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섬김의 본을 받으라 (요 13: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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섬김의 본을 받으라 (요 13:1~17)


오늘 살펴볼 본문은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마지막 유월절 만찬을 나누시던 자리에서 있었던 일을 언급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자기가 세상을 떠나 하나님 아버지께로 돌아가실 때가 이른 줄을 아셨습니다. 십자가 죽음을 통해서 인류의 죄를 대속하시고 무덤에 장사되셨다가 삼일 만에 부활하시고, 승천하셔서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실 것을 미리 다 아셨습니다.

제자들은 십자가의 참혹함을 생각만 해도 치를 떨었지만 예수님께서는 고난 이후에 받으실 영광을 내다보시고 기뻐하셨습니다. 이제 이 세상을 떠나갈 시간이 점점 다가오는 그 때에 예수님께서 관심을 두고 행하신 것은 사랑하는 것이었습니다. 1절에 보니 “유월절 전에 예수께서 자기가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로 돌아가실 때가 이른 줄 아시고 세상에 있는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시니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의 삶은 사랑 없이는 설명할 수가 없습니다. 더구나 그 사랑은 자기의 목숨을 희생하는 사랑입니다. “14)나는 선한 목자라 내가 내 양을 알고 양도 나를 아는 것이 15)아버지께서 나를 아시고 내가 아버지를 아는 것 같으니 나는 양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노라”(요 10:) “13)사람이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면 이에서 더 큰 사랑이 없나니 14)너희가 나의 명하는 대로 행하면 곧 나의 친구라”(요 15:)고 하셨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행복자인 가장 결정적인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내가 주님의 사랑을 받는 사람이 된 것보다 더 위대한 일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신앙생활이란 결국 독생자를 아낌없이 희생하신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을 깨달아가는 과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에게 절실하게 필요한 것은 예수님께서 나를 구원하시려고 십자가에 달려 고난당하셨다는 사실을 실감나게 이해하는 것입니다.

아무리 성경 지식이 많고, 교회생활을 오래 하고, 봉사를 많이 할지라도, 하나님 아버지와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을 마음 깊이 체험하지 못했다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사랑이 없는 지식, 사랑이 없이한 교회생활, 사랑으로 하지 않은 봉사는 그 사람을 교만하게 만들뿐 다른 사람들을 유익하게 하거나 교회에 덕을 세우지 못합니다. 사랑이 없는 구제는 자기의 선함을 사람들 앞에 보이기 위한 위선적인 행동에 불과합니다.

성경은 사랑의 위대함에 대하여 자주 언급합니다. 잠언 10장 12절에 이르기를 “미움은 다툼을 일으켜도 사랑은 모든 허물을 가리우느니라”고 했습니다. 마음속에 미움이 가득한 사람은 남의 허물을 들추어내어 다투기를 좋아합니다. 그러나 사랑의 마음을 가진 사람은 모든 허물을 가려줍니다. 그러기에 사도 베드로는 “무엇보다도 열심으로 서로 사랑할지니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느니라”(벧전 4:8)고 말씀했습니다.

오늘날 우리 사회는 하루도 빠짐없이 끔찍한 사건들이 연속적으로 발생하고 있습니다. 왜 날이 갈수록 사람들이 점점 더 악해져 가는 것일까요? 범죄사회학에서는 범죄의 원인을 사회 환경적인 요인으로 돌리지만 그것은 올바른 진단이라고 볼 수 없습니다. 본질적으로 볼 때, 이웃에 대한 사랑이 없는 것이 범죄의 원인이라고 해야 할 것입니다.

이에 대하여 로마서 13장 8절 이하에 이르기를 “8)피차 사랑의 빚 외에는 아무에게든지 아무 빚도 지지 말라 남을 사랑하는 자는 율법을 다 이루었느니라 9)간음하지 말라, 살인하지 말라, 도적질 하지 말라, 탐내지 말라 한 것과 그 외에 다른 계명이 있을찌라도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하신 그 말씀 가운데 다 들었느니라 10)사랑은 이웃에게 악을 행치 아니하나니 그러므로 사랑은 율법의 완성이니라”고 했습니다. 맞는 말씀입니다. 사랑은 이웃에게 악을 행치 아니합니다.

