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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에 대하여(제5강) 하나님 말씀의 중요성(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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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gksk 작성일15-01-13 23:28 조회3,540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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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5 강
하나님 말씀의 중요성⑶
엡 4:1~16
 
    지금 우리가 교회가 무엇이냐 하는 것을 반복해서 생각하고 있는데, 지난번에 하나님의 교회는 하나님의 말씀이 잘 갖추어져 있다 하는 점을 생각했는데요, 오늘 역시 하나님의 말씀이 얼마나 중요하냐 하는 문제를 반복 생각하겠습니다.
 
○교회에 말씀을 맡기신 이유
    예수님께서 “내 교회를 세우리라” 하시고 이 교회에 천국 열쇠인 말씀을 맡기셨지요. 예수님께서 자기 교회에 천국 열쇠인 말씀을 맡기신 이유는 첫째, 천국을 닫고 열어주는 일을 하라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16:18에 “내 교회를 세우리라” 하시고 “19)내가 천국 열쇠를 너희에게 주리니, 너희가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새번역) 하셨습니다. 교회가 천국 열쇠인 말씀을 전하면 천국 백성 될 자가 나올 것이므로 그들을 받아서 천국 백성으로 살도록 하라는 것입니다. 종교 사업을 하라는 것이 아니라 이 세상 가운데 처하여 살아가는 죄인을 구원하여 영원한 생명을 발휘하며 살도록 하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말씀’을 하셔서 처음 만물을 지으시고 사람을 지으신 것처럼 천국 백성으로 창조하는 일도 말씀으로 하십니다. 야고보서 1:18에 “그가 그 조물 중에, (즉 그리스도께서 재창조를 하시는 중에) 우리로 한 첫 열매가 되게 하시려고 자기의 뜻을 좇아 진리의 말씀으로 우리를 낳으셨느니라.” 첫 창조 때는 만물을 지으시고 사람을 맨 나중에 지으셨지요? 그러나 여기 재창조 때는 사람을 첫 열매로, 처음 지으신다고 합니다. 죄와 죽음의 권세에서 도무지 벗어나지 못하는 죄인을 새로 지으셔서 죄를 이기되 점점 더 깨끗하게 회복해 가시다가 주님 다시 오실 그때에 만물까지도 다 회복하실 것입니다. 이런 재창조의 일을 하실 때에 “진리의 말씀으로 우리를 낳으셨다”고 합니다. 마치 첫 창조 때에 하나님께서 아무 것도 없는 중에 ‘빛이 있어라! 사람도 있어라!’ 그렇게 하신대로 다 되었지요? 그처럼 재창조 때도 주께서 자기 교회에 오셔서 ‘새 사람이 되어라!’는 말씀을 하시면 그대로 다 되게 하십니다. 그 말씀을 들을 때에 믿음이 생기고 하나님만 믿는 생명이 나는 것입니다. 그렇게 진리의 말씀으로 우리를 낳습니다. 그러니까 ‘말씀’이 이처럼 중요하지요. 시편 33:6에 보면 “여호와의 말씀으로 하늘이 지음이 되었으며 그 만상을 그의 입 기운으로 이루었도다!” 이게 첫 창조를 말하는데요, ‘만물이 있어라!’ 하니까 있었고 ‘사람이 있어라!’ 하니까 그의 입 기운으로 사람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 똑같은 말씀이 ‘이러 이러하다!’ 하시면 그 말씀을 믿는 사람은 그분의 입 기운으로 새 사람이 됩니다. 그래서 베드로전서 1:23에 “너희가 거듭난 것이 썩어질 씨로 된 것이 아니요 썩지 아니할 씨로 된 것이니 하나님의 살아 있고 항상 있는 말씀으로 되었느니라” 합니다. ‘살아있는 말씀’, 그의 입 기운이 사람을 거듭나게 합니다. 이런 큰일을 일으키는 주의 입의 말씀을 자기 교회에 맡기신 것입니다.
    또 그뿐 아니라 둘째, 그렇게 새로 거듭나게 한 생명이 영원한 나라에 이를 때까지 자라도록 교회에 말씀을 맡기셨습니다. 베드로전서 2:2에는 ‘신령한 젖’이라고 했지요? 마치 아이가 태어나면 엄마가 젖을 물려서 자라도록 하지 않습니까? 그렇듯 사람이 중생하면 교회로 다 불러 모아서 신령한 젖인 말씀을 공급하십니다. 그래서 알 것을 알고 하나님의 사람답게 변화시켜 가십니다. 이 말씀이 ‘최종 구원에 이르도록 자라게 한다’고 했지요? 생명의 양식을 공급하여 지식도 자라고 마음도 자라고 의지도 자라게 하셔서 하나님의 자녀답게 변화시켜 가는 것입니다. 이처럼 새로 나게 하고 생명이 더 자라게 하는 주의 입의 ‘말씀’을 자기 교회에 맡기셨습니다. 그래서 천국의 문을 열어주는 사명을 행하게 하셨습니다. 교회가 이렇게 천국 백성 될 자 아닌 자를 확증하는 권세를 가졌습니다.
