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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의 고난 / 요 19: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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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의 고난 / 요 19:1-16


박삼우 목사


사도행전 강해 ④ 예수님의 고난 (요 19:1-16)


우리 기독교와 가장 밀접한 관계에 있는 것 중 하나가 고난입니다.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설교도 고난 이야기가 제일 많습니다. 어쩌면 예수 믿고 가장 많이 듣게 되는 단어 중 하나가 고난일 것입니다. 이유가 있습니다. 먼저 복음이 예수님의 고난을 통해 이루어졌습니다. 예수님 복음을 이루는 과정이 전부 고난이었습니다. 고난을 통해 예수님 구원역사를 성취하셨습니다. 그리고 이루어진 복음이 고난을 통해 전파되었습니다. 여러분 사도행전을 읽어보십시오.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 항상 고난이 있었습니다. 지금도 복음은 고난을 통해 전파됩니다. 그런가하면 그리스도인의 삶 속에 또한 고난이 있습니다. 성경이 말씀하는 대로 경건하게 살고자하는 사람은 고난을 받습니다. 이렇게 볼 때 기독교는 고난의 종교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이 모든 고난 중에 가장 중요하고 또 중심이 되는 것은 예수님의 고난입니다. 오늘 우리가 공부할 사도신경의 신앙고백은 바로 이 주님의 고난을 말하고 있습니다. 사도신경에서 우리가 무엇이라고 고백합니까? “본디오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으사”라고 고백합니다. 예수님에 대한 신앙고백은 먼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사오니' 라고 한 다음 ‘이는 성령으로 잉태하사 동정녀 마리아에게 나시고’ 라고 고백하고, 그리고는 예수님 본디오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으셨다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제 오늘은 이 고백을 살펴보겠습니다. 본디오 빌라도에 의해 고난을 받았다고 했으니 본디오 빌라도 대해 생각해 보아야겠습니다. 본디오 빌라도는 예수님 당시 유대나라를 다스리던 로마의 총독이었습니다. 당시 로마는 남부 유럽 전부와 아프리카 북부, 그리고 중동 아시아를 다스리고 있었던 세계 최강의 나라였습니다. 당시 유럽의 중, 북부에는 아직 국가라는 것 자체가 없을 때였으니 당시로서는 로마가 아시아를 제외한 전 세계를 다스리고 있었던 셈입니다. 본국은 황제가 다스렸고, 다른 점령지는 총독을 보내어 다스리게 했습니다. 예수님 당시에는 13명의 총독이 있었다고 합니다. 그 총독 가운데 수리아 지역을 다스리던 총독이 본디오 빌라도였습니다. 당시 수리아는 지금의 레바논과 시리아 지역을 가리킵니다. 유다는 수리아의 한 부분으로 속해 있었습니다.

본디오 빌라도에 대해 재미있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우리 한국 교회 초창기에 시골 교회에 영수라는 제도가 있었습니다. 교역자가 턱없이 모자라던 때라 교역자가 없는 시골교회에 장로님도 없을 때 집사님 중에 좀 오래 믿은 분을 선택해서 영수라고 해서 교회를 돌보게 했습니다. 영수가 교역자가 없는 교회에서는 설교도 하곤 했습니다. 어느 시골 교회에 나름대로 성경을 깊이 연구하는 영수가 있었습니다. 성경을 열심히 연구해서 설교를 하는데 하루는 이 사람이 설교를 하면서 자기가 성경에서 놀라운 사실을 발견했다고 했습니다. 그것은 다름 아니라 빌라도의 성이 원래 오씨였다는 것입니다. 교인들이 깜짝 놀랐습니다. ‘빌라도의 성이 원래 오씨라니 그러면 빌라도가 한국 사람이었단 말인가?’ 쑥덕거렸습니다. 그러고 있는데 이 영수님이 자신만만하게 설명을 했습니다. ‘빌라도의 성이 원래 오씨인데, 즉 오 빌라도인데, 다른 성으로 바꾸었다. 그래서 사도신경에 본디 오씨라고, 본래 오씨였기 때문에 본디오 빌라도라고 한 것이다. 그러니 빌라도는 성을 바꾼 사람이다.’ 라고 설명했습니다. 성경을 이런 식으로 깊이 연구하면 큰 일 납니다.