그뿐 아니라, 성경은 여기서 한 걸음 더 나가서 사랑을 신앙의 본질과 관련시킵니다. 요한일서 4장에 보니 “7)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서로 사랑하자 사랑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니 사랑하는 자마다 하나님께로 나서 하나님을 알고 8)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나니 이는 하나님은 사랑이심이라”고 말씀했습니다.

믿음이 있는 사람인지, 믿음이 없는 사람인지를 아는 가장 결정적인 방법은 그 사람이 이웃을 사랑하는 사람인지 아닌지를 살펴보면 알 수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경외하는 하나님은 사랑이 한량없으신 분이신데,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사랑하지 않는다면 그 사람은 하나님에 대하여 알지 못하는 사람이라는 말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진심으로 믿는 사람은 누구나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따라서 사랑의 성품과 사랑할 능력이 그 사람 속에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이 사실을 알고 생활 속에서 사랑을 실천하는데 힘써야 합니다. 사랑을 하는데도 연습이 필요합니다. 사랑을 표현하는 방법을 터득해 나가야 합니다. 사랑의 표현으로서 가장 본질적인 것은 섬김의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님들, 우리 주님의 생애는 한 마디로 섬김의 삶 그 자체였습니다. 그러기에 빌립보서 2장 6절로 8절에 이르기를 “6)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 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7)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8)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이 되셨으니 얼마나 낮아지신 것입니까? 그러므로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지셨다고 한 것입니다. 종은 신분만 낮은 것이 아니라 그 마음도 낮아야 합니다. 그래야 주인을 섬길 수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낮고 천한 인간으로 오신 정도가 아니라 십자가에 달려 죽기까지 인류를 대속하시려는 하나님 아버지의 뜻에 복종하셨습니다. 죄로 멸망할 인생들을 구하시려고 목숨을 버리셨습니다. 그야말로 섬김의 극치가 아닐 수 없습니다.

제자들과 함께 마지막 만찬을 나누시는 자리에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행동을 통한 귀한 가르침을 주시기를 원하셨습니다. 그 이유는, 이제 예수님께서 하나님 아버지께로 올라가시면 제자들만 이 세상에 남겨질 것인데, 그 때 그들이 만방에 나가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신 일을 대신하려면 예수님의 마음을 가질 필요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 날 밤에 예수님께서는 저녁 잡수시던 자리에서 일어나셔서 겉옷을 벗고 수건을 허리에 두르시고 대야에 물을 담아 제자들의 발을 씻기시고 그 두르신 수건으로 닦아주셨습니다. 여러분,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제자가 스승의 발을 씻겨드려야지, 어떻게 스승이 제자들의 발을 씻길 수 있단 말입니까? 당시 유대인들은 주로 끈이 달린 센달을 신고 다녔습니다. 길은 포장이 되어 있지 않아서 한번 외출하고 돌아오면 발에 흙먼지로 범벅이 되어 반드시 물로 씻어야 했습니다.

부자 집에서는 종이 주인이나 손님의 발을 씻겼습니다. 우리나라에는 발을 씻기는 습관이 없지만, 상식적으로 남의 발을 씻기는 것은 천한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만약에 피치 못할 사정으로 남의 발을 씻기게 되었더라도 모욕감을 느낄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 주님께서는 몸소 제자들의 발을 씻겨주셨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주님의 겸손을 대합니다.

오늘날 사람들은 겸손을 하나의 장식품처럼 이용합니다. 사람들의 칭찬을 받기 위해 일부러 겸손한 척합니다. 상관 앞에서는 겸손하게 행동하지만 동료나 부하들에게는 교만하게 굽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겸손은 꾸며낸 겸손이 아니라 본심에서 우러나온 겸손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시기를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다’(마 11:29)고 하셨습니다.

꾸며낸 겸손은 금방 탄로가 납니다. 도금한 것은 언젠가 벗겨지는 것과 같습니다. 우리는 진심으로 겸손한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우리가 원한다고 되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우리 마음을 주관해 주셔야 합니다. 빌립보서 2장 5절에 이르기를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마음을 품을 때 겸손한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한국인들으로서 조만식 선생을 존경하지 않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그 분은 3ㆍ1운동에 가담했다가 옥고를 치르기도 하였고, 이승훈 선생이 세운 오산학교에서 교장으로 일한 적도 있습니다. 일제 때 신사참배를 반대하다가 순교하신 주기철 목사님은 조만식 선생의 제자였습니다. 조만식 선생은 독실한 기독교인에다 교회 장로님이었습니다. 그런데 나중에 주기철 목사님이 조 장로님이 시무하는 평양 산정현교회의 담임 목사로 부임했습니다.