 
○참 교회를 식별하는 방식
    그렇다면 문제는 이 땅에 예수님의 교회가 어디에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참된 주님의 교회를 어떻게 알 수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앞에서 말한 대로 첫째, 예수님께서 천국을 닫고 여는 열쇠인 ‘하나님의 말씀’이 있는 교회는 되지요. 말씀을 최고로 높이며 전하는 강단이 있으면 됩니다. 천국에 들어갈 자들이 들어갈 수 있도록 문을 열어주는 ‘열쇠’가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또 천국에 들어온 자들이 먹고 자라야 할 ‘양식’이기 때문입니다. 이 ‘말씀’이 사람을 거듭나게 하고 자라게 하는 양식인 것을 확실히 하는 교회라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참 교회되기 어렵습니다. 16세기 개혁 교회도 당시의 거의 모든 강단이 하나님의 말씀을 더하기도 하고 빼기도 하고 함으로써 구원의 신앙을 잃어버렸을 때에 ‘하나님의 말씀’을 최고의 가치로 알고 전하는 강단이 되어야 한다고 외쳤습니다. 그래서 많은 교인들이 로마 교회에서 강단을 개혁한 교회로 자리를 옮겨 구원의 신앙을 찾았습니다. 물론 당시 로마 교회도 하나님의 말씀을 전한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강단을 개혁하면서 함께 ‘성경을 이렇게 믿어야 한다’는 ‘신앙고백’을 내놓았습니다. 그때나 지금도 천주교는 예수님을 메시아로 믿을 뿐 아니라 삼위일체 교리를 확실히 믿고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습니다. 그러나 성경을 전체적으로 그릇되게 구부려서 가르쳤기에 구원의 신앙에서 이탈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말씀의 권위를 훼손당하지 않기 위하여 ‘전 성경’을 체계화하여 ‘이것이 참된 교회요 이것이 참된 신앙의 행위요 이것이 참된 믿음의 도리다’ 하는 ‘신앙고백’을 내놓았습니다. 그 신앙고백 위에서 설교하는 교회라야 개혁 교회요 참된 교회라고 했습니다.
    이 문제는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을 메시아로 믿으며 삼위일체 하나님을 확실히 믿을지라도 성경 여러 부분에서 더하고 빼고 구부려서 설교하는 강단이 많습니다. 심지어 이단적인 설교를 하는 강단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첫째, 하나님의 말씀을 더하고 빼지 않고 증거하는 순수한 설교라야 합니다. 또한 성경 전체를 체계 있게 고백한 ‘보편 교회의 신앙고백’을 준거틀로 가지고 있는 교회라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너도 나도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친다고 하기 때문에 구분할 수 없게 됩니다. 어떻게 믿는다는 일치된 준거틀, 신앙고백이 없으면 너도 나도 다같이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주장할 수밖에 없습니다. 예수를 믿고 삼위일체 교리를 믿고 성경을 다 믿는다 할지라도 1천년의 세월동안 그릇된 신앙으로 빠져들었던 로마 교회가 우리에게 뼈저리게 교훈해 주고 있지 않습니까? 지금도 개혁교회의 ‘신앙고백’이 없으면 그와 같이 더하고 빼는 설교를 하는 강단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러면 구원의 신앙에서 이탈할 수 있습니다.