본디오가 이름이고 빌라도가 성입니다. 그는 주후 26년에서 36년까지 10년 동안 수리아의 총독으로 있었습니다. 그가 거하던 총독부는 원래 가이사랴 빌립보에 있었습니다. 예수님 잡히실 때는 유월절을 전후해서 예루살렘에서 정치적 소요가 있을 것 같다는 정보에 따라 예루살렘에 총독부를 잠시 옮겨 있었는데, 이 때 예수님을 재판하게 된 것입니다.

예수님을 죽이려고 음모를 꾸미고 또 일을 추진한 사람들은 당시 이스라엘의 종교지도자였던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이었습니다. 예수님을 붙잡았을 때 처음 끌려 간 곳도 대제사장의 집이었습니다. 당시 로마의 식민지 하에 있던 이스라엘에게 최고의 권력을 가진 자치 기구는 산헤드린 공회였습니다. 유대인의 최고회의로서 71명으로 구성되었고 공회 의장은 대제사장이었습니다. 예수님을 대제사장의 집에 끌고 갔을 때 자기들 나름대로 공회로 모여서 예수님을 심문한 것이었습니다. 물론 그 공회는 불법이었습니다. 그러나 이 공회도 사형을 판결한 권한은 없었습니다. 그래서 무리들은 사형을 결정해놓고 그것을 허락 받기 위해 빌라도에게 예수님을 끌로 간 것이었습니다.

이렇게 볼 때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은 사람은 유대 종교지도자들이라고 해야 정확할 것 같습니다. 그 중에서도 특별히 당시 대제사장 문중의 어른이었던 안나스가 문제 인물이었습니다. 원래 대제사장은 종신제였습니다. 한 번 대제사장이 되면 죽을 때까지 한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당시 이스라엘은 로마의 속국이었는데 로마가 볼 때 유대인의 구심점이 대제사장이었습니다. 로마는 유대를 잘 다스리기 위해 대제사장의 권한을 어느 정도 인정해 주고 그 대신 권력의 집중을 막기 위해 대제사장을 일 년마다 바꾸도록 하였습니다. 유대인들은 그것을 허락하는 대신에 새로 되는 대제사장을 전임자가 임명할 것을 요구하였습니다. 이렇게 타협이 되어서 당시에는 일년마다 대제사장이 나오게 되었는데 안나스는 다른 사람을 대제사장으로 임명하지 않고 자기의 네 아들과 사위를 돌아가면 대제사장에 앉혔습니다. 예수님을 죽일 당시 대제사장이었던 가야바는 그의 사위였습니다. 이러니 실질적으로 모든 권한은 안나스에게 있었습니다. 예수님을 붙잡은 다음 제일 먼저 끌고 간 것도 그의 집이었습니다. 예수님을 죽이기로 도모한 모든 일의 장본인이 안나스였습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사도신경에 안나스의 이름은 아예 나타나지도 않습니다. “본디오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으사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 예수님의 고난과 십자가 죽음의 모든 책임이 빌라도에게 떠넘겨져 있습니다. 빌라도로서는 억울하다고 할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예수님의 죽음을 결정한 사람은 빌라도라는 사실입니다. 그는 재판관이었습니다. 최종 결정은 재판관이 내리는 것이요 그 결정에 대한 책임 또한 재판관이 지는 것입니다. 빌라도만 예수님에게 고난을 가한 것 아닙니다. 그러나 그는 책임자요 대표자입니다.

주님 고난에 대한 빌라도의 행적은 좀더 구체적으로 살펴보겠습니다. 빌라도가 예수님을 재판하는 것을 복음서를 통해 살펴보면 빌라도는 예수님에게 죄를 찾지를 못했습니다. 죄를 찾지 못했다면 총독으로서 무죄를 선언하고 석방해주어야겠는데 그렇게 하지는 않고 자꾸만 정치적으로 타협점을 찾으려했습니다. 여기에 빌라도의 모순이 있습니다. 그는 진리나 공의 보다 유대인의 환심을 사기를 원했습니다.