어느 주일날, 주 목사님이 설교를 하려는데 무슨 일인지 그제야 조 장로님이 헐레벌떡 들어왔습니다. 당시는 다 마루 바닥에 앉아서 예배를 드리던 때라 신을 벗어서 신발장에 넣으려고 하는데 주 목사님이 “조 장로님, 예배시간에 늦었으니 거기 신발 들고 서 계십시오”라고 말했다고 합니다. 아무리 생각해 봐도 좀 심한 처사가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러나 조만식 장로님은 아무 말 없이 신발을 들고 설교가 끝날 때까지 그 자리에 서 있었다고 합니다. 설교 후에 주 목사님이 “조 장로님, 앞에 나와 기도하십시오” 그러자 조 장로님이 앞에 나와 이 같이 기도했다고 합니다. “주여 장로가 주일을 소홀히 여겼습니다. 하나님을 경홀히 여기고 예배를 방해한 죄를 회개합니다. 또 목사님 마음을 상하게 한 것을 회개합니다” 바로 이것이 겸손입니다. 만일 조 장로님이 겸손하지 않은 사람이었다면 주 목사님의 말씀을 듣고 단단히 시험에 들었을 것입니다. “명색이 오산학교의 은사요 교회 장로인 나를 성도들 앞에서 그렇게 모욕을 주다니, 내가 그래도 조선에서 알아주는 명사인데 대접을 그렇게 소홀히 하다니” 그러나 조 장로님은 조금도 그런 내색을 하지 않고 진심으로 자기의 실수를 회개했습니다.

예전에 어느 대학 교수 한 분이 권면을 받고 교회학교 교사로 봉사하게 되었는데, 다른 선생님들과 잘 어울리면서 열심히 일했습니다. 수련회 때 특강을 부탁하면 해박한 지식을 동원해서 유익하고 재미있게 강의를 했습니다. 저는 그 분이 한 번도 대학교수인 척 하지 않은 것을 보고 감동을 받았습니다. 그는 예수님을 닮은 겸손한 사람임에 틀림없습니다.

그러나 같은 대학교수라도 교만한 사람은 교회학교 교사로 봉사하라고 하면 노골적으로 싫은 기색을 보입니다. ‘이래 뵈도 내가 대학교수인데 그래 아이들이나 가르치라고, 나를 어떻게 알고 그러는지 모르겠다. 내가 명색이 박사인데 이제 갓 신학교를 나온 전도사의 말을 들으라고’ 하면서 불만을 터뜨립니다. 아는 것이 많든 적든, 나이가 많든 적든, 교회에서는 그런 것을 가지고 자기를 내세우면 안 됩니다.

사랑하는 성도님들, 교회는 하나님께서 임재하셔서 통치하시는 곳이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권위 앞에서 잠잠해야 합니다. 자기를 내세우지 말고 겸손한 마음으로 서로를 섬겨야 합니다. 목회자와 성도들이 겸손으로 서로를 섬겨야 합니다. 교회에서 귀한 직분을 맡은 사람일수록 더욱 몸을 낮추고 섬기는데 힘써야 합니다. 교회의 직분은 그 어느 것 하나, 대접 받기 위한 것은 없습니다. 오히려 섬기기 위해서 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섬길 마음이 없으면 직분을 받지 말아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의 발을 다 씻기신 후에 옷을 입으시고 다시 앉으셔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너희에게 행한 것을 너희가 아느냐 너희가 나를 선생이라 또는 주라 하니 너희 말이 옳도다 내가 그러하다 내가 주와 또는 선생이 되어 너희 발을 씻겼으니 너희도 서로 발을 씻기는 것이 옳으니라 내가 너희에게 행한 것 같이 너희도 행하게 하려하여 본을 보였노라”

열 두 제자 뿐 아니라, 예수 믿는 사람은 누구나 다 예수님의 제자입니다. 그러므로 스승이신 예수님의 겸손을 본받아 행해야 마땅합니다. 우리 속에서 교만한 생각이 고개를 쳐들 때 우리는 제자들의 발을 씻기신 예수님을 생각하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겸손한 사람이 되려면 힘쓰고 애쓰지 않으면 안 됩니다. 왜냐하면 우리 속에는 겸손히 남을 섬기기보다는 내가 먼저 대접을 받으려는 성향이 더 강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주님을 본받으려면 우리의 교만한 기질을 죽이지 않으면 안 됩니다. 그러기에 사도 바울과 같은 위대한 분도 “나는 날마다 죽노라”(고전 15:31)고 하였습니다.