    우리나라 교회의 가장 큰 문제는 말씀을 전체적으로 풍성하게 전하지 못하여 안자란다는 데에 있습니다. 지금 비판적으로 이야기하는데요, 우리를 지금 냉정히 보기 위함입니다. 오직 성경이 최고의 권위라는 말은 하면서도 실지 ‘우리 교회도 성경 전체를 이렇게 믿는다!’는 ‘신앙고백’ 위에 ‘서약’하지 않기 때문에 성경 전체를 가르칠 ‘책임’을 못 느낍니다. ‘신앙고백’을 한 대로 그 초석 위에서 성경을 전체적으로 가르치고 더 가르쳐야 자라갈 수 있는데, 고백한 준거 틀이 없으니까 그저 몇 가지 원리나 혹은 천당 가는 도리 몇 가지 정도만 가르칩니다. 그러면 설사 중생했을지라도 잘 자랄 수 없습니다. 자라지 못하면 무엇이 옳고 무엇이 그른지, 무엇이 구원의 신앙이고 무엇이 아닌지를 잘 구분 못하는 문제가 생깁니다. 말씀이 풍성하게 밝혀져야 그 기준에 의하여 무엇이 옳고 무엇이 그른지 식별할 수 있지 않습니까? 그런데 그 식별기준인 말씀이 빈약하기 때문에 무엇이 참인지 그른지 구분할 수 없습니다. 어떻게 믿어야 하는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막연하고 막 방만할 뿐입니다. 어린아이는 생활 하나도 자기 스스로 제대로 정리정돈을 할 줄 모르지 않습니까? 그처럼 성숙하지 못하니까 교회 안으로 바깥으로 많은 문제를 내함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사도가 고린도 교인들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고린도전서 3:1 “형제들아 내가 신령한 자들을 대함과 같이 너희에게 말할 수 없어서 육신에 속한 자 곧 그리스도 안에서 어린 아이들을 대함과 같이 하노라!” 이는 오래 믿었어도 아는 것이 별로 없어서 어린아이 같은 신앙을 말합니다. 이를 ‘육신에 속한 자’라고 합니다. 2절에는 “내가 너희를 젖으로 먹이고 밥으로 아니하였노니 이는 너희가 감당치 못하였음이거니와 지금도 못하리라.” 어려운 도리는커녕 아주 단순한 기초 도리조차도 잘 이해하지 못하니까 그저 세월 속에서 계속 반복할 뿐이라는 것입니다. 3절에는 “너희가 아직도 육신에 속한 자로다 너희 가운데 시기와 분쟁이 있으니 어찌 육신에 속하여 사람을 따라 행함이 아니리요.” 자라지 못하면 이렇게 됩니다. 시기와 분쟁이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세월이 간 고린도교회가 그런 형편입니다. “사람을 따라 행함이 아니리요.” 이 세상에서는 ‘그 사람 참 사람답다’ 하면 무슨 말이 됩니까? 칭찬의 말이 되지요? 그런데 교회 안에서 ‘그 사람 참 인간적이다’ 하면 욕이 됩니다. 고린도교회가 지금 그런 형편입니다. 인간적인 생각과 인간적인 감정, 인간적인 의지를 가지고 행동하는 수준이란 말입니다. 오래 믿었어도 아는 것이 별로 없게 되면 그렇게 됩니다.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에서 자라가라!
    성경을 찾아보시지요. 베드로후서 3:18 “오직 우리 주 곧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그를 아는 지식에서 자라가라 영광이 이제와 영원한 날까지 그에게 있을지어다!” 구원의 은혜와 지식의 근원이신 그리스도를 알아가라는 것입니다. 여기 ‘자라가라!’는 말은 진행형입니다. 그리스도를 계속하여 알고 또 알아서 지식이 늘어나야 하겠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사람을 알아도 자꾸 알고 알면 더 깊은 교통을 하잖습니까? 그처럼 그리스도를 자꾸 알아가라는 것입니다. 하루아침에 다 알 수 없지 않습니까? 2, 3년 다녀서 다 알 수 없지요. 그런데 그를 우리가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그리스도를 알기 위해서 기도를 자꾸 하면 알 수 있습니까? 그리스도를 더 깊이 알기 위해서 우리가 종교적인 경험을 통하여 신앙의 체험을 통하여 잘 알 수 있습니까? 그리스도는 하나님이시라, 하나님을 아는 것은 그가 하신 ‘말씀’을 들어야 압니다. 로마서 10:17에 “그러므로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 ‘들음은 그리스도께서 하시는 말씀에서 비롯된다’고 합니다. 그런데 들려주는 것이 시원치 않으면 중생할 수 없고 설사 중생했을지라도 자랄 수 없습니다. 이처럼 강단의 책임이 큽니다.
