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긍휼히 여기는 마음 (마 8: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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긍휼히 여기는 마음 (마 8:1-4)


(본 설교문은 맥스 루케이도 목사님의 책 “예수님처럼”에 나오는 내용으로 한 설교입니다. 내용이 은혜스러워 이곳에 올립니다)

잠깐 여러분의 손을 한번 보기 바랍니다. 손등에서 손바닥에서. 손가락도 눈여겨보십시오. 그리고 손가락 마디 마디를 매만져보십시오. 감각이 느껴집니까?

누군가 여러분의 손에 대해 다큐멘터리 영화를 찍는다면 어떻게 될까? 제작자가 당신의 사연을 소개하되 당신의 손의 일생을 바탕으로 한다면? 우리는 무엇을 보게 될까? 누구나 마찬가지겠지만 영화는 갓난 아이의 꼭 뀐 주먹으로 시작될 것이다. 이어 엄마의 손가락을 붙들고 있는 조그마한 손이 클로즈업 될 것입니다 그 다음은? 걸음마를 배우느라 의자를 붙잡는 손? 혼자 먹는 법을 배우느라 숟가락을 놀리는 손?

그리 오래지 않아 우리는 당신의 손에 애정이 담긴 모습을 보게 될 것입니다.
아빠의 얼굴을 어루만지거나 강아지를 토닥여 주는 손. 역시 오래지 않아 당신의 손이 공격의 도구가 되는 모습도 보게 될 것입니다. 형을 밀치거나 장난감을 홱 잡아 뺏는 손. 우리 모두는 손의 용도가 생존 그 이상의 것이라는 사실을 일찍부터 알고 있습니다 . 손은 감정을 표현하는 도구입니다. 똑같은 손으로 도움을 줄 수도 있고 상처를 줄 수도 있습니다. 내뻗을 수도 있고 움켜쥘 수도 있습니다. 사람을 받쳐 올릴 수도 있고 밀쳐 내릴 수도 있습니다.

당신의 다큐멘터리 영화를 친구들에게 보여준다면 그 안에는 분명 자랑스러운 순간들이 있을 것입니다. 선물을 건네주고 상대의 손가락에 반지를 끼워주고, 상처를 싸매주고, 식사를 차려주고 가지런히 기도하던 손,
한편 그와는 다른 장면들도 있을 것입니다. 남에게 손가락 질 하며 주먹을 휘두르던 손. 주기보다는 받는데, 베풀기보다는 요구하는데. 사랑하기보다는 상처 주는데 익숙하던 손.

오. 손의 위력이여! 제 멋대로 놓아두면 손은 흉기로 둔갑합니다. 권력 때문에 타인을 할퀴고, 나 먹고 살려고 이웃을 누르며 쾌락을 찾아 남을 유혹하는 도구가 됩니다. 하지만 잘만 관리하면 우리의 손은 은혜의 도구가 됩니다. 하나님의 손에 놓여진 도구 정도가 아니라 아예 하나님 자신의 손이 됩니다. 하나님께 내어 드릴때 우리의 열 손가락은 그야말로 천국의 손이 됩니다.

예수님이 그렇게 하셨습니다. 우리 주님은 그 손을 철저히 하나님께 내어드렸습니다. 그분의 손의 다큐멘터리 영화에는 욕심부리며 움켜쥐거나 부당하게 손가락질 하는 장면이 전혀 없습니다. 오직 그분의 동정 어린 손길을 갈구하는 이들의 장면만이 끊임없이 이어질 뿐입니다. 아이들을 안고 온 부모들, 두려움 중에 나아온 가난한 이들. 슬픔을 짊어진 죄인들. 일단 나아온 사람은 모두가 그분의 만지심을 입었습니다. 그리고 만지심을 입은 사람은 모두가 변화되었습니다. 그렇게 주님의 만지심을 입어 변화된 사람들 중 가장 극적인 경우는 뭐니뭐니해도 마태복음 8장에 나오는 무명의 문둥병자일 것이다.

예수께서 산에서 내려오시니 허다한 무리가 좇으니라. 한 문둥병자가 나아와 절하고 가로되 “주여 원하시면 저를 깨끗게 하실 수 있나이다”하거늘 예수께서 손을 내밀어 저에게 대시며 가라사대 “ 내가 원하노니 깨끗함을 받으라” 하신대 즉시 그의 문둥병이 깨끗하여 진지라. 예수께서 이르시되 “ 삼가 아무에게도 이르지 말고 다만 가서 제사장에게 네 몸을 보이고 모세의 명한 예물을 드려 저희에게 증거하라” 하시니라(1-4절)

마가와 누가도 똑같은 기사를 전하고 있다. 그러나 세 기자 모두에게 미안한 말이지만 누구의 기록도 내용이 충분치 않다. 남자의 병명과 결단을 나와 있지만 그 나머지는? 그냥 의문으로 남아 있을 뿐이다. 이름도 과거 이력도 인물 묘사도 복음서 기자들은 전혀 들려주지 않고 있다.

