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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에 대하여(제4강) 하나님의 말씀의 중요성(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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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gksk 작성일15-01-13 23:18 조회3,268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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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4 강
하나님 말씀의 중요성⑵
엡 4:1~16

    지금 우리가 ‘교회가 무엇이냐?’ 하는 기본적인 문제를 반복 생각하고 있는데, 하나님께서 이 땅에 출현시킨 교회가 무엇을 갖추고 있느냐? 하는 것을 지난 첫 시간 생각했습니다. 하나님의 교회가 이 세상에 나타나게 되면 반드시 갖추고 있는 것이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했습니다. 이 말씀이 얼마나 중요하냐 하는 것을 지난번에 생각했는데, 오늘 반복하여 좀 더 생각하겠습니다.
 
​○교회란 생명적 유기체
    본문 1절에 “그러므로 주 안에서 갇힌 내가 너희를 권하노니...” “그러므로”는 앞에서 많은 이야기 끝에 한 말입니다. 한 마디로 하나님께서 이미 작정하신 교회를 놓고 쭉 설명하면서 “그러므로...” 합니다. 앞에 무슨 이야기를 했는지 대략 보면, 1장으로 가서 좀 보시지요. 4절에 “곧 창세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창세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셨다”고 합니다. ‘창세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지금 에베소 교회를 택하셨다’는 말입니다. 창세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누구누구’를 택하셨다는 것입니다. ‘누구누구’란 그리스도를 믿고 그에게 연합이 된 ‘지체들의 연합’입니다. 예수를 믿고 구원이 되면 ‘그리스도의 지체’로 연합합니다. 자기는 부인이 되고 그리스도의 지체가 되어 사는데, 그런 지체들이 이 땅에서 연합하면 보이는 몸, 교회입니다. 또 뒤에 9절에 “그 뜻의 비밀을 우리에게 알리셨으니 곧 그 기쁘심을 따라 그리스도 안에서 때가 찬 경륜을 위하여 예정하신 것이니.” 여기 “그 뜻의 비밀”은 ‘교회’를 말합니다. 하나님께서 창세전에 계획하셔서 품고 계셨던 ‘교회’라는 이 비밀을 “우리에게 알리셨으니...” 당시 바울을 포함한 사도들, 초기 교회에 비로소 “알리셨으니 곧 그 기쁘심을 따라 그리스도 안에서 때가 찬 경륜을 위하여 예정하신 것이니.” 삼위 하나님께서 협의하고 계획하고 품으셨던 ‘본체의 교회’를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셔서 희생당하심으로 비로소 나타내신 것입니다. 에베소 지역에는 에베소교회가 나타났습니다. 본체의 교회에 참여한 에베소교회가 하나님의 부름을 받아서 그 시대에 나타나서 사명을 지고 있다고 쭉 말하면서 오늘 본문에 와서 “그러므로...부르심을 입은 부름에 합당하게 행하여” 하고 말씀을 쭉 합니다.
    이 교회를 본문 12절에 가서 “그리스도의 몸”이라고 합니다. 하나님의 경륜 가운데 있는 본체의 교회를 한두 마디로 다 말할 수 없기 때문에, 그런 심오함 때문에 성경에는 여러 가지 그림으로 가르치는데, 대표적으로 ‘백성’이라는 그림과 ‘몸’이라는 그림이라고 했지요? 위에 4절에는 “몸이 하나이요 성령이 하나이니 이와 같이 너희가 부르심의 한 소망 안에서 부르심을 입었느니라.” “몸이 하나이요...” 이것은 문자적으로 ‘한 몸’을 가리킵니다. 교회는 그리스도께 연합된 ‘한 몸’이라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믿어 그 생명 가운데 연합된 공동체입니다. “성령이 하나이니...” 성령께서 우리를 십자가의 그 은덕을 입혀주셔서 죄사함은 물론이요 그리스도의 생명 가운데로 연합시키셨습니다. 성령의 사역으로 신령한 통일을 이룬 것이 교회입니다. 그래서 3절에 “평안의 매는 줄로 성령의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라” 합니다. 밑에 5절에 “주도 하나이요 믿음도 하나이요 세례도 하나이요.” 그리스도를 믿어 세례를 받고 그에게 연합된 ‘한 몸’입니다. 여기 세례란 ‘삼위 하나님의 이름 안으로’ 혹은 ‘그리스도의 몸에 연합되었다’는 외적인 표징입니다. 세례를 통하여 하나님 품속에 연합되는 것은 물론이요 이곳에 연합된 자들과 하나됨을 확증합니다. ‘과연 우리는 하나다’ 합니다. ‘한 생명 공동체’라는 것입니다. 이 생명적인 결속력은 이 세상 어느 단체에서도 흉내 낼 수 없습니다. 이런 생명적 결속력이 없다면 하나님의 교회가 맞는가? 의심해봐야 하지요.