역사가 요세푸스에 의하면 당시 빌라도는 백성들에게 인기가 없었다고 합니다. 망대는 무너지고 이곳 저곳에서 소요가 일어나고 로마 정부에서도 빌라도의 능력을 의심할 정도였습니다. 그러니 우선 안전을 도모해야겠다는 생각이 빌라도에게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빌라도는 두 가지 목적을 가지고 문제를 해결하려 했습니다. 우선은 유대인들의 비위를 건드리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민란이라도 일어나면 골치 아파지니 쓸데없이 문제를 확대하지 않겠다는 의도입니다. 그 다음은 예수님이 죄가 없으니 한 번 살려보겠다는 것입니다. 이 두 가지 목적을 두고 그는 예수님에 대한 재판을 진행하고 있습니다.

이 목적을 가지고 그가 첫 번째로 생각해 낸 것이 바라바와 예수 중 한 사람을 살려주겠다는 것이었습니다. 유월절은 유대인들에게 최고의 명절입니다. 그래서 이 날에 로마 총독부가 유대인들의 요청에 의해 죄수한 사람을 특사로 살려주는 은혜를 베풀어 왔습니다. 이 전례를 이용해서 빌라도는 유대인들에게 예수님과 바라바 중 한 사람을 살려주겠다고 했습니다. 바라바는 아주 비열한 폭도요 살인자였던 것 같습니다. 유대인들이 아주 싫어하는 죄수였음에 분명했습니다. 빌라도는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놓아주도록 요청할 것이고 그러면 예수님을 놓아줄 수 있을 것이라고 기대 했습니다. 그러나 무리들은 빌라도의 기대와는 정 반대로 바라바를 살려달라고 했습니다. 그의 첫 번째 계획은 실패로 돌아갔습니다.

빌라도가 유대인들의 비위를 건드리지 않으면서 예수님을 살려주기 위해 두 번째로 한 일은 군병들로 하여금 예수님을 희롱하며 때리도록 한 것이었습니다. 공관 복음을 보면 예수님이 사형 선고를 받고 난 다음 군병들에게 채찍질 당한 것처럼 나타납니다만 오늘 우리가 읽은 요한복음 말씀을 보면 예수님 사형 선고를 받기 전에 이미 채찍질 당했습니다. 이 부분은 요한복음이 자세하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여기에는 빌라도의 계산이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실컷 때림으로 죽음에서 건져보자는 생각이었습니다. 당시 로마 군병들의 채찍은 지금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그런 채찍이 아니라 끝에는 쇠붙이가 붙어 있는 것으로 때리면 살점이 뚝뚝 떨어져 나오는 무서운 것이라고 합니다. 그러한 채찍으로 예수님을 때리고는 또 가시 면류관을 씌웠습니다. 한 번 상상해보십시오. 예수님은 온 몸은 피로 붉게 물들었을 것이고, 가시면류관을 쓰시므로 머리마저도 피에 젖었을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빌라도는 예수님을 군중들 앞으로 데리고 나왔습니다. 그리고는 내가 그에게서 아무 죄도 찾지 못한 것을 알게 하려 함이라고 하면서 “보라 이 사람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을 피투성이 되도록 때리게 해서 처참해진 모습을 보여줌으로 무리들에게서 동정심을 유발시켜서 놓아주려고 의도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이 빌라도의 계획 역시 실패로 돌아갔습니다. 무리들은 예수님을 보자말자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소리를 질렀습니다. 결국 빌라도는 자기를 책임이 없다면서 손을 씻고는 예수님의 십자가형을 선언합니다. 생각해보면 손을 씻는 것은 말이 되지 않습니다. 자기가 결정했는데 손을 씻는다고 책임이 없어지겠습니까?

그는 예수님의 무죄를 확신했었습니다. 그런데도 그는 무리들에게 잘 보이기 위하여 자꾸만 타협을 하겠다고 나왔습니다. 재판은 타협하는 것이 아닙니다. 더욱 사람의 목숨을 죽이느냐 살리느냐 하는 문제를 타협으로 결정지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그 타협도 사람 비위 맞추는 것으로 끝났습니다. 세상과 하나님 둘 다 비위를 맞추려 했고 결국은 세상의 비위를 맞추는 것으로 끝났습니다. 실제 당시 로마의 권한을 생각해 볼 때 빌라도는 마음만 먹었으면 예수님을 얼마든지 살릴 수 있었습니다. 그러하지 못했기에 그는 책임을 질 수밖에 없습니다. “본디오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으사” 빌라도는 법적으로 예수님의 고난에 대해 법적인 책임자가 된 것입니다

그리고 또 한 가지 사도신경이 예수님이 “본디오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아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다”고 한 것은 예수님의 고난과 십자가의 역사성을 말하고 있기도 합니다. 예수님 인류의 역사 가운데 고난을 받으셨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의 고난이 동화나 전설 속에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역사 안에서 주후 26년에서 37년 사이에 수리아 총독이었던 빌라도에 의해 고난을 받으셨다는 뜻입니다. 분명하고 확실한 역사적 사건임을 못 박고 있습니다.