    요한복음 5:39에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줄 생각하고 성경을 연구하거니와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언하는 것이니라.”(개정역) “영생을 얻는 줄 생각하고 성경을 연구하라” 했습니다. 당시엔 물론 구약성경이지요? 구약 성경은 영생을 주는 그리스도를 증거했는데, 유대인들은 그때 그 성경을 상고하면서도 그리스도를 배척했습니다. 하나님의 음성을 잘못 들은 거죠? 편협되이 구부려서 들었기 때문입니다. 혹은 그 성경을 협소하게 들었기 때문입니다. 오늘에도 이 구약을 배워서 그리스도를 더 잘 알고 믿어야 하고 또한 신약을 연구하여 그리스도를 더 깊이 명료히 알아야 영생의 신앙의 됩니다. 그런데 단편적인 설교 몇 번으로 된다고 생각하면 어떻게 됩니까? 한두 해만 다니면 평생 배울 말씀을 다 배운 것같이 할 수 있습니까? ‘더 배울 것이 무엇인가?’ 하고 자꾸 가르치고 배워야 합니다. 그런데 오히려 ‘더 배울 것이 뭐가 있느냐? 열심히 충성봉사만 잘하면 되지?’ 하는 설교의 내용이라면 제대로 자랄 수 없습니다. 설교가 단편적이면 하나님 나라의 이모저모를 못 배워서 그 나라 백성으로 잘 자랄 수 없습니다. 많은 설교를 할지라도 단조로우면 하나님 나라의 정보가 없어서 바른 지식이 안자랍니다. 소위 감동을 주고자 하는 설교를 많이 하지 않습니까? 그렇게 하면 이모저모 차서 있게 전체적으로 준비하여 전할 수 없습니다. 감정에 호소하고자 하는 데만 관심이 쏠려서 차분히 전체적으로 준비할 수 없습니다. 이건 제 경험입니다. 그렇게 되면 인식이 바뀌지 않습니다. 가슴은 뜨거울지 알 수 없어요. 그러나 인식이 바뀌지 않으면 사람 행동은 제대로 나오지 않습니다. 믿음이 성장할 수 없습니다. 지각에 호소하여 인식이 자꾸 변화되어야 어디에 속지 않고 균형 잡힌 신앙이 됩니다.
    여기 베드로 사도가 ‘오직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에서 자라가라!’ 하는 이 말씀을 크게 들어야 합니다.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이란? 물론 처음에는 우리의 죄를 대신하여 그가 십자가에 죽으셨다는 데서부터 시작하지요? 그의 대속의 공로에 대한 지식이 서서 믿음이 시작이 됩니다. 그러면 이제 다 배워버린 것이 아니고 그리스도를 이제 알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 안에서 지식이 점점 자라야 합니다. 그가 우리를 위하여 낮아지셔서 하신 일이 있고 높아지셔서 하신 일이 있지 않습니까? 오늘 본문에도 9절에 보면 “올라가셨다 하였은즉 땅 아랫 곳으로 내리셨던 것이 아니면 무엇이냐?” 합니다. ‘올라가셨다’ 했으니까 그 전에 땅 아래 세계에까지 내려 오셨다는 것입니다. 이 땅에 낮아지시기 전에 이미 그는 삼위 하나님과 태초에 만물을 지으셔서 영광스러운 나라를 세상 형태로 짓지 않았습니까? 장차는 영원한 영광이 충만할 것을 내다보고 만물을 지으시고 사람을 지으셔서 위탁하셨는데 그만 사람이 범죄하여 이 세상은 더 이상 거룩한 천국이 아니고 인간의 나라가 되어버렸지요. 그래서 그리스도를 보내실 것을 약속하셨습니다. 그와 관련된 모든 말씀이 구약이지요. 구약의 이모저모를 배우고 알아서 그리스도를 더 잘 믿는 신앙이 견고해야 합니다. 또 선지자들의 약속을 따라 낮아지신 그리스도는 우리의 구원을 위함입니다. 우리를 극진히 사랑하사 아버지의 뜻을 따라 이 땅에까지 낮아지셔서 온갖 고난을 받으신 사실을 복음서를 통하여 배우고 그를 더 알아가야 합니다. 그리고 십자가에 죽으신 그는 하나님의 엄위로우신 심판을 받으셨습니다. 그의 수난 안에서 하나님은 ‘사랑이시다’ 하는 것만 보는 것이 아니라 죄는 조금도 용납지 않는, 자기 아들이라도 용납지 못하시는 공의를 배우는 것입니다. 진정한 사랑은 ‘의’가 겸비되어야 합니다. 가령 부모가 진정 자기 자식을 사랑한다면 그릇된 것을 바로 잡고, 때로는 오래도록 죄를 지적하고 고치도록 바라는 엄위가 있습니다. 남의 자식이면 그렇게 못하지요? 그같이 그리스도 안에서 아버지의 엄위ㆍ의를 배우고 또한 우리를 구원하시고자 하신 큰 사랑도 같이 배우는 것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삼위 하나님의 크신 사랑을 배웁니다. 또 그가 높아지셔서 하신 일도 많지요? 부활로써 높아지셔서 하나님 나라를 다 가르치시고 승천하여 하나님 우편에 앉으심으로 만물을 다스리고 특히 교회의 머리가 되시지 않았습니까? 거기서 만물이 왜 있고 또한 교회의 머리로 계시는 그는 교회를 무엇으로 다스리시는지? 교회는 무엇인지 등을 다 배워서 그리스도를 더 명료히 알아가야 합니다. 말씀과 성령을 보내셔서 교회를 다스리신다는 것을 오늘 잠깐 생각하는데, 본문 1절부터도 ‘우리를 불렀는데 그에 합당하게 행하여 특히 성령의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라’ 합니다. 이것이 무슨 의미인지, 어떻게 하나가 되는지, 또 세례도 나오는데 그것이 무엇인지 등등 이렇게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이 자꾸 자라가야 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가르치는 설교가 빈약하니 더 지식을 가질 수 없습니다. 그저 몇몇 가지 지식을 가지고 마음을 다지고 또 다짐하고 하는 작심삼일의 신앙생활을 할뿐입니다. 그런가요? 그저 감정적인 데서 왔다 갔다 하는 것입니다. 지식이 안자라면 그렇게 됩니다.