이따끔 씩 나는 호기심에 이끌려 마음껏 상상의 나래를 펼 때가 있습니다, 여기서도 한번 그래볼까 한다. 예수님의 긍휼의 손길을 입었던 이 남자에 대해 마음껏 상상의 나래를 펴보라는 것입니다. 그는 한번 등장하고 한번 만지심을 입습니다. 그러나 그 한번의 만지심이 그의 삶을 영원히 바꿔 놓았다. 그의 사연은 이런 것이 아니었을까?

지난 5년 동안 아무도 내게 손을 댄 사람이 없었다. 단 한 사람도 내 아내도 내 자신도 친구들도 아무도 내게 손을 대지 않았다. 그들은 나를 보았다. 내게 말도 했다. 나는 그들의 말소리에 사랑을 느꼈다. 그들의 눈빛에서 관심을 보았다. 그러나 그들의 촉감은 느낄 수 없었다. 손길이 닿은 일이 전혀 없었다. 단 한 차례도, 아무도 네게 손을 대지 않았다.

다른 이들에게는 흔해 빠진 일들을 나는 턱없이 탐냈다. 악수, 따뜻한 포옹, 어깨를 툭 쳐서 날 불러주는 것, 마음을 훔치는 입맞춤, 나의 세계에서 사라져 버린 순간들이었다. 아무도 내게 손을 대지 않았다. 아무도 내 몸에 부딫치는 일도 없었다. 무리 속에 섞여 들여 몸을 부딫치며 어깨를 부벼댈수 만 있다면 이 세상 어떤 일도 다하지 않았으리라. 그러나 꼬박 5년 동안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당연한 일 아닌가. 나는 거리에 나다녀서는 안되었다. 랍비들 조차도 나에게 거리를 두었다. 나는 회당에 들어가는 것도 허용되지 않았다. 우리 집에서도 나를 반겨주지 않았다. 나는 그야말로 접촉해서는 안될 대상이었다. 문둥병자였다. 아무도 내게 손을 대지 않았다. 오늘까지.

내가 이 남자의 사연을 상상해 보는 것은 신약시대에 문둥병이 가장 무서운 병이었기 때문이다. 문둥병은 온 몸이 패여 문드러지는 병이다. 손가락은 꼬부라져 비틀어진다. 살갗의 검버섯은 색깔이 흐려지면서 악취를 풍긴다. 문둥병의 유형중에는 말초신경이 마비돼 손가락, 발가락은 물론 손 발이 통째로 떨어져 나가는 것도 있다. 문둥병과 죽음은 한 치 건너였다.

신체적 영향 못지 않게 사회적 결과도 심각했다. 문둥병은 전염병으로 통하기 때문에 문둥병자는 문둥병자 거주지로 추방, 격리되었습니다.

성경에서 문둥병자는 철저히 버림받은 자들의 상징이다. 원치 않는 병에 걸려 아는 사람들한테 거부당하고 모르는 이들한테 외면 당한 채 감당할 수 없는 미래의 운명을 선고받은 이들, 이렇게 버림받은 이들마다 기억에서 결코 지울 수 없는 한 날이 있었을 것이다. 전혀 딴 세상을 살데 되리라는 청천벽력 같은 사실 앞에 마주서야 했던 그날 어느 해 추수철, 낫을 쥔 손이 왠지 힘이 없었다. 손가락 끝에 감각이 오지 않았다. 처음엔 한 손가락이 그러더니 점차 다른 손가락도 그랬다. 조금 지나서는 아예 기구를 손에 쥐어도 거의 느끼지 않았다. 환절기가 되면서 감각이 완전히 잃어 버렸다. 손잡이를 쥐고 있는 손이 꼭 남의 손 같았다. 감각이 사라졌다. 아내에게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아내도 낌새를 채고 있을 터였다. 어떻게 모를 수 가 있겠는가? 마치 상처 입은 새처럼 , 내 몸에 달린 손이 몸과 따로 놀았다.
어느 날 오후 세수를 하려고 대야에 손을 담갔다. 물이 붉은 빛으로 변했다. 손가락에서 피가 나고 있었다. 피가 철철 흘렀다. 나는 다친 줄도 몰랐다. 어떻게 손을 벤 것일까? 칼에? 날카로운 쇳날에 스친 것일까? 그랬겠지 그러나 감각이 전혀 없었다.