그러면 여기서 예수님의 고난의 성격을 한 번 살펴보십시다. 예수님 어떤 고난을 받으셨는가 하는 것입니다. 먼저 알아야 할 것은 예수님은 한 평생 고난을 받았다는 사실입니다. 사도신경에는 본디오 빌라도에게 고난 받으신 것만 말씀하셨지만, 생각해보면 그것은 주님 받으신 고난의 대표적인 것을 말씀한 것이고, 사실상 예수님은 한 평생 고난을 받으셨습니다. 예수님은 33년 동안 여러 가지 일들이 있었습니다만, 그 모든 것을 요약하면 고난을 받으신 것이 됩니다. 십자가 사건 전후로만 고난을 받으신 것이 아닙니다. 물론 십자가의 고난은 주님의 고난의 절정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전부는 아닙니다. 주님은 전 생애가 고난의 생애였습니다. 탄생부터가 고난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사람 되신 것이 고난이요 그것도 말구유에 태어나신 것은 고난이었습니다. 태어나자마자 피난가신 것도 고난이었습니다. 자라나는 과정도 고난이었습니다. 가난한 가정에서 목수의 일을 도우며 자라셨습니다. 어른이 되어서도 고난의 생애를 사셨습니다. 그래서 “여우도 굴이 있고 궁중의 새도 집이 있으되 인자는 머리 둘 곳 하나 없다” 고 하셨습니다.

이렇게 고난의 생애를 사신 예수님께서 십자가지기 전과 십자가를 중심으로 가장 큰 고난을 당하십니다. 십자가 지기 직전 그리고 십자가를 통해 주님의 고난은 절정에 이릅니다. 그래서 사도신경에는 본디오 빌라도를 통해 십자가의 고난을 주님의 고난의 대표로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예수님은 어떤 고난을 받으셨습니까? 주님이 당하신 고난은 어떤 고난이었습니까? 그것은 아픔의 고난이 있습니다. 채찍에 맞으셨고, 가시 면류관을 쓰셨고, 십자가에 매 달리셨습니다. 여러분 말이 쉬워 십자가지 그 고통을 한번 상상해 보십시오. 생살에다 못을 박아 사람을 공중에 매달아 놓습니다. 이것은 인간이 당할 수 있는 고통으로 최고의 고통이었습니다. 상상할 수 없는 아픔의 고난을 당하셨습니다.

둘째는 배신의 고난이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바로 자신의 제자에 의해 팔림을 당했습니다. 다른 제자들도 주님이 체포되는 순간 다 도망치고 말았습니다. 3년 동안 직접 양육한 제자들에 의해 완전히 배반당하신 것입니다. 죽을지언정 주님을 부인하지 않겠다고 큰 소리 치던 베드로는 조그마한 계집종 앞에서 세 번씩이나 주님을 모른다고 맹세하며 저주까지 했습니다. 이 또한 얼마나 참기 어려운 고난이었겠습니까? 배신의 고난이 있었습니다.

세 번째는 조롱을 당했습니다. 대제사장의 집에서 심문을 받으실 때 무리들은 예수님의 뺨을 때렸다. 얼굴에 침까지 뱉었습니다. 사람이 하나님의 얼굴에 침을 뱉었습니다. 이 얼마나 엄청난 모독입니까? 예수님에 대한 조롱은 빌라도의 관정에서 군병들에 의해 최고조에 이릅니다. 군병들은 예수님에게 자색 옷을 입혔습니다. 붉은 옷은 왕이 입는 옷의 색깔이었습니다. 예수님이 스스로 왕이라 한다고 해서 놀린다고 붉은 옷을 입힌 것입니다. 그의 손에는 갈대를 쥐어주었습니다. 옛날 임금들은 홀이라는 지팡이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갈대를 쥐어주면서 홀이다 하고 놀린 것입니다. 거기에다 가시 면류관을 씌웠습니다. 예수님이 빌라도에게 재판을 받은 시간은 새벽부터 아침까지였습니다. 가시 면류관을 씌워놓으니 아침 햇살에 금관처럼 빛났을 것입니다. 당신의 왕관 참 멋지구나 조롱했을 것입니다. 조롱은 십자가 위에서도 계속되었습니다.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냐 그러면 뛰어 내려라. 저가 남은 구원하였으되 자기는 구원하지 못한다.” 조롱하며 비웃었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땅에 오셔서 이런 고난을 당하셨습니다.