    고린도전서 12:27에 “너희는 그리스도의 몸이요 지체의 각 부분이라” 합니다. 교회는 마치 우리 ‘몸’과 같습니다. 팔, 다리, 손발, 등이 연합하여 조직체를 이룬 것이 아니라 ‘한 사람’을 이룬 것같이 교회도 그리스도께 연결된 생명체들이 지체로 다 연합하여 ‘한 몸’을 이룹니다. “몸은 하나인데 많은 지체가 있고 몸의 지체가 많으나 한 몸임과 같이 그리스도도 그러하니라.”(고전 12:12) 몇 사람이 연합했든지 거기에 그리스도의 ‘한 사람’을 이룹니다. 물론 아직 완전한 상태에 이른 것은 아닙니다. 여러 가지 불순물이 있고 어린 것도 있어서 연약한 점이 많습니다. 그러나 ‘인격체’가 아닌 것은 아닙니다. 덜 완성된 인격체가 아닙니다. 마치 어린아이로 태어나면 눈, 코, 입, 귀, 다 있듯이 그래서 한 사람인 것과 같습니다. 아이로 태어나면 벌써 한 사람이지 아직 덜된 사람이 아니지요? 여러 가지 부족한 부분이 많아서 자라야 하고 성숙해야 합니다. 그러나 어른이 있을 것이 다 있습니다. 이목구비가 다 있지 않습니까? 그같이 교회도 이제 시작하는 교회라도 덜 갖춘 인격체가 아닙니다. 여러 부분에서 자라야 할 것이 있으나 그리스도의 몸이 틀림없습니다. 그런데 만약 ‘우리가 진짜 몸인가? 한 사람처럼 움직이는가? 그리스도에게 연합하여 한 사람처럼 움직이는 사실이 있느냐?’ 이것이 의심이 간다면 ‘주님의 참 교회가 맞는가?’ 의심해봐야 합니다. 참 교회라면 그리스도의 한 몸을 이루기 때문입니다. 그분의 생명에 다 연결된 지체들의 연합이기 때문입니다. 회개하고 주를 믿으면 그리스도와 연합하는 세례를 받습니다. 그래서 그리스도를 머리로 한, 몸·교회에 참여합니다. 이 몸에서 신령한 그리스도의 한 사람을 이루어서 하나님 앞에 나아가 그의 이름을 부르고 예배하는 이것이 교회입니다. 이렇게 거룩한 사람을 이루고 있는 것이 그리스도의 몸이요 교회입니다.

○교회의 방향과 목표
    이렇게 그리스도의 몸을 이룬 교회는 방향과 목표가 뚜렷하지요. ‘우리끼리 서로 잘해보자’는 것이 아닙니다. 본문 13절 후반부에 보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이르리니.” 이것이 교회가 목표하는 곳입니다. 그리스도의 몸의 충만입니다. 하늘에 계시는 그리스도의 몸을 목표하고 달려가는 것이 지상 교회입니다. 하나님의 품속에 있던 교회에 참여한 사람들이 이 세상 지역에서 출현하게 되면 하늘에 계시는 그리스도의 그 몸과 같이 자라갑니다.
    여기 ‘그리스도의 몸’을 잘 생각해야 합니다. 예수님의 몸이 어떤 몸이지요? 부활의 몸체이지요? 참 하나님시고 참 사람이신 그 신인(神人) 양성을 가지신 그가 지금 하늘에서 만물과 특히 교회를 다스리십니다. 교회는 구원의 복으로 다스리십니다. 그런 부활의 몸을 목표하고 이 땅에서 전진하는 것이 교회입니다. 주를 믿으면 이미 이 땅에서 그 그리스도께 신령하게 연합하여 다같이 영광의 나라에 이르는 것입니다. 주의 그 몸을 소망하고 전진합니다. 그런데 덮어놓고 ‘이리로 가자! 이렇게 합시다!’ 해서는 안 되지요? 그리스도의 영화된 몸을 목표하고, 그쪽을 방향을 잡고 지금 이 땅에서 전진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참 교회입니다.