    우리가 건강에 대한 강의를 듣는다고 한번 생각해 봅시다. 한 주에 한 강씩 1년을 들으면 52강이지요? 52강을 들었다면 ‘아, 건강은 이렇게 지켜야 하겠구나’ 하고 ‘내 몸 관리를 이렇게 하면 되겠구나’ 하지 않습니까? 실천은 설사 할 수 없어도 인식은 어느 정도 섭니다. 하물며 설교는 단순한 정보가 아니지요? 전능자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창조도 하고 자라게도 하는 말씀입니다. 그런 말씀을 1년 52강을 들었는데도 별로 인식이 바뀌지 않았다면 분명히 그 설교가 큰 문제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으로 차서 있게 전달이 되었다면 그럴 수 없습니다. 작년과 지금의 인식이 크게 바뀌지 않았다면 분명히 내 정성과 열심히 부족한 것이 아니라 강단의 설교가 하나님의 말씀인지 의심해야 합니다. 물론 선언적으로 이것저것을 다 말하기 때문에 반복하여 듣게 되면 무엇이든 다 아는 것같이 착각을 일으킵니다. 그래서 실지 물어보면 말을 할 수 있습니다. ‘교회가 뭐냐?’ 하면 척 대답할 수 있습니다. ‘성경이 뭐냐?’ 하면 척 말합니다. 그런데 그 말이 시원치 않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에서 나온 합당한 말이 아닙니다. 자기 경험에서, 신앙·종교적인 인식에서, 어깨너머로 배운 대충의 것을 감 잡고 때려잡아서 말하는 것뿐입니다. 불명확하고 자기도 모르는 이야기를 막연히 합니다. 마치 만화로 된 성경 한권을 그 자리에서 다 읽고 나서 ‘나는 하나님의 말씀을 다 안다’ 하고 착각하는 것과 비슷합니다. 요즘 아이들 성경 만화로 된 책을 보지 않습니까? 그래서 성경을 대충 다 안다고 이야기해요. 이 얼마나 큰 착각입니까? 한 2~3년만 다니면 성경을 거의 다 알아버린 사람처럼 착각합니다. 이것은 자기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강단이 문제라는 것입니다. 전체적으로 가르치지 않았던 것입니다. 매일 되뇌기만 하는 식입니다. 그러니 ‘내가 좀 부족했지, 더 열심내야지, 이제 좀 되겠지, 아니야 좀 더 열심내야지’... 뭐 이런 식으로 몰고 갑니다. 빈약한 가르침의 내용이 반복이 되니까 그 이상 무엇이 없는 것같이 생각합니다. 그런 지식으로는 매우 희미하고 막연합니다. 천국 하나만 생각해도 대개 죽으면 가는 천당을 생각하지 않습니까? 저 피안의 세계만 꿈꾸면서 그저 이 땅에서는 대기 상태로 살아갈 뿐입니다. 이것처럼 막연한 일이 어디 있습니까? 하나님께서 그러라고 우리를 구원하셨습니까?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마 4:17) 하지 않았습니까? 그리고 십자가의 죽고 부활하심으로 하나님 나라가 현실로 전개되었습니다. 예루살렘교회 형태로 시작되지 않았습니까? 실현되었습니다. 지금까지 그 주의 교회를 통하여 현저히 구현되어 왔습니다. 현실입니다. 그런 천국을 그저 죽으면 가는 천당만 생각한다면 이것이야 말로 구원 얻지 못하는 신앙입니다. 물론 이 땅만 전부로 알고 가는 천국관도 문제입니다만 예수님께서 분명히 교회 형태로 구현하신 천국을 현실적으로 감지하지 못하는 교회라면 매우 비현실적인 단체입니다. 정체불명의 단체입니다. 강단이 그래서야 되겠습니까? 강단이 추상적이고 감정적이고 하나님의 말씀을 전체적으로 풍성하게 전하지 못한다면 예수님께서 세우신 교회를 실현할 수 없습니다. 그저 개인적으로 왕래할 뿐이겠지요.