그렇다면 가장 중요한 사실이 남았습니다. 이렇게 주님 당하신 고난의 의미가 무엇인가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고난을 많이 당했다, 그것이 중요한 것 아닙니다. 그 의미가 무엇이냐가 중요합니다. 예수님의 고난의 의미가 무엇입니까? 세 가지 의미를 생각할 수 있습니다.

첫째는 우리로 풍성한 삶을 누리도록 하셨다는 사실입니다. 일찍이 예수님이 고난당하시기 칠백 년 전 이사야 선지자는 사 53:4-6에서 주님의 고난에 대해 이렇게 말씀했습니다. “그가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 우리는 생각하기를 그는 징벌을 받아서 하나님께 맞으며 고난을 당한다 하였노라. 그라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임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 한 마디로 우리를 대신해서 고난당했다고 했습니다.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했다고 했습니다. 우리의 허물 때문에 찔렸고 우리의 죄악 때문에 상했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주님 이렇게 고난당하심으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나음을 입었다고 했습니다. 그러니 주님은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나음을 입도록 고난을 당하신 것입니다.

생각해보면 주님은 죄 없으신 분으로 자원해서 고난을 당했습니다. 이유는 주님이 고난을 당함으로 우리가 풍성한 삶을 살게 되기 때문입니다. 이 진리가 중요합니다. 그래서 고전 8:9에도 말씀하셨습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너희가 알거니와 부유하신 자로서 너희를 위하여 가난하게 되심은 그의 가난함을 인하여 너희로 부유케 하려하심이라.” 주님이 부유하신 자로서 가난하게 되신 것을 우리로 부유케 하려 하심이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부유하도록, 우리가 풍성한 삶을 살도록 하기 위해 주님 고난을 당했다는 진리입니다.

여러분 어떻습니까? 주님이 그렇게 고난을 당하심으로 우리로 풍성케 하셨는데 과연 우리가 그 풍성함을 얼마나 누리고 있습니까? 우리로 부유하도록 주님이 가난해졌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그 보유를 누리고 있습니까? 여기 한 아들이 있습니다. 아들은 외국에 나가 고생 고생하면서 돈을 벌어 사랑하는 부모님에게 보냈습니다. 그런데 부모님은 아들이 보낸 송금 수표를 돈인지 몰랐습니다. 그래서 그것을 휴지통에 버리고 여전히 어렵게 살고 있다고 해보십시다. 이 얼마나 어처구니없는 일이 되겠습니까? 주님 우리로 부유한 삶을 살도록 고난 당하셨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부유한 삶을 살지 못하고 있다면 얼마나 어처구니없는 일이 되겠습니까?

여러분, 주님이 주신 은총을 생각해보십시오. 주님의 고난으로 우리는 죄사함 받았고 하나님의 자녀 되었습니다. 주님 안에 있는 모든 부요가 나를 위한 것입니다. 영원한 나라의 상속자도 되었습니다. 이 은총을 알아야 합니다. 그래서 누려야 합니다. 여러분 가슴을 펴십시오. 세상 것 조금 없다고 기죽을 이유가 없습니다. 우리는 세상에서 제일 부유한 사람들입니다. 당당하게 살아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주님의 고난을 헛되게 할 수 있습니다. 주님 안에서 진정 풍성한 삶을 사는 것이 주님의 고난을 헛되게 하지 않는 것임을 명심해야 합니다.

둘째, 주님의 고난에 대해 감사하는 마음을 가지는 일입니다. 내가 받을 고난을 대신 당했습니다. 얼마나 고마운 이야기입니까? 옛날에 우리나라에도 남이 벌을 대신 받는 제도가 있었습니다. 「흥부전」에 보면 흥부가 다른 사람이 맞아야 할 곤장을 대신 맞는 대목이 있습니다. 내가 죄를 지어 곤장을 맞아야 하는데 맞으면 아프니, 돈을 주고 다른 사람을 사서 그가 대신 매를 맞게 합니다. 이렇게 할 경우 대신 맞는 사람에게 충분한 대가를 치러야 합니다. 돈을 내야 합니다. 당연히 매를 많이 맞으면 맞을수록 돈을 많이 주어야 합니다.