어떻게 전진하느냐 하면, 13절에 “우리가 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어 온전한 사람을 이루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이르리니.” ‘그리스도를 믿는 일과 아는 일에 하나 되어야 한다’는 겁니다. 그리스도를 믿고 그 안에서 자꾸 배워서 그를 아는 ‘지식’이 자라가야 합니다. 혼자 독불장군처럼 아는 척하는 것이 아니라 다같이 ‘한 몸’처럼 되어서 그리스도를 배우고 풍성하게 아는 데로 나아가야 한단 말입니다. 베드로후서 3:18에 “오직 우리 주 곧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저를 아는 ‘지식에서 자라가라’ 영광이 이제와 영원한 날까지 저에게 있을찌어다.”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부터 자라야 합니다. 그를 알고 그가 하신 일을 여러모로 풍부하게 배워서 알아가야 합니다. 이를테면 그가 십자가에 죽었다는 것을 배워서 그 죽음에 우리도 함께 포함되어 죽었기에 이제 더 이상 죄 때문에 부자유하는 일이 없도록 해주셨다는 것도 확실하게 인식해야 하고, 또 부활하셨다는 것을 배워서 ‘그의 그 부활의 첫 열매가 되셔서 그에게 연합하는 자들이 다 부활한다’는 것을 확실히 보증하는 것도 인식해야 합니다. 이렇게 점점 더 풍성하게 알아감으로써 그리스도와 같이 됩니다.
    본문 앞에 12절에는 “이는 성도를 온전케 하며 봉사의 일을 하게하며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려 하심이라.” ‘봉사의 일을 한다’는 것은 온전한 사람이라야 할 수 있습니다. 어린아이 같으면 일을 할 수 없지요? 그땐 오히려 일하기보다 잘 먹고 자라는 것이 옳지요. 어린아이에게 자꾸 일을 시켜서 이것 하라 저것 하라 하는 것은 옳지 않지요? 봉사하는 일은 어른이 되어야 합니다. 어른이 되어야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같이 할 수 있습니다. 베드로전서 4:11에 “만일 누가 말하려면 하나님의 말씀을 하는 것같이 하고 누가 봉사하려면 하나님의 공급하시는 힘으로 하는 것같이 하라” 했습니다. 말을 해도 하나님의 말씀을 하려면 그 말씀이 많이 들어와야 하지요. 든 것이 별로 없으면 자꾸 사람의 말, 듣기 좋은 말을 하기 쉽습니다. 어떤 것이 옳은지, 어떤 것은 인간적인 것인지를 분별하고 판단도 하고 결정하고 갈수 있어야 합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이 들어와서 하나님의 심정이 되어야 합니다. 봉사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께서 공급하시는 힘으로 하려면 하나님께서 그런 마음을 주셔야 합니다. 그가 비상한 방식으로 주시는 것이 아니라 말씀을 자꾸 풍부히 깨닫게 하셔서, 그러면 행할 힘도 공급해 주셔서 하나님의 일처럼 하게 하십니다. 교회의 봉사는 사람의 힘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물질이나 지식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심정이 있어야 합니다. 그런 일을 여기 ‘교인이면 누구나 다 할 수 있어야 한다’고 가르칩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려 하심이라.’ 이것이 교회의 목표입니다. 개인이 얼굴을 내고 훌륭하게 되는 데에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니라 한 몸을 이룬 교회가 그리스도의 한 사람처럼 자꾸 성숙하는 것이 교회의 목표입니다.

○그리스도의 통치의 방식과 중요성
    그런데 우리가 이런 지향점을 가지고 전진하고자 하면 잘 안되지요. 우리 힘으로 안 되는 이유가 있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 대로 바로 우리는 그리스도의 ‘지체’, ‘분자’이기 때문입니다. 개체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15절에 “오직 사랑 안에서 참된 것을 하여 범사에 그에게까지 자랄지라 그는 머리니 곧 그리스도라.” ‘머리’의 지시를 잘 받아서 자라야 합니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지휘계통 아래에서 움직이는 몸입니다. 개인의 힘으로는 그리스도의 영화된 몸으로 전진할 수 없습니다. 우리 몸의 ‘머리’이신 ‘그리스도’의 ‘다스림’을 받아가야 합니다.
