 있는 문제가 아니라고 지난 시간에 생각했습니다. 그럴지라도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께서 이 땅에 출현한 자기 교회가 무엇을 갖추는지를 볼 수 있게 말씀하셨습니다. 18절에 보면 예수님께서 “내 교회를 세우리라” 하시고 그 교회에 ‘천국을 닫고 여는 권세를 주시리라’ 하셨습니다. 19절에 “내가 천국 열쇠를 네게 주리니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 “내가 천국 열쇠를 네게 주리라” 하신 이 말씀은 베드로 개인에게 주신다는 말씀이 아니라 사도들, 앞으로 이 사도들을 통하여 이루게 될 교회에 주시겠다는 것입니다. 사도들로부터 시작이 되는 주님의 교회에 천국열쇠를 주시겠다는 약속입니다. ‘천국 열쇠’란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했지요? 지금까지는 예수님께서 직접 이 땅에 오셔서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고 제자 삼는 일을 하셨으나, 이제 교회가 그 일을 담당하도록 하신다는 뜻입니다. 교회가 천국 열쇠를 가지고 문을 닫고 있다가 천국에 들어갈 자를 열어주는 권세를 주시겠다는 것입니다. 사도들이 이룰 예루살렘교회를 시작으로 하여 앞으로 계속 이어지는 주님의 교회에 천국을 닫고 열어주는 관문 역할을 할 것이란 말입니다. 예수님께서 다시 재림하실 그때까지 이제 교회가 천국 백성 삼을 자를 삼는 일을 행할 수 있도록 권세를 맡기셨습니다. 구원하실 자를 하나님께서 자기 교회로 불러들여서 영원한 나라에 이르게 하십니다. 그러므로 교회가 얼마나 중요합니까? 이런 교회를 바로 이루지 못하면 영광의 나라에 이를 소망이 없게 됩니다. 여기 “땅에서 무엇이든지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하신 것은 교회가 천국 백성 될 자 아닌 자를 살펴서 행하면 하늘에서도 수납하시겠다는 뜻입니다. 교회가 천국 백성을 선별하여 받으면 그는 영광의 나라에까지 구원된다는 뜻입니다. 이런 큰일을 교회가 맡았습니다. 예수님께서 친히 하실 일을 그의 수족들의 연합체인 몸에 교회에 다 위탁하신 것입니다.
    그렇다면 ‘천국을 닫고 열어주는 일’이 참 중요한데, 이 일을 바로 수행할 수 있어야 주님의 교회이지요? 무조건 예수교 장로회라는 간판을 붙이면 주님의 교회가 아니고 천국에 들어갈 자를 잘 살펴서 문을 열어주는 일을 행할 수 있어야 주님의 교회입니다. 하나님께서 위탁하신 권세를 합당하게 행할 수 있어야 영광이지 그 권세를 남용하거나 사장하면 오히려 큰 징계가 따를 것입니다. 그럼 어떻게 천국을 닫고 또 열어주는 일을 할 수 있느냐? 이것이 관건입니다. 무엇으로 한다고요? 천국 열쇠인 ‘하나님의 말씀’으로 한다는 것입니다. 전에는 예수님께서 직접 말씀을 가르치셔서 천국 백성 삼으셨으나, 이제부터 교회가 그의 하신 말씀의 진리를 잘 받아 가르쳐서 천국 백성 삼도록 하셨습니다. 그러니까 교회는 무엇보다도 하나님의 말씀을 바로 전할 책임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바로 전하지 않으면 천국 문을 열어줄 수 없습니다. 교회의 책무를 유기하는 것입니다. 주님의 참 교회가 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교회는 천국을 열어주는 열쇠, 하나님의 말씀을 부지런히 잘 전해야 합니다. 물론 바르게도 전해야 하고, 또한 풍성하게 전체적으로 전해야 합니다. 전체적으로 풍성하게 전하는 교회가 되지 않으면 편협 된 몇 가지만 붙잡고 가는 반쪽 신앙이 됩니다. 온전한 구원의 신앙이 나오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전체적으로 풍성하게 잘 갖추어서 전한다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렇게 전하면 하나님께서 그 말씀을 쓰셔서 생명을 주십니다. 또 풍성하게 자라게 하십니다. 말씀을 잘 지키고 가르치지 않고 자꾸 강단에서 무슨 도덕 강연을 하거나 재미있는 이야기를 붙여서 하거나 또 무슨 귀에 걸면 귀걸이 코에 걸면 코걸이 식으로 말씀을 찍어 붙인다면 하나님의 생명이 날 수 없습니다. 생명이 없는 숫자가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중생은 어떻게 되는가?