우리의 옛 성품을 완전히 죽여 없애야지, 적당히 억눌러 놓으면 언젠가 눌렸던 용수철이 튀어 오르듯이 옛 기질이 폭발하고 맙니다. 그리하여 그 동안 쌓아놓았던 성과를 물거품으로 만들어 버립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의 옛 기질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여야 합니다.

또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말씀하시기를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종이 상전보다 크지 못하고 보냄을 받은 자가 보낸 자보다 크지 못하니 너희가 이것을 알고 행하면 복이 있으리라”고 하셨습니다. 상전이신 예수님께서도 이처럼 섬기셨는데 하물며 예수님의 종 된 우리가 섬기는 것은 당연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신약성경을 보면, 사도들은 항상 자기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종이라는 사실을 잊지 않았음을 알 수 있습니다. 로마서 1장 1절에서 사도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의 종 바울”이라고 자신을 소개합니다. 베드로후서 1장 1절에 보면 사도 베드로 역시 “예수 그리스도의 종과 사도인 시몬 베드로”라고 자신을 소개합니다. 계시록 1장 1절에서 사도 요한은 자신을 예수 그리스도의 “종 요한”이라고 했습니다.

후대에 믿는 우리는 사도들에게 큰 빚을 진 자들입니다. 사도들은 가정도, 직업도 버리고, 안일한 생활에 대한 미련도 버리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 생애를 바쳤습니다. 사도들의 생애는 철저하게 섬기는 삶이었습니다. 사도 요한을 제외하고 모든 사도가 자기들의 목숨을 순교의 제물로 바쳤습니다. 따라서 이처럼 거룩한 사도들이 자기들을 종으로 자처했다면 부족한 우리로서는 더 말할 나위가 없지 않겠습니까?

한편, 예수님께서 제자들의 발을 씻기신 것은 섬기는 삶과 더불어 구속의 진리를 가르치기 위함이었습니다. 한 사람씩 발을 씻기다보니 시몬 베드로의 차례가 되었습니다. 베드로가 말하기를 “주여 주께서 내 발을 씻기시나이까” 하니, 예수님께서 대답하시기를 “나의 하는 것을 네가 이제는 알지 못하나 이 후에는 알리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수긍하지 않고 “내 발을 절대로 씻기지 못하시리이다”라고 했습니다. 그는 선생이신 예수님께서 제자들의 발을 씻기시다니,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내가 너를 씻기지 아니하면 네가 나와 상관이 없느니라”고 하시니, 시몬 베드로가 말하기를 “주여 내 발 뿐 아니라 손과 머리도 씻겨 주옵소서”라고 했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이미 목욕한 자는 발 밖에 씻을 필요가 없느니라 온 몸이 깨끗하니라”고 하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은 이미 목욕한 자입니다. 다시 말하면, 이미 죄 사함을 받았습니다. 인류의 조상 아담에게서 물려받은 원죄와 우리가 범한 자범죄를 다 용서 받았습니다. 이에 대하여 로마서 8장에는 “1)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2)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면 발을 씻는 것은 무슨 뜻일까요? 그것은 그리스도인들이 성화를 위해서 매일같이 자신을 반성하고 지은 죄를 회개함으로 용서 받는 것을 의미합니다. 죄에도 종류가 있습니다.

요한일서 5장 16절로 18절에 이 같이 말씀합니다. “16)누구든지 형제가 사망에 이르지 아니한 죄 범하는 것을 보거든 구하라 그러면 사망에 이르지 아니하는 범죄자들을 위하여 저에게 생명을 주시리라 사망에 이르는 죄가 있으니 이에 대하여 나는 구하라 하지 않노라 17)모든 불의가 죄로되 사망에 이르지 아니하는 죄도 있도다 18)하나님께로서 난 자마다 범죄치 아니하는 줄을 우리가 아노라 하나님께로서 나신 자가 저를 지키시매 악한 자가 저를 만지지도 못하느니라”