그가 무엇으로 다스리십니까? 우리가 아는 대로 ‘말씀’과 ‘성령’으로 다스리십니다. 지금도 하늘에 계시는 그리스도는 ‘성령’과 ‘말씀’으로 여기에 오셔서 교회를 다스리십니다. 직접 그가 오셔서 환청을 들려주시거나 환상을 보이는 방식이 아니라 ‘말씀’을 맡을 ‘사람’을 세우셔서 말씀을 하십니다. 앞에 2:17에 보면 그리스도께서 “먼데 있는 너희에게 평안을 전하고 가까운데 있는 자들에게 평안을 전하셨으니” 합니다. 예수님께서 에베소교회에 직접 와서 복음을 전하셨다고 합니다. 이는 곧 사도와 복음 전파자를 보내셔서 하신 것을 말합니다. 사도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전파하면 예수님께서 직접 오셔서 말씀하시는 겁니다. 참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때에 우리도 예수님께서 직접 오셔서 말씀하시게 되는 겁니다. 그래서 새로 창조하시는 일을 하십니다. 지난번에 본 말씀이지요? 야고보서 1:18에 “그가 그 조물 중에 (재창조 중에) 우리로 한 첫 열매가 되게 하시려고 (새로 나게 하시려고) 자기의 뜻을 좇아 진리의 말씀으로 우리를 낳으셨느니라.” 중생을 말하는데, 무슨 마술을 부려서 거듭나게 하셨다고 하지 않고 ‘말씀’으로 우리를 낳았다고 합니다. 첫 창조 때에 만물과 사람을 ‘말씀’으로 지으신 것처럼 새로 창조하는 일도, 구원하는 일도 ‘말씀’으로 하십니다.(벧전 1:23) 말씀이 정상적으로 전파되면 ‘생명’이 납니다.
    뿐만 아니라 영원한 영광에 이를 때까지 필요한 것도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했습니다. 베드로전서 2:2에 “갓난아이들같이 순전하고 신령한 젖을 사모하라 이는 이로 말미암아 너희로 구원에 이르도록 자라게 하려 함이라.” 여기 ‘구원’은 주께서 다시 오시면 이룰 ‘최종 구원’을 말한다고 했지요? 그 완전한 구원에 이를 때까지 자라게 하는 양식도 ‘신령한 젖’인 ‘말씀’이라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 아무 것도 없는 중에 만물을 다 지으시고 사람을 지으신 것도 하나님의 말씀으로, 그리고 타락한 인류를 새로 지으시는 중생도 하나님의 말씀으로, 또 영원한 영광에 이를 때까지 그 생명이 자라게 하는 것도 말씀이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중요한 말씀을 소홀히 하거나 희석하거나 대수롭지 않게 생각한다면 교회되기를 포기하는 거나 다를 바 없습니다. 개인이면 구원을 포기하는 거와 다를 바 없습니다. 하나님의 교회는 반드시 생명의 양식이 되는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강단이 있습니다. 이 말씀의 중요성 때문에 개혁교회는 상징적으로 강단을 중간에다 뒀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최고의 권위를 갖는다는 것입니다. 이 말씀에 따라 움직이는 공동체라는 것입니다. 종교 사업을 하는 공동체가 아니라, 종교적인 열심이나 훈련이나 수양하는 단체가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공급받아서 생명이 나기도 하고 그 생명이 풍성하게 자라기도 하는 ‘생명공동체’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자기 교회에 항상 말씀을 대언할 사람을 세우십니다. 오늘 본문에도 그 말을 합니다. 11절에 “그가 혹은 사도로, 혹은 선지자로, 혹은 복음 전하는 자로, 혹은 목사와 교사로 주셨으니.” 주께서 자기 교회에 ‘말씀사역자’들을 선물로 주셨습니다. 여기 사도, 선지자, 복음 전하는 자, 목사ㆍ교사는 다 말씀사역자들이지요? 이렇게 말씀을 대언할 자들을 세우시는 목적은 “12)이는 성도를 온전케 하며 봉사의 일을 하게하며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려 하심이라” 했습니다. 초기 교회에는 사도를 세우셨으나 그들 이후는 목사를 세우셔서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라고 하십니다. 물론 말씀으로 세우는 거죠? 그래서 참 교회를 식별할 때 첫째가 말씀의 순수한 전파가 있느냐 하는 것을 본다고 했지요? 16세기 교회 개혁 때에 하나님의 말씀이 가감 없이 전파된 교회가 참 교회라고 하고 그 큰 로마 교회와 맞서서 구분했지요? 그래서 많은 교인이 빠져나와 하나님의 말씀이 바로 전해지는 개혁교회로 들어갔습니다. 굳이 그렇게 할 필요가 있었던 것은 하나님께서 세우신 교회여야 하기 때문입니다. 물론 그것을 사람이 판단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의 판단으로 한 것입니다. 유일한 판단기준이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잘 들려지는 곳에서 중생자가 나기도 하고 성장하는 일도 있게 됩니다. 마치 아무 것도 없는 중에 말씀으로 이 세상을 지으신 것처럼 재창조도 말씀으로 하십니다. 