예수님 우리 대신 당한 고난이 어떤 고난입니까? 가장 큰 고난, 말로는 다 형용할 수 없는 고난을 당했습니다. 죄 없으신 하나님의 독생자께서 나를 대신해서 매를 맞으셨습니다. 우리가 값을 지불한다면 무엇을 어떻게 지불할 수 있겠습니까? 생명을 다 드려도 부족한 것 밖에 없습니다. 평생을 울어도 만 분의 일도 값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찬송 부릅니다. “늘 울어도 그 큰 은혜 다 값을 수 없어 나 주님께 몸 바쳐서 주의 일 힘쓰리.” 그렇습니다. 주님 나를 위해 고난 당하셨으니 나는 주님을 위해 사는 것입니다. 주님이 고난 당하셨음을 신앙 고백할 때 바로 이것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나를 위해 고난 당하셨습니다. 주님 감사합니다. 주님을 위해 살겠습니다.” 고백하는 것입니다.

셋째, 예수님의 고난의 세 번째 의미는 승리로 나아간 고난이라는 사실입니다. 우리 신앙고백을 보십시오. 고난에서 십자가의 죽음으로 그 다음 부활에서 승천, 재림으로 이어집니다. 고난을 통과함으로 승리고 나아가고 있습니다. 고난으로 끝나는 고난이 아닙니다. 승리가 기다리고 있는, 승리가 약속되어 있는, 그래서 승리를 향해 나아가는 고난이었습니다. 주님은 고난당하실 때 이 승리를 바라보고 계셨습니다. 그래서 고난을 얼마든지 이길 수 있었습니다.

중요한 것은 주님의 이 고난이 우리에게도 승리의 보장이 된다는 사실입니다. 우리에게도 고난이 있습니다. 앞서 주님이 고난을 당하심으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나음을 입었다고 했지 않느냐 반문할 수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주님의 고난으로 인해 우리는 풍성한 삶을 살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이것이 우리에게 고난이 전혀 없을 뜻하는 것 아닙니다. 원칙적으로 말씀드리면 우리에게 죄로 인해 당하는 고난은 없습니다. 주님이 대신 당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경건하게 살려고 하다가 당하는 고난, 십자가 지고 주님을 따르려 하기 때문에 당하는 고난, 복음을 위해 당하는 고난이 우리에게 있습니다. 있어야 예수를 제대로 믿는 것입니다.

바로 이런 고난에 대해 주님의 고난은 승리의 보장이 된다는 사실입니다. 고난당하신 주님이 오셔서 위로하시고 힘주실 뿐 아니라 승리로 인도하십니다. 그래서 성경은 주와 함께 죽으면 주와 함께 살고 주와 함께 고난당하면 주와 함께 승리한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복음 때문에 당하는 고난이 있습니까? 예수 믿기 때문에 당하는 고난이 있습니까? 염려할 것 없습니다. 주님이 승리하셨기 때문입니다. 주님 말씀하셨습니다. “너희가 세상에서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우리는 주님을 믿고 어떤 고난 가운데서도 승리할 수 있습니다. 주님의 승리가 우리의 승리를 보장하고 있습니다.

이제 말은 맺습니다. 주님은 본디오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으셨습니다. 나를 대신해서 고난당하시고 나로 하여금 풍성을 삶을 주신 것입니다. 우리는 마땅히 이 풍성함을 누려야 합니다. 그리고 나를 위해 고난당하신 주님을 생각할 때 감사할 마음이 있습니다. 주님, 이 벌레 같은 날 위해 고난 받았습니다. 생각할수록 여기 감격이 있고 감사가 있습니다. 주님을 위해 살 마음이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주님의 고난은 승리의 보장이 됩니다. 우리도 오늘 주님을 위해 살 때 고난이 있습니다. 그러나 염려할 것 없습니다. 주님이 승리하신 것처럼 우리도 승리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 은총으로 모든 고난 가운데서 승리하면 살아가는 여러분 다 되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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