그리스도인들도 이 땅에 사는 동안 알게 모르게 죄를 짓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은 사망에 이르는 죄를 짓지 않습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을 훼방하고 배교하는 죄를 짓지 않습니다. 그런 점에서, 그리스도인들은 이미 목욕한 사람과 같아서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는 인정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들도 살아가면서 여러 가지 허물과 죄를 범합니다. 그것은 마치 목욕한 사람이 발을 더럽힌 것과도 같습니다. 그러므로 외출했다가 집에 돌아오면 발을 씻듯이 우리는 매일 지은 죄를 나중으로 미루지 말고 회개함으로 항상 정결한 마음상태를 지켜나가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자기 죄를 인정하고 회개할 때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죄를 용서해 주십니다. 그와 동시에, 회개할 때 우리의 교만한 마음이 겸손한 마음으로 바뀝니다. 이렇게 볼 때, 그리스도인에게 회개생활은 매우 중요한 것입니다. 자칫 교만한 생각을 하면서 지내다가도 회개하는 시간, 교만을 버리고 다시금 겸손한 마음을 회복하게 됩니다.

믿지 않는 세상 사람들은 그리스도인들이 회개하는 것을 보면서 “무슨 죄를 그렇게 많이 졌기에 매일 눈물을 흘리면서 회개하느냐?”고 말합니다. 그것은 저들이 죄가 무엇인지 알지 못한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때와 얼룩으로 더러워진 옷에는 오물이 튀어도 별 표시가 나지 않습니다. 그러나 깨끗하게 세탁한 흰옷에는 아주 작은 오물만 튀어도 선명하게 드러납니다.

우리의 마음도 이와 같습니다. 구원 받지 못한 사람들의 마음은 죄로 더럽게 얼룩져 있으므로 죄에 대하여 예민하게 반응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죄를 짓고서도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 못합니다. 반대로, 그리스도인들은 주님의 보혈로 그 양심이 정결케 되었으므로 아주 작은 죄를 범했을지라도 곧 바로 양심에 가책을 느끼고 회개합니다. 회개하지 않고 버티려고 하면 할수록 고통을 느낍니다. 다윗은 시편 32편에서 고백하기를 “3)내가 토설치 아니할 때에 종일 신음하므로 내 뼈가 쇠하였도다 4)주의 손이 주야로 나를 누르시오니 내 진액이 화하여 여름 가물에 마름 같이 되었나이다 5)내가 이르기를 내 허물을 여호와께 자복하리라 하고 주께 내 죄를 아뢰고 내 죄악을 숨기지 아니하였더니 곧 주께서 내 죄의 악을 사하셨나이다”고 했습니다.

겸손과 회개는 별개의 것이 아니라 언제나 함께 하는 것입니다. 죄를 범하고도 회개하지 않으면 사람이 교만하게 변합니다. 죄는 사람을 교만하게 만듭니다. 그 이유는 죄의 본질은 하나님을 거역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무엇이든지 하나님을 거역하는 것은 교만한 정신에서 나온 것입니다.

아담이 선악과를 따먹고 타락한 것도 사단의 말을 듣고 하나님처럼 되고자 하는 교만한 정신을 갖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런 교만한 정신을 갖고서는 하나님을 올바르게 섬길 수 없습니다. 하나님도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이 남들 섬길 리 만무합니다. 그러나 교만은 패망의 선봉임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교만한 자를 대적하시고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주십니다.



사랑하는 성도님들, 디모데후서 3장에 보면 교만은 말세 사람들의 특성 가운데 하나입니다. 그것은 말세가 되면 사람들이 그만큼 하나님을 멀리 떠날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교만한 정신이 지배하는 세상을 보면서 이 시대가 말세임을 알아야 합니다.

이러한 때에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할 일은 예수 그리스도의 겸손을 본받아 섬김의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밤이 어두울수록 빛의 존재가 더욱 드러나듯이, 우리는 섬김의 삶을 통해서 그리스도의 빛을 나타내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주님의 몸 된 교회에서 섬김의 삶을 실천해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형제들을 섬길 때 우리 교회는 더욱 사랑이 넘치는 신앙의 공동체가 될 것이요 이를 본 불신 이웃들이 과연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들은 다르다고 할 것입니다. 아무쪼록 주님을 본받아 섬김의 삶을 실천함으로써 불의한 이 세상에 사랑이 충만한 하나님 나라를 확장시켜 나가는 데 쓰임 받는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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