그러니까 ‘우리 교회 같이하자, 우리 같이 교회하자’ 하면 교회가 되는 것이 아니라 무엇보다 그리스도의 통치를 받을 수 있는 하나님의 말씀이 있어야 합니다. 주께서 말씀으로 교회를 다스리기 때문입니다. 무슨 권력으로, 힘으로, 무슨 정치력으로 다스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으로 다스립니다. 그 다음 구절 “13)우리가 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어 온전한 사람을 이루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이르리니.” 통일을 이루어 그리스도처럼 장성한다는 것입니다. 무엇으로 하나 되어 그리스도께 더 가까이 가느냐 하면 생명의 양식이 공급되어서 간다는 것입니다. 오늘 이상한 교회도 많고 가짜 교회도 많기 때문에 말씀이 없이도 통일을 이루고 성숙한다고 할지 모르겠습니다. 만약 말씀이 없이 통일을 이룬다면 분명히 인간 공동체일 것입니다. 창세기 11장의 바벨탑과 같습니다. 얼마나 공동체가 잘 되었습니까? 한곳에 모여서 ‘흩어짐을 면하자’ 하고 사람의 이름을 높이며 똘똘 뭉쳤습니다. 극단적인 비유입니다만 그럴 가능성이 이 땅에서는 언제나 있습니다. 그러므로 교회는 무엇보다 생명적 공동체이므로 생명의 양식인 말씀이 늘 공급되어야 합니다. 신명기 4:2에 “내가 너희에게 명하는 말을 너희는 가감하지 말고 내가 너희에게 명하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의 명령을 지키라” 했습니다. 이 말씀처럼 하나님의 말씀을 더하거나 빼는 일이 없이 다 전하는 강단이 되어야 합니다. 가감 없이 해석된 설교를 듣는다는 것은 그리스도께서 지금 오셔서 음성을 들려주는 것을 듣는다는 말입니다. 주님께서 자신의 음성을 들려주실 때에 성경에 기록되어 있는 내용을 왜곡시키거나 생략하거나 보태지 않습니다. 순수한 말씀을 들려주셔서 참 백성으로 나기도 하고 자라기도 하고 이것저것을 하게도 하십니다. 모든 주의 자녀는 하나님의 말씀을 배우고 깨달아서 성령 하나님의 지도를 받아 나아가게 하여 살게 하십니다.

○교회 역사에서의 신조들
    이렇게 중요한 하나님의 말씀을 예수님께서 어디에 맡겼습니까? 당시 유대교회에 천국열쇠인 말씀을 맡기신 것이 아니고 제자들의 교회에 맡겼다고 했지요? 무엇을 보고 맡겼지요? ‘신앙고백’을 보고... 그동안 예수님을 좇으면서 하나님과 그의 하신 일을 배우고 깨달은 결과 예수님 그분을 메시아로 고백한 그 초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라’ 하시고 그 교회에 천국을 열어주는 말씀의 열쇠를 맡기셨습니다. 메시아를 고백하는 신앙고백으로 당시 유대 교회의 신앙이 틀린 것이라고 구분하셨습니다. 유대 교회도 하나님을 믿었습니다. 또 당시 구약 성경을 믿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메시아로 고백하는 ‘신앙고백’으로 참 교회를 나눴습니다.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었으나 예수님을 바로 고백하지 아니한 강단은 참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라고 구분 지었습니다. 그때는 주로 유일신 사상을 주장하는 유대 교회의 영향권 하에 있었기 때문에 교회의 교리적인 싸움이 주로 예수님을 하나님으로 믿느냐 하는 신앙고백이 중요했습니다. 단일 하나님이 아니라 삼위 하나님을 고백하는 신앙고백을 가진 강단이라야 참 하나님의 말씀이 있는 교회로 구분했습니다.
    그러나 이것도 점차 시간이 흐르자 다같은 삼위일체 교리를 고백하는 교회 가운데서도 어떤 교회는 1위 2위 3위의 동일본질로 믿지 못하고 순차로 믿었습니다. 첫째는 성부요 둘째는 성자요 셋째는 성령으로 서로 차등을 두어 믿었습니다. 그 가르침이 교회에 영향을 주자 무엇이 올바른 것인지 혼란이 왔습니다. 그래서 325년에 범 교회가 니케야라는 도시에 모여서 ‘삼위일체 하나님은 동일하고 다같은 본질이다!’ 하는 고백을 내놓았습니다. 예수님을 메시아로 똑같이 믿고 삼위일체 교리를 똑같이 고백할지라도 삼위 하나님의 동일 본질을 고백하지 못하는 교회의 강단은 그릇됨을 나눈 것입니다. 그것이 ‘니케야신앙고백’입니다. 그 이후에 교회는 또 삼위일체 교리에서 발전하여 예수님의 神性과 人性 문제를 놓고 파벌이 생겼습니다. ‘과연 예수님께서 완전한 하나님이신가? 혹은 완전한 사람인가? 완전한 사람이란 무엇을 뜻하는지?’ 등에 대한 논란으로 분열이 일어났습니다. 그래서 신성과 인성 모두가 완전하다는 신앙고백을 한 것이 ‘칼케돈 총회’때입니다. 소아시아의 도시 칼케돈이라는, 현재 터키의 어느 도시에서 451년 10월에 범 교회가 모여서 ‘그리스도의 신성과 인성은 완전한 양성이요 서로 충돌이나 분리되지 않는다’는 신앙고백으로 신인 양성 중 어느 하나만 강조하여 믿는 교회와 구분했습니다. 메시아를 똑같이 믿을지라도 참 하나님이요 참 사람임을 믿지 못하고 어느 한쪽을 믿고 가는 강단의 설교는 그릇된 하나님의 말씀임을 구분했습니다. 그와 같이 초기는 니케야신조, 또 사도신경이나 칼케돈의 결의 등을 가지고 강단의 설교가 하나님의 말씀인지 아닌지를 구분했습니다.