    이 생명의 문제가 참 중요한데요, 잠깐 생각하시지요. 이 생명의 문제를 생각지 않는 교회는 주의 교회라고 하기 어렵기 때문에 이 생명이 어떻게 나는지를 알아야 합니다. 무엇으로 거듭나느냐 하는 것입니다. 중생은 어떻게 되느냐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잘 아는 요한복음 1:12~13에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13)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서 난 자들이니라.” 하나님 자녀가 되는 권세를 가진 자는 ‘오직 하나님께로서 난 자들이라’고 합니다. 하나님께서 나게 하셨다는 거죠? 꼭 어머니 배태에서 출생시키는 것과 같은 말을 했습니다. 그럼 어떻게 태어나게 하셨을까요? 무슨 요술을 부려서 났습니까? 우리는 어떻게 났습니까? 찾아보시지요. 지난번에 본 말씀인데요, 야고보서 1장입니다. 야고보서 1:18에 “그가 그 조물 중에 우리로 한 첫 열매가 되게 하시려고 자기의 뜻을 좇아 진리의 말씀으로 우리를 낳으셨느니라.” 여기 ‘조물’이란 ‘재창조’를 말합니다. ‘첫 열매’란 중생한 사람을 말합니다. 처음 세상 이 만물의 창조 때는 사람을 맨 나중에 짓지 않았습니까? 그런데 여기 재창조는 사람을 ‘첫 열매’로 지으셨다고 합니다. 무엇으로 지었다고 합니까? “진리의 말씀으로 우리를 낳으셨느니라!” 이 말씀이 우리에게 좋은 교훈을 줍니다. 첫 창조 때에는 사람을 무엇으로 만들었습니까? 흙을 재료로 하여 ‘말씀’으로 지었지요. 재창조는 우리 육체를 재료로 하여 역시 ‘말씀’으로 지었다고 합니다. 하나님께서 진리의 말씀으로 우리를 새로 만드신 것입니다.
    말씀의 능력으로 죄인을 새로 만드셨다는 가르침은 베드로전서 1:23에 확실히 말씀합니다. 찾아보시지요. 베드로전서 1:23 “너희가 거듭난 것이 썩어질 씨로 된 것이 아니요 썩지 아니할 씨로 된 것이니 하나님의 살아 있고 항상 있는 말씀으로 되었느니라.” 여기 “씨”란 “하나님의 살아있고 항상 있는 말씀”입니다. 사람이 새로 나는 것은 복음의 말씀으로 됩니다. 하나님의 자녀로 태어나는 것은 말씀으로 된다는 것입니다. 이 말씀을 베드로전서 2:2에는 ‘신령한 젖’이라고 했지요? “갓난아이들같이 순전하고 신령한 젖을 사모하라 이는 이로 말미암아 너희로 구원에 이르도록 자라게 하려 함이라.” 새로 난 사람은 ‘신령한 젖을 사모하라’고 합니다. “이는 이로 말미암아 너희로 구원에 이르도록 자라게 하려 함이라.” 여기 ‘구원’은 중생이 아니라 중생 이후 주께서 다시 오실 그때 이루어질 최종적 구원을 말합니다. 그 최종 구원의 영광에 이르도록 하나님께서 자라게 하시는 양식으로 ‘신령한 젖’, 말씀이지요? 이 말씀을 쓰신다는 것입니다. 그럼 이렇게 새 사람으로 태어나는 것도 또 그 생명이 자라는 것도 다 하나님의 말씀의 진리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이렇게 중요합니다. 최초 아무 것도 없는 데서 기이한 말씀의 능력으로 만물을 지으시고 사람을 지으신 것과 똑같이 죄 가운데 이 세상 가운데 죽음의 권세 휘하에서 벗어날 수 없는 인간을 새로 지으시는 방식도 하나님의 말씀의 진리로 하신다는 것입니다. 