 
○주께서 교회를 통치하시는 방식-말씀과 성령으로
    에베소서 1:22에 “또 만물을 그 발아래 복종하게 하시고 그를 만물 위에 교회의 ‘머리’로 주셨느니라.” 오늘 본문에도 있지요? 15절에 “오직 사랑 안에서 참된 것을 하여 범사에 그에게까지 자랄지라 그는 ‘머리’니 곧 그리스도라.” 그리스도께서 교회의 ‘머리’로 표현한 것은 그가 교회에 ‘생명’을 주시는 분이고 교회의 ‘주인’이라는 뜻입니다. 교회는 사람의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가 다스리십니다. 그리스도의 다스림 하에 들어가서 복종하면 주께서 분명히 보호하시고 인도하십니다. 그런데 만약 주의 다스림을 받지 못하고 간다면 그리스도의 지체됨이 의심됩니다. 다수가 주께 불순종하면 교회됨을 포기하는 것입니다. 물론 어느 교회나 다 주의 다스림을 받아간다고 할 것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다스림을 안 받는다’ 하는 교회는 하나도 없습니다. ‘교회’라는 이름을 쓰는 단체는 다 그리스도의 통치 아래에 있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여기서 우리가 생각할 것은, 그리스도께서 어떻게 교회를 다스리느냐 하는 것입니다. 그가 ‘무엇으로’ 다스려서 교회를 복종하게 하시느냐 하는 것입니다. 무엇으로 통치하지요? 우리가 너무나 잘 알듯이 하나님의 ‘말씀’과 ‘성령’입니다. 말씀을 하시고 그 말씀을 쓰시는 성령께서 교회를 다스려서 보호하고 이끄십니다. 그래서 말씀과 성령은 별개로 각각 우리를 지도하고 인도하시는 것이 아니지요? 동전의 양면같이 한쪽에서 말씀이 들려지면 다른 한쪽에서 성령이 돕습니다. 말씀을 배우고 깨닫게 하고, 성령께서 깨닫게 하시고 힘도 주셔서 이끄십니다. 물론 성령께서 말씀에 매이는 분은 아닙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하신 말씀을 쓰셔서 역사하시는 분입니다. 성령의 감동으로 계시의 말씀이 기록되지 않았습니까? 그래서 이 말씀은 성령과 같이 갑니다. 성령이 역사하실 때 말씀을 쓰셔서 하시고, 말씀이 들려질 때 성령께서 역사하셔서 재창조도 하시고 생명도 자라게 하십니다. 이렇게 말씀과 성령이 교회에 있습니다. 이미 구약 성경에서 이 일이 약속되었습니다. 찾아보시지요. 이사야 59장입니다. 이사야 59:21, “여호와께서 또 가라사대 내가 그들과 세운 나의 언약이 이러하니 곧 네 위에 있는 나의 ‘신’과 (성신을 말하지요?) 네 입에 둔 나의 ‘말’이 (하나님의 입기운의 말이) 이제부터 영영토록 네 입에서와 네 후손의 입에서와 네 후손의 후손의 입에서 떠나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성신’과 주의 ‘말씀’이 성도, 교회 위에 계속 임하여 하나님의 사람으로 인도하신다는 뜻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성령을 보내시고 성경 말씀을 쓰셔서 교회를 다스리십니다. 영광의 나라를 목표하고 계속하여 전진하도록 성령과 말씀으로 통치하십니다.
 
○직분자를 세워서 다스림
    그리스도께서 말씀과 성령으로 교회를 다스리실 때 입노릇 할 사람을 세우십니다. 신비하게 무슨 마술적인 방식으로 통치하시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이 모인 사회이므로 그 중에 한 사람 혹은 다수의 사람을 세워서 통치하십니다. 그런데 사람을 세워서 통치하신다는 것을 크게 곡해한 로마 교회는 1천년 동안 사람이 교회의 머리로 주장했지요. 보이지 아니하는 교회의 머리는 그리스도라고 주장하면서도 보이는 교회의 머리는 사람ㆍ교황이라고 주장하여 그리스도의 자리에 사람이 앉아서 좌지우지했습니다. 그 근거를 마태복음 16:16~19을 드는데, 거기 베드로가 예수님의 대리인으로 교회의 머리로 감독자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 베드로를 계승한 것이 교황이라고 합니다. 임금 황(皇)자를 써서 사람이 교회의 임금이라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가 교회의 왕이신데 사람이 그 자리를 차지했습니다. 그를 믿고 따르는 사람을 구원의 신자라고 하여 도리어 그리스도를 못 따르게 했습니다. 사도들의 교회에서 이탈하고 구원의 신앙에서 탈락하게 했습니다.