    그 이후 교회는 500년에서 1500년까지 깜깜한 시기가 되었습니다. 삼위일체 교리를 믿고 예수님을 메시아로, 신인(神人) 양성을 확실히 믿었어도 성경의 여러 부분에서 그릇된 설교가 쏟아져 나왔습니다. 그것이 로마 교회의 강단이지요? 그 카톨릭교회의 강단을 유심히 바라보던 개혁자들은 초기의 신앙고백이나 여러 가지 문헌들을 검토하고 성경을 연구한 끝에 사도들의 가르침과 신앙의 노선에서 크게 벗어났음을 알고 개혁을 단행했습니다. 그릇된 그들의 가르침을 바로 잡고 ‘이것이 교회요 신앙의 행위요 믿음의 도리다’ 하고 내놓은 것이 개혁 교회의 신조들입니다. 1618~19년에 유럽지역에서 모인 총회에서 사도들의 가르침과 신앙의 일치를 보게 된 것이 ‘도르트 총회의 결의’입니다. 이 결의에는 ‘신앙고백’과 ‘교회법’, 그리고 ‘예배모범’도 있습니다. 예배를 개혁하는 것도 아주 중요하기 때문에 로마 교회의 예배모범도 다시 개혁한 것입니다. 특히 신앙고백에는 소위 칼빈의 ‘5대 강령’(①전적 타락,②무조건 선택,③제한 속죄,④불가항력적 은혜,⑤성도의 견인)이라는 다섯 가지 교리를 토대로 하여 여러 개혁자의 도움으로 결의한 것이 ‘도르트신앙고백’입니다. 그때 1561년에 귀도 드 브레(Guido de Bres)라는 사람이 만든 ‘벨직신앙고백’을 함께 받았습니다. 또 1563년에 독일 팔쯔 수도 하이델베르크에서 만든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도 함께 공교회의 고백서로 받았습니다.
    그때의 결의가 스코틀랜드와 영국을 중심으로 하여 사도적 신앙고백으로 내놓은 것이 바로 ‘웨스트민스터신앙고백’과 ‘대·소요리문답’입니다. 1644년경에 모여서 장시간 연구와 기도를 거듭한 끝에 내놓은 것이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이고 대·소요리문답, 그리고 교회법입니다. 이는 다 도르트 대회의 결의 때 결정한 것을 토대로 하여 나온 공적 고백입니다. 우리 교회가 정본으로 확정해 놓은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에는 33장으로 되어 있습니다. 거기 성경관이나 신관, 교회관 등 여러 도리를 어떻게 믿을 것인가 하고 성경말씀을 요약하여 합당하게 고백했습니다. 우리가 지금 생각하고 있는 이 교회가 무엇을 갖추어야 하느냐 하는 것도 거기서 잘 가르칩니다. 이 신앙고백을 토대로 하여 설교할 수 있어야 가감 없이 사심이 없이 하나님의 말씀이 증거 됩니다.