또한 영광의 나라에 이르기까지 계속해서 더 가까이 자라게 하시는 자양도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중요한 진리의 말씀을 소홀히 할 수 없고 편파적인 몇 가지로 생각할 수 없습니다. 교회는 이런 중요한 말씀을 늘 생각하고 전체적으로 풍성하게 공급할 수 있는 장이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자녀로 창조되는 것도 복음의 말씀으로 되고 영광의 나라에 이를 때까지 성장하는 것도 하나님의 말씀으로 되는 것을 그저 몇 가지 참고하는 정도로 사용할 수 있습니까? 이리저리 찍어 붙여서 전할 수 있습니까? 생명의 양식으로 전해야 합니다. 한두 숟가락을 먹으면 아이가 잘 자라지 않지 않습니까? 풍성하게 전해야 먹고 자랍니다. 이 중요한 일을 소홀히 하거나 희미하게 할 수 없습니다. 영원한 생명을 다루는 하나님의 말씀을 소홀히 한다는 것은 주님의 교회가 아님을 말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으로 생명이 창조되기도 하고 자라기도 함으로 교회는 하나님의 말씀을 바로 전하고 풍성하게 전하는 일에 사활을 걸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면 안 된다는 생각을 가져야 합니다. 이것은 사람이 앞서지 않고 하나님께서 하시도록 하는 방법입니다. 하나님께서 현실적으로 어떻게 하십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바로 해명할 때 그가 자기 말씀이니까 쓰셔서 하시는 겁니다. 목사의 입을 빌려서 지금도 말씀을 하심으로 생명을 창조하십니다. 또한 창조된 생명을 자라게 하십니다. 그래야 하나님의 그 거룩한 공동체가 되지 않습니까? 진정 하나님의 교회가 되려면 그분의 말씀을 바르게 전해야 합니다. 희석하거나 구부리지 말아야 합니다. 또 몇 가지 강조점을 두고 가르칠 수 없습니다. 교회에서 오늘 가르치는 것을 손꼽아 보면 몇 가지가 되지 않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는 큰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무슨 ‘충성을 하라, 봉사하라, 사랑하라, 전도하라, 기도하라, 열심을 내라, 어디로 가자!’ 하는 식이면 복음의 말씀이 되기가 어렵습니다. 예배 하나를 생각해도 제대로 가르치고 배워야 하지요. ‘어떻게 드려야 하나님께서 받으시는 예배인지, 그것은 아니고 이렇게 하자, 찬송은 이런 것이고 기도는 이런 것이다, 헌금은 이런 것이어야 하나님께서 받으신다’ 하는 식의 설교가 되어야 하지 않습니까? 그래야 알 것을 알고 튼튼해질 것입니다. 강단이 부실하면 개인은 아무리 용을 써도 튼튼할 수 없습니다. 열심이 부족하여 문제가 아닙니다. 충성이 모자라서 문제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부족하여 항상 문제입니다. 아무리 열심히 충성봉사할지라도 하나님의 말씀이 전체적이지 못하면 하나님의 생명이 활발하지 않을 뿐 아니라 나기도 어렵습니다.