    그런 로마 교회의 가르침이 16세기에 와서 하나님의 말씀에서 완전히 벗어난 것이 드러났습니다. 그래서 많은 교회가 교황제의 폐단에서 완전히 벗어나고자 새로운 정치체제를 갖추려고 노력했는데 그 중에 회중교회가 있습니다. 회중교회는 교황제 폐단을 완전히 버리고 회중 전체가 교회를 다스릴 권한이 있다고 주장했습니다. 직분자는 가르치는 것과 행정적인 업무만 수행하게 했지, 다스릴 권한은 없다고 했습니다. 회중 모두가 다스릴 권한이 있다고 하여 하나님의 말씀의 주장보다 사람 다수결에 의해 움직이게 되었습니다. 신본주의가 아니라 소위 민주적인 교회가 되었습니다. 교황제의 반발로 또 다른 사람 교회가 되어 하나님의 말씀에서 멀어졌습니다. 성경은 그렇게 가르치지 않습니다. 오늘 본문 11절에 “그(그리스도)가 혹은 사도로, 혹은 선지자로, 혹은 복음 전하는 자로, 혹은 목사와 교사로 주셨으니.” 이는 다 말씀 사역자들이지요? 말씀 사역자를 교회에 선물로 주셔서 말씀을 전하게 하셨습니다. 물론 12절에 “이는 성도를 온전케 하며 봉사의 일을 하게하며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려 하심이라.” 주께서 자기 몸인 교회를 세우시기 위하여 사도나 목사를 주셨습니다. 그리스도께서 하신 말씀에 복종하여 그의 다스림이 잘 서도록 세상의 통치권과 전혀 다른 권세를 교회에 위탁하셨습니다. 특히 말씀 사역자를 통하여 말씀을 하심으로 재창조를 하십니다. 말씀하시는 주께 순종하고 나오는 자를 교회가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푸셔서 천국 백성 되게 하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그 약속을 믿고 교회가 직분자의 손에서 합당하게 시행될 때 하늘에서도 인정하시고 받으십니다.
    이렇게 거룩한 주의 공동체를 다스리시는 그리스도의 뜻을 바울 사도는 너무나 잘 알고 에베소에 교회를 세운 다음 감독자를 세워서 교회를 맡겼습니다. 찾아보실까요? 사도행전 20:28 “너희는 자기를 위하여 또는 온 양떼를 위하여 삼가라 성령이 저들 가운데 너희로 감독자를 삼고 하나님이 자기 피로 사신 교회를 치게 하셨느니라.” 앞에서 본 본문 에베소서에는 ‘그리스도’께서 직분자를 선물로 주셨다고 했는데, 여기서는 똑같은 에베소교회에 ‘성령이 감독자를 삼았다’고 하지요? 그리스도의 뜻을 따라 성령께서 직분자를 세웁니다. 사도가 그리스도의 뜻을 따라 성령의 감동으로 감독자를 세우면서 염려를 합니다. 바로 뒤 29절에 “내가 떠난 후에 흉악한 이리가 너희에게 들어와서 그 양떼를 아끼지 아니하며 (30)또한 너희 중에서도 제자들을 끌어 자기를 좇게 하려고 어그러진 말을 하는 사람들이 일어날 줄을 내가 아노니.” 교회 바깥에서 교회 안으로 들어와서 양떼를 헤치는 적들이 있을 것을 말하고 또한 교회 안에서도 교회를 파괴하는 세력이 있음을 말합니다. 여기 ‘어그러진 말’이란 ‘구부러지다’는 뜻으로 말씀을 곡해하고 교묘한 논리로 그릇된 길로 인도하는 것을 뜻합니다. 실지 에베소교회는 자칭 사도라 하는 자들이 들어왔고, 니골라당이라는 이단이 생겨서 분열을 획책한 적이 있습니다.(딤후 2:15, 17, 계 2:1-7) 이렇게 교회 안팎에서 말씀을 더하고 빼고 구부려서 넘어지게 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그래서 성령께서 그리스도의 뜻을 따라 교회 직분을 세우셔서 살피고 지키게 하셨습니다. 에베소서 3:7에 보면 바울이 “하나님의 은혜의 선물을 따라 내가 일꾼이 되었노라” 합니다. 이처럼 교회의 직분은 사람이 선출하는 것이 아니라 성삼위 하나님께서 제정하시고 그리스도께서 선출하십니다. 그리스도 자기의 몸, 교회를 잘 세워나가라고 직접 직분자를 세우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직분자의 책임은 성삼위 하나님께 충성해야 합니다. 마치 그리스도께서 자기를 보내신 아버지께 끝가지 순종하심으로 그 뜻을 다 나타내신 것처럼 직분자도 그리스도의 뜻을 교회에 다 나타나도록 할 채임이 있습니다. 