오늘날에는 이런 보편 교회의 공적 고백을 다 갖추지 못한 강단이 너무 많기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인지 아닌지 구분하기가 어렵게 되어 있습니다. 삼위일체 교리를 똑같이 믿을지라도, 그리스도의 신인 양성 교리를 확실히 믿을지라도 성경 전체의 그릇된 해석을 바로 잡은 개혁 교회의 고백서들을 확정하여 믿는 강단이 아니면 마치 지금도 로마 교회와 같이 귀에 걸면 귀걸이 코에 걸면 코걸이 식으로 설교할 가능성이 언제든지 있습니다. 왜냐하면 ‘전 성경을 이렇게 믿는다’는 일치된 교회 고백이 없기 때문입니다. 16세기 개혁자들이 외친 ‘오직믿음’ ‘오직성경’을 강조하고 믿을지라도 공교회의 고백이 없이 하는 설교로는 단편적인 지식 몇 가지를 강조하고 나갈 뿐입니다. 성경 전체를 다 가르치고 믿는 데로 가기 어렵습니다. 그렇게 되면 정체불명의 교회에서 정체불명의 교인으로 살아가기 쉽습니다. 오늘날 막연한 신앙생활을 하는 원인은 다 강단에 있습니다. 설교가 매우 단편적이고 고백서에 따른 바른 가르침은 물론이요 성경 전체를 폭넓게 가르치지 못한 때문입니다. 성경을 다같이 믿고 오직 성경이라고 개혁자들이 말한 그것을 똑같이 강조하면서 설교할지라도 보편 교회의 신앙고백을 확정하지 못한 강단은 목사의 사심에 따라 혹은 청중들의 요구에 따라 흔들릴 수밖에 없고 단편적인 강단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물론 신앙고백을 갖다 놓기만 하면 다 사도적 교회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신앙고백을 놓고 성경말씀을 바르게도 가르쳐야 하나 전체적으로 풍성하게 가르쳐야 합니다. 그렇지 않고 그저 신앙고백을 되 뇌이기만 하면 ‘신조주의’, ‘교조주의’에 빠지게 됩니다. 개혁신앙은 성경말씀 전체를 다 믿고 가는 정신이지 몇 가지 원리만 강조하고 가는 원리주의, 혹은 근본주의가 아닙니다. 개혁자들이 ‘오직 성경으로 돌아가자’고 했던 것은 몇 가지 근본 원리만 추구하고 가자는 이야기가 아니었습니다. 성경 전체를 다 가르치고 배워서 ‘전 성경을 믿고 가자’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럴지라도 현재 우리나라 정황은 ‘신앙고백’이 필요한 때입니다. 이단도 심지어 자기 설교가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주장하는 형편 아닙니까? 그러므로 성경만 가지고 어떤 설교가 참 하나님의 말씀인지 구분하기가 어려운 시대입니다. 그래서 ‘이것이 참 교회다, 이것이 바른 신앙이다, 이것이 믿음의 도리다’ 하고 내놓은 개혁 교회의 신앙고백이 필요합니다. 교회 역사에서 그때그때마다 그릇된 가르침과 싸워서 내놓은 검증된 유산인 보편 교회의 신앙고백을 놓고 성경말씀을 보면 어느 것이 참 교회요 어느 말씀이 참 하나님의 말씀인지를 금방 구분할 수 있습니다.

○말씀의 풍성한 공급의 필요성
    특별히 우리나라 교회는 성장하지 못한다는 문제가 큽니다. 그 원인이 개인이 아닌 교회 강단에 있다는 것이 심각한 문제입니다. 강단이 부실하면 개인은 아무리 발버둥을 쳐도 성숙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바르게도 가르쳐야 하나 전체적으로 풍성하게 공급해야 할 때입니다. 풍부하게 전체적으로 깨달아가지 못하면 아주 편협된 몇 가지 지식만 가지고 신앙생활을 하게 됩니다. 아주 막연한 신앙생활에서 못 벗어나는 것입니다. 단적인 예로 10년 20년 다닐지라도 매주일 드리는 예배조차도 무엇인지 잘 알지 못하지요? 어떻게 드려야 하나님께서 기쁘게 받으시는지 잘 모릅니다. 이는 설교자의 책임이라는 것입니다. 예배는 하나님께 드리는 것인데, 그분이 어떤 분이시고 무슨 일을 하셨고 하시는지 등을 폭넓게 가르치지 않으면 그저 선언적으로 들은 몇 가지 정도의 지식으로 막연한 神 앞에서 절하는 식이 될 뿐입니다.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교회의 정체를 바로 인식하지 못하면 그 안에 지체로 참여한 개인의 정체는 말할 필요조차도 없습니다. 예배는 예배의 요소가 있고 거기에는 높으신 하나님을 부르는 노래ㆍ찬송이 있고 그분 앞에 간구하는 기도도 있고 우리 모두를 다 바치는 정신인 헌금도 있습니다. 이런 요소를 하나하나 배우고 깨달아야 하나님께서 기쁘게 받으시는 예배를 드릴 수 있는데, 이런 점들을 하나하나 전하지는 아니하고 그저 선언적으로 몇 마디 말로 ‘이렇게 하라!’ 하고 전하는 형편입니다. 