 
○말씀의 바른 해명의 준거틀-신앙고백
    그럼 이제 관건은 설교 문제입니다. 어떤 설교가 하나님의 말씀인가? 하는 것입니다. 오늘날 강단에서 설교하는 사람치고 ‘이 설교는 하나님의 말씀이 아닙니다’ 하고 설교하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을 것입니다. 다 자기가 전하는 말씀이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하는 마당입니다. 심지어 이단도 자기 설교가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합니다. 이런 상황에서 어떤 설교가 하나님께서 쓰시는 말씀인지 구분하기가 어렵습니다. 어떻게 구분할 것입니까? 본문에서 좀 유추할 수는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아무 것도 없는 데서 ‘내 교회를 세우리라!’ ‘천국 열쇠를 주리라’ 하신 것이 아니지요? 주님의 그 가르침을 받아서 회개하고 제자 된 자들의 ‘신앙고백’ 위에 세운다고 하셨습니다. 당시 유대교회가 있었습니다. 그 유대 교회 위에 내 교회를 다시 세우고 천국 열쇠를 주겠다고 하신 것이 아니라, 주님의 말씀을 잘 깨달은 제자들의 ‘신앙고백’ 위에 하시겠다고 하셨습니다. 당시 유대 교회는 어떻습니까? 예수님을 메시아로 고백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기회만 되면 잡아 죽일까 하다가 결국 십자가에 못 박았습니다. 그런 암울한 시기에 제자들은 예수님을 참 메시아로 바로 알고 고백했습니다. 그 고백 위에 주님의 교회를 세우셨습니다. 천국 열쇠를 주셨습니다. 천국 열쇠를 맡긴 교회는 유대 교회가 아니라 ‘신앙고백’을 바로 한 제자들의 교회입니다. 예루살렘교회이지요? 베드로 개인의 신앙고백이 아니라고 했지요? 본문 17절에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 하는 고백은 주님의 교회를 시작할 제자들의 ‘공적 고백’입니다.
    예수님을 메시아로 고백한 것이지만 당시는 ‘성경을 이렇게 믿는다’ 하는 고백입니다. 당시 성경은 구약 아닙니까? 유대 교회도 이 구약 성경을 다 믿고 전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메시아로 고백하지 못한 교회이기 때문에 구약을 바로 믿는 교회가 아닙니다. 그래서 유대교회는 주님의 교회에서 탈락했습니다. 당시는 예수님을 ‘메시아’로 고백하는 교회가 아니면 구약성경은 잘못 믿는 것입니다. 천국의 관문인 교회로 들어갈 수 없습니다. 구약의 말씀을 믿었을지라도 구부려서 믿는 것이므로 구원의 신앙이 못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17절) 하는 공적 고백은 당시에 ‘우리는 성경을 이렇게 믿는다’ 하는 공식적인 ‘교회의 고백’입니다. 이 고백 위에서 성경을 해석하지 않으면 당시는 참된 설교가 못됩니다. 유대 종교도 구약성경을 다 믿고 설교하지 않았습니까? 율법사들의 가르침을 통하여 하나님을 잘 믿는 교회로 자처했습니다. 요한계시록 2:9에 “...자칭 유대인이라 하는 자들의 비방도 알거니와 실상은 유대인이 아니요 사탄의 회당이라!” 자칭 교회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교회에 속하지 못했습니다. 왜냐하면 실상은 ‘사탄의 회당’이라. 그러나 예루살렘교회는 어떻습니까? 사도들이 이룬 교회는 예수님을 메시아로 고백한 터 위에 섰기 때문에 그 교회 강단은 참 하나님의 말씀이 전파되었습니다. 성경을 바로 해명하는 설교였습니다. 그러므로 당시 어떤 교회가 참된 설교냐? 어떤 설교가 참된 하나님의 말씀이냐 하는 구별은 예수님을 메시아로 고백한 ‘공적 고백’입니다. 그 고백을 갖추어서 설교하지 못하면 하나님의 말씀의 설교가 아닙니다. 참 교회가 아닙니다. 이처럼 ‘공적신앙고백’이 중요합니다.
 
○신앙고백의 역사
    교회의 공식적인 ‘신앙고백’은 그 시대 시대마다 그릇된 설교와 이단의 가르침과 싸워서 내놓은 검증된 유산입니다. 그 시대의 여러 그릇된 설교와 싸워서 ‘하나님의 말씀을 이렇게 믿어야 한다!’ 하는 공식적인 교회고백입니다. 교회 역사에서 어느 시대나 이 ‘공적신앙고백’이 있었습니다. 처음 사도들이 이룬 예루살렘교회의 시대가 지난 다음에 여기저기에 교회가 서서 전진해 나갈 때에 여러 가지 문제가 야기되었습니다. 특히 삼위일체 하나님에 관하여 서로 믿는 교리가 달랐습니다. 다같이 예수님을 메시아로 고백하면서도 어떤 교회는 삼위일체 하나님을 바로 믿지 않고 설교했습니다. 성경을 구부려서 해석하는 이단적인 설교 때문에 참 교회가 장애를 받고 어려운 가운데 처했습니다. 그때 범 교회가 다같이 니케야라는 도시에 모여서 ‘우리는 성경을 이렇게 믿는다’ 하고 ‘삼위일체’ 교리를 공식적으로 고백한 것이 ‘니케야 신앙고백’(325년)입니다. 당시는 그 고백을 놓고 강단의 설교를 평가할 때 하나님의 말씀인지 아닌지 구분할 수 있었습니다.