그 방법은 성령의 능력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바로 전하고 지키는 것입니다. 말씀이 바로 해명이 되면 그리스도께서 직접 오셔서 말씀하시는 것이 됩니다. 그래서 교회가 그리스도의 권위가 섭니다. 찾아보실까요? 로마서 10:17, 우리가 잘 아는 말씀이지요? “그러므로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 여기 ‘들음’(ajkohv)은 원문에 ‘들려지는 것’을 뜻합니다. 전파하니까 들리지 않습니까? 그 들리는 것이 ‘그리스도께서 하시는 말씀’이라고 합니다. 목사가 하나님의 말씀을 잘 전하면 그리스도께서 직접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 사도가 에베소서 2:17에서 ‘먼데 있는 에베소교회에 그리스도께서 직접 찾아오셔서 말씀을 하셨다’고 합니다. 사도와 복음 전파자를 보내셔서 그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전파할 때 그리스도께서 직접 가셔서 말씀하신다는 것입니다. 강단의 말씀이 이처럼 중요합니다. 이 말씀은 반대로 생각하면 하나님의 말씀이 설교되지 못하면 그리스도께서 오시지 않는다는 말과 같습니다. 설교가 그저 사람의 말로 끝난다면 그리스도께서는 오시지 않고 사람이 주장하고 끝나버립니다.
 
○기 도
    자비하신 하나님이여, 오늘도 저희가 어디에 속하여 살아가는지 확실히 알려주시니 감사하옵나이다. 죄 가운데 이 세상 가운데 집착하여 살수밖에 없는 저희를 구원하시되 우리 주님의 거룩한 몸에 연합하여 이 땅에서부터 이미 천국의 행보를 할 수 있도록 이렇게 보이는 주의 몸인 교회에 참여하는 은혜를 입게 하시옵나이다. 주님, 저희는 사람이고 연약한 인간이라 주님의 교회를 도무지 세워갈 수 없사오니 주께서 친히 오셔서 말씀을 해 주시고 성령께서 깨우쳐 주셔서 밝은 지식을 갖게 하여 주시옵소서. 그리스도를 알고 그 안에서 더욱 배우고 깨달아서 그 어떤 이교적인 가르침이 들어올지라도 물리치며 이 세상을 능히 이기고 그리스도께서 가라 하시는 그 생명의 길을 흔들림 없이 힘차게 걸어갈 수 있게 하여 주시옵소서.
    지금 저희가 주의 가르침을 따라 천국의 기관이요 관문이 되는 교회에 참여하게 하셨다는 은혜는 말할 수 없는 은혜요 크신 주님의 뜻 가운데서 알게 하신 은혜이옵나이다. 주께서 한없이 부족한 저희를 거룩한 그릇으로 쓰시고자 하심인줄 아오니 주님, 저희를 더욱 세우시고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에서부터 성숙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그리하여 배교의 이런 시대에, 강단이 허물어지고 참 주의 말씀을 대언하는 일이 희석이 되고 사람의 소리가 난발하는 이런 때에 주님의 참 지체들을 다 받아 함께 신령한 주의 몸을 이루고 주의 그 이름을 높이 드러내는 관문 역할을 하게 하여 주시기를 원하옵나이다. 하나님께서 하시는 그 뜻을 바라고 열복하여 가며 낮은 위치에서 항상 신령한 권세가 서는 주의 교회로 전진케 하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상고할 문제
1.예수님께서 교회에 천국 열쇠를 맡기신 이유가 어디에 있는가?
2.참 교회를 식별하는 방법을 말해보라.
3.오늘 교회의 문제가 무엇인지 말하고, 그럼 나는 어떻게 해야 하는지 말해보라.
4.주께서 교회를 통치하시는 방식을 말하라.(통치를 잘 받고 있는가?)

네이버 검색창 <분당 하나로교회>나
hanarochu.com.홈으로 들어오시면 많은 자료를 볼 수 있습니다.
* 교단 대한예수교 장로회
* 교회명 분당 하나로교회
* 담임목사 이상주
* 교회주소 경기도 성남시 분당구 이매동 120-2 성우빌딩(신한은행)5층
* 연락처 http://www.hanarochu.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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