그리고 자꾸 정성과 열심만 기울이면 된다는 식이니 막연한 예배를 드릴 수밖에 없습니다. 매주일 예배드리고 수년을 반복하여 드려도 항상 제자리걸음이고 막연한 인식에서 벗어나지 못합니다. 이것이 기본 신앙의 행위인데도 그렇다면 하물며 구원의 신앙이 무엇인지, 생명을 얻고 또 더 얻어가는 성숙함은 무엇으로 되는지, 실지 말씀을 통하여 된다고 하나 매우 관념적이고 추상적인 생각을 할뿐입니다. 기도 하나를 가르쳐도 자꾸 하라는 강조만 하는 경우가 많지 어떻게 하는 것이 참된 기도인지, 어떤 기도는 절대로 들어주지 않는다는 것도 있거든요. 그런 부정적인 것은 별로 가르치는 바가 없습니다. 그저 ‘열심히 하라, 그러면 다 될 것이다’ 하는 식입니다. 그런 정도인데 하물며 교회가 무엇이고, 하나님의 영광의 나라에 입성하는 관문이 교회인지 잘 알 턱이 없지요. 거기에 하나님 나라의 실현은 먼 나라 이야기가 됩니다. 물론 나름 가르칠지라도 아주 단편적이고 편협되이 가르치는 형편입니다. 일례로 제가 어제 밤에 어느 매체를 통하여 들은 설교가 ‘성령을 받자’하는 주 요지로 하는 설교였습니다. 좀 설명을 하다가 ‘성령을 받아야 합니다’ 하고 또 설명을 하다가 ‘성령을 받아야 합니다’ 하고 외칩니다. 끝까지 들어도 어떻게 받아야 하는지 그것이 무엇인지에 대한 설명은 하지 않고 자꾸 ‘받아야 합니다’ 하고 마칩니다. 거기서는 마음은 뜨거울지 알 수 없으나 인식은 도무지 바로 설 수 없습니다. 이런 것이 다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강단의 부재의 한 단면입니다. 강단은 늘 말씀을 풍성하게 전체적으로 전해져야 합니다. 한편 설교에서도 좀 전체적으로 전달되어야 알 것을 알고 믿지요. 신앙은 어리석은 데서 나오지 않습니다. 참 성도의 삶이란 무슨 요술을 부리거나 요행심을 발휘하여 사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바르게 풍부하게 깨닫는 데서 나오는 지혜로 살아갑니다.

○기 도
    거룩하신 아버지여, 아버지께서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이 세상에 보내심으로 우리의 죄를 다 사하실 뿐 아니라 영원한 생명을 허락하여 주셔서 주께 연합하고 그의 몸인 교회에서 이렇게 주의 말씀을 듣고 우리의 중생도 영원한 영광의 세계에 이르는 행보도 우리 하나님의 말씀에 있음을 깨우치시옵나이다. 말씀과 성령의 통치로써 거듭나는 일도 더 성장하는 일도 있음을 오늘 교회가 잘 알지 못한 가운데서 이리저리 하나님의 말씀을 뒤로 미루어놓는 일이 많음을 저희가 절실히 인식하고 그리스도의 지체로서 그릇으로서 바로 세워주시기를 소원하옵나이다. 이 교회에서 저희가 거룩한 영광의 나라에 이를 것을 소망하며 기쁨으로 주의 명예를 드러내고 이 어두운 시대에, 교회가 무엇을 하는지조차 알지 못하는 이런 배교의 시대에 저희에게 큰 사명이 있음을 인식할 수 있도록 성령께서 도와주시옵소서. 성령의 능력을 입고 하나님의 말씀의 풍성한 인식을 가지고 제사장적 사명을 수행할 수 있기를 원하옵나이다. 주변에는 아직도 주의 말씀의 손길이 밝히 미치지 못하여 방황하는 자들이 많사오니 주님, 이런 자들에게 밝은 빛의 말씀을 전하는 그릇들로 저희를 다 써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상고할 문제
1.교회가 누구와 어떻게 유기적으로 연합되어 있는지 말하고, 이것이 어떤 형태로 드러나는지 말하라.
2.교회의 방향과 목표가 무엇이며, 어떻게 그 목표를 향하여 전진하는지 말해보라.
3.그리스도의 통치 방식을 말하고, 왜 그것이 중요한지 말하라.
4.교회의 ‘신앙고백’이 왜 필요하며, 그것이 교회 역사에서 어떻게 나타났는지 말해보라.
5.오늘 현실의 교회의 한계가 무엇인지 말하고, 그 대처방안을 말해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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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교단 대한예수교 장로회
* 교회명 분당 하나로교회
* 담임목사 이상주
* 교회주소 경기도 성남시 분당구 이매동 120-2 성우빌딩(신한은행)5층
* 연락처 http://www.hanarochu.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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