    오늘에는 어떻습니까? 삼위일체 하나님을 믿는다는 말은 똑같이 해도 여러 가지 그릇된 설교를 하는 교회가 많은 실정이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아닌 설교가 많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에는 예수님을 메시아로 고백하는 것만으로, 삼위일체 하나님을 믿는 것만으로 바른 설교를 한다, 바른 교회가 어떤 것이다 하는 것을 찾아낼 수 없습니다. 메시아를 고백하고 삼위일체 하나님을 믿으면서도 성경말씀을 여러 부분에서 잘못 해석하는 설교가 많기 때문입니다. 대표적으로 로마 카톨릭교회 아닙니까? 예수님을 메시아로 고백하면서도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인간적으로 해석하는 설교와 가르침으로 무려 1천년이란 긴 세월동안 인간교회로 만들었습니다. 그리스도를 교회의 머리라고 고백하면서도 인간 교황이 ‘보이는 교회’의 ‘머리’라고 주장합니다. 사람이 교회의 머리로 믿음으로 강단에서 사람의 말을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이 성경말씀의 권위를 능가합니다. 대표적으로 천주교 예를 들었습니다만 우리 장로교 안에서도 이런 일은 많습니다.
이런 때에 성경만 가지고 하나님의 말씀인지 아닌지 구분하기 어렵습니다. 이단들도 심지어 성경을 가지고 자기 설교가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주장하는 마당입니다. 그래서 이 성경을 어떻게 믿느냐 하는 ‘보편교회의 신앙고백’이 중요합니다. 역사적으로 계승되어 온 참된 신앙고백을 놓고 보면 금방 알 수 있습니다. 16세기 개혁자들도 당시 로마 교회의 설교를 유심히 관찰하고, 또한 초기 시대의 글과 신앙고백을 연구하고 또 성경을 놓고 살핀 끝에 ‘우리는 성경을 이렇게 믿는다’는 신앙고백을 내놓아 로마 교회의 가르침과 구분시켰습니다. 500년~1500년이란 그 긴 세월동안 거의 모든 세계 교회가 성경을 그릇되게 해석하고 설교하여 성경 모든 부분에 잘못 믿고 있었기 때문에 그것을 일일이 바로 잡고 체계화한 것이 개혁신앙이고 신학입니다. 그때 개혁교회 전체가 모여서 ‘우리는 성경을 이렇게 믿는다’ 하고 체계화해서 고백한 것이 유럽에는 벨직 신앙고백이고 영국·스코틀랜드는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입니다. 오늘에는 적어도 이런 고백서를 놓고 설교를 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하나님의 말씀인지 아닌지 구분이 가능하게 됩니다. 참 교회인지 아닌지도 거기에서 구분할 수 있습니다.
    물론 이 신앙고백만 있으면 다 되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의지하고 그것을 전체적으로 가르쳐서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다 믿고 가야 구원의 신앙이 됩니다. 신앙고백만 자꾸 의지하게 되면 고백주의가 됩니다. 이런 점이 있지만 그러나 지금 우리나라 경우는 이 공적 고백조차도 없는 데서 설교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인지 아닌지조차 구분할 수 없는 형편입니다. 그러므로 사도 시대부터 지금까지 여러 이단들과 싸워서 내놓은 ‘보편교회의 신앙고백’을 갖추는 것이 시급합니다. 계승된 신앙고백이 없이 하는 설교는 틀림없이 목사가 마음대로 해석하고 이렇게 저렇게 찍어 붙여서 가르치고 믿기 때문입니다. 가령 은혜로 구원된다는 말은 할지라도 천주교와 같이 행함이 보태어져야 구원된다는 식의 설교가 많습니다. ‘이렇게 합시다, 저렇게 갑시다’ 하고 외치면서 ‘어떻게 가자는 말인지, 어디로 가자는 말인지’ 설명이 없는 설교는 틀림없이 ‘행함’을 강조하는 설교입니다. 그 교회는 틀림없이 지금까지 내려오는 개혁교회의 신앙고백이 없는 교회입니다. 오늘 여러 매체를 통하여 쏟아져 나오는 설교를 보면 거의가 강조하는 것이 ‘이렇게 합시다! 이렇게 갑시다!’ 하는 식입니다. 도대체 어디로 가자는 말인지, 어떻게 하자는 말인지, 그것을 잘 밝혀서 가르쳐 주지는 않고 자꾸 가자는 식입니다. ‘충성봉사 합시다, 전도하십시다, 사랑합시다, 성령충만 받읍시다, 교회를 사랑합시다’ 하면서 왜 그래야 하는지 설명은 별로 없습니다. 그저 선언적으로 한두 마디하고 마는 정도라면 10년 20년 들어도 무엇 하나 제대로 알 수 없습니다. 예배 하나도 어떻게 드려야 하나님께서 받으시는지 알 수 없습니다. 그저 막연히 이렇게 저렇게 할뿐입니다. 이를 신자의 개인의 책임으로 돌린다면 큰 문제가 아닐 수 없습니다.
 
○정리의 말
    말씀을 다시 정리하지요. 지금 이 세상에 나타난 하나님의 교회는 무얼 갖추고 있느냐 하는 문제를 생각했습니다. 무엇보다 천국에 들어갈 자를 열어주는 열쇠인 ‘하나님의 말씀’을 잘 갖추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제대로 갖추어져 있지 아니한 교회라면 하나님의 생명이 날 수 없습니다. 그리스도의 그 부활의 생명이 출생될 수 없습니다. 혹은 난 생명이라 할지라도 말씀이 풍성하게 전할 수 없는 교회라면 자랄 수 없게 됩니다. 교회는 생명이 난 자들이 연합되는, 그리스도께 다 연합이 되는 천국의 기관입니다. 그러므로 생명의 문제를 바로 깨닫지 못하면 교회되기를 포기하는 일입니다. 첫 창조 때에 하나님의 말씀의 능력으로 만물과 사람을 창조하셨듯이 둘째 창조인 생명을 새로 지으시는 것도 역시 말씀으로 하신다고 했습니다. 이런 말씀을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고 조금 찍어 붙여서 생명이 날 것으로 바란다는 것은 참으로 어리석은 일입니다.
    또 하나, 그럼 하나님의 말씀이 무엇이냐? 어떤 설교가 하나님의 말씀이냐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예상이라도 하셨듯이 ‘신앙고백’ 위에 교회를 세우신다고 하셨습니다. 그 당시 ‘성경을 이렇게 믿자’ 한 범 교회의 신앙고백을 가지고 설교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교회의 역사에서 여러 그릇된 이단들과 싸워서 내놓은 검증된 유산이 신앙고백입니다. 성경말씀의 권위를 지키고 든든히 한 여러 신앙고백이 있습니다. 그것을 우리 교회도 받아 확증한 터 위에서 설교하는 것이라야 하나님의 말씀이 됩니다. 거기서 더 풍성히 전할 책임은 물론 있습니다. 우선은 보편교회의 신앙고백을 놓고 하나님의 말씀을 바로 배우고 풍성하게 깨달아가야 할 것입니다.
현재는 똑같은 성경을 믿고 그 성경으로 설교하고 그 성경으로 자기 신앙 자기 교회 신앙이 옳다고 주장을 합니다. 그러면서도 해석상 달리 믿고 나감으로 다른 복음을 전하여 다른 교회가 되는 실정입니다. 이를 경계라도 하듯 바울은 “하늘로부터 온 천사라도 우리가 너희에게 전한 복음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 했습니다. 갈라디아서 1:8. 10절에는 “이제 내가 사람들에게 좋게 하랴 하나님께 좋게 하랴 사람들에게 기쁨을 구하랴 내가 지금까지 사람의 기쁨을 구하는 것이었다면 그리스도의 종이 아니니라‘” 몰려오는 사람들이 떠날까봐 청중의 구미에 맞춰서 설교한다면 결국 그 사람들의 생명을 죽이는 일입니다. 이것이야말로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강단의 문제입니다. 강단의 속화는 교회의 속화를 가져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바르게 전달이 되는 터 위에서 전제적으로 가르치고 배워서 성경말씀을 전부 다 믿고 가야 구원의 신앙입니다. 16세기 교회개혁시대 때에 ‘성경으로 돌아가자’는 말은 성경의 강조점 몇 가지만 추구하고 가자는 것이 아니었지요? ‘전 성경으로 돌아가자’는 것입니다. 성경 전체를 가르치고 믿는 데로 가자는 것입니다. 성경을 믿는다고 아무리 힘주어 고백할지라도 그 성경말씀을 들추어내어서 이모저모 전체적으로 깨닫지 아니하면 그 고백은 의미가 없는 것이 됩니다. 성경 전체를 가르치고 믿는 데로 자꾸 전진해가야 합니다. 그래야 참 교회가 되고 참 구원의 신앙이 되기 때문입니다. 이런 교회는 예수님께서 음부의 권세도 이길 수 없다고 하셨습니다. 구원의 신앙이 확실히 보장됩니다. 16세기 교인들은 바로 이런 교회를 찾아 들어갔습니다. 다음에 이어서 하시지요.
 
○기 도
    자비하신 아버지여, 아직 저희가 죄인으로 존재하고 악만 행할 때에 그리스도 예수께서 대속의 죽음으로 죄를 다 사해주시고 영원한 생명을 주심으로 이렇게 주의 말씀을 듣고 알게 되옵나이다. 전에는 도무지 무슨 말인지조차 알 수 없었던 저희에게 들을 귀가 있도록 중생케 하시고 자랄 수 있는 생명의 양식으로 나의 사실로 받을 수 있게 하시옵나이다. 주님의 크신 은혜를 감사하옵나이다. 오늘날 설교는 많으나 하나님의 말씀은 기갈인 때에 저희에게 이런 귀한 말씀을 주시사 특히 저희가 마음을 두고 살아야 할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를 잘 배울 수 있도록 하시오니 감사하옵나이다. 주님의 교회가 서게 될 때 무엇보다 하나님의 말씀이 있고 거기에 생명이 나고 더 나게 하심을 저희가 믿사옵나이다. 또한 진정 하나님의 말씀인 것을 구분할 수 있도록 교회의 신앙고백의 터 위에 교회가 서서 주께서 말씀을 하신 사실을 다 가르치게 하시옵나이다. 저희가 주의 그 언약의 말씀을 믿고 사도들의 신앙고백의 노선에서 유유히 흘러온 검증된 유산인 신앙고백을, 선진들이 그릇된 이단들과 싸워서 내놓은 그 정신을 저희도 잘 이어받아 확증하고 서게 되었사오니 주님, 그 초석 위에서 힘써 하나님의 말씀을 바로 구분하고 또한 풍성히 깨닫는 데로 나아가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상고할 문제
1.이 세상에 나타난 교회가 무엇인가? 간단히 말해보라.
2.주께서 교회에 주신 권세가 무엇인지 말해보라.(우리 교회는 이 권세를 합당하게 행사한다고 생각하는가?)
3.중생(구원)이 어떻게 되는지 말해보라.(말씀이 왜 중요한가?)
4.누구나 다 하나님의 말씀을 설교한다고 하는 오늘 우리 시대의 교회는 무엇이 반드시 필요한지 말해보라.(무엇이 참된 설교를 가름하는가?)
5.교회 역사에서 어떤 신앙고백을 내놓았는지 상고해보고 말해보라.
6.오늘 말씀을 요약 정리해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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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교단 대한예수교 장로회
* 교회명 분당 하나로교회
* 담임목사 이상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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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연락처 http://www.hanarochu.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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