“ 당신 옷에도 묻었어요” 아내가 부드럽게 말했다. 아내는 내 뒤에 있었다. 아내를 보기 전 나는 내 옷에 묻은 붉은 핏방울을 보았다. 그렇게 내 손을 쳐다보며 대야 앞에서 도대체 얼마를 서 있었던 것일까. 내 인생이 완전히 뒤바뀌고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 제사장에게 보고하러 갈 때 저도 함께 함께 갈까요?”아내가 물었다.
“ 아니오. 혼자 가겠소” 한 숨이 나왔다.

나는 돌아서 아내의 젖은 눈을 보았다. 아내 옆에는 세 살 난 딸아이가 서 있었다. 나는 몸을 구부려 딸아이의 얼굴을 쳐다보며 말없이 뺨을 어루만져 주었다. 무슨 말을 하랴? 다시 일어서 아내를 보았다. 아내는 내 어깨에 손을 얹었다. 나 또한 아직 성한 손으로 아내의 어깨에 손을 대었다. 그것이 우리의 마지막 접촉이 될 것이다.
그 뒤 5년이 지나도록 내게 손을 대지 않았다 오늘까지

제사장은 나를 만지지 않았다. 그는 천으로 둘둘 말린 내 손을 쳐다보았다. 슬픔에 잠겨있는 내 얼굴을 보았다. 그날 들은 말에 대해 그를 탓해 본 적은 한 번도 없다. 그는 그저 규정대로 하고 있었을 뿐이다. 제사장은 입을 가리고 손바닥을 앞으로 하여 손을 내민 뒤 나에게 말했다 “ 부정하다” 그 한 마디 선언으로 나는 가족과 농장과 미래와 친구를 잃었다.아내는 옷 보따리와 빵과 동전을 들고 성문으로 나를 찾아왔습니다. 아내는 말이 없었습니다. 친구들도 모였습니다. 그들의 눈 속에서 내가 본 것은 그 뒤로 모든 이들의 눈 속에서 본 것의 전조와 같았다 . 두려움 반 연민 반의 그 눈빛, 내가 다가서자 그들은 물러섰다. 내 병에 대한 두려움이 내 마음에 대한 연민보다 컸던 것이다. 그렇게 그들은 그리고 이후로 내가 만난 모든 이들은 뒷걸음을 쳤다.

문둥병자를 추방하는 것은 가혹하고 불필요한 일처럼 보인다. 그러나 병자를 격리시키는 것은 고대 중동의 문화만은 아니다. 격리 거주지를 만들거나 병자 앞에서 입을 가리지는 않을지 몰라도 우리 역시 분명히 벽을 쌓고 눈을 돌린다. 거창하게 문둥병이 있어야만 따돌림을 받는 것도 아니다.

내 슬픈 기억 중 하나는 4학년 때 친구인 제리에 대한 것이다. 제리와 우리 대 여섯 명은 늘 놀이터에 함께 붙어살았다. 어느 날 나는 제리와 같이 놀려고 그 집에 전화를 걸었다. 술 취한 사람이 전화를 받더니 다짜고짜 욕을 해대며 오늘이고 언제고 제리는 밖에 못나간다고 네게 엄포를 놓았다. 나는 그 일을 친구들에게 말했다. 친구 중 하나가 제리의 아버지는 알코올 중독이라고 말했다. 당시에 나도 그 말뜻을 몰랐겠지만 금방 알게 되었다. 2루수 제리, 빨간 자전거를 타던 제리. 모퉁이 집에 살던 내 친구 제리. 그가 술주정뱅의 아들 제리“로 바뀌는 순간이었다. 아이들은 매정할 수 있다. 왠지 모르지만 우리도 제리에게 매정했다. 제리는 병자였다 문둥병자처럼 제리도 자기 잘못도 아닌 조건 때문에 고생했다. 문둥병자처럼 제리도 동네 밖으로 내몰렸다.

이혼한 사람은 이 기분을 안다. 장애인들도 안다. 실직자들도 겪어 보았고 못 배운 이들도 당해보았다. 어떤 사람들은 미혼모를 피한다. 우리는 우울한 이들을 경원시하고 불치병 환자를 외면한다. 이민자 타운, 노인 요양소, 저능아 학교, 중독자 센터 범죄자 감옥이 따로 있다.

나머지 사람들은 단순히 이 모든 것을 피하려 한다. 지금도 제리처럼 자진 유배의 삶을-거절에 대한 두려움과 마지막 접근 시도 때의 아픈 기억에 사로잡혀 조용히 외롭게 살아가는 이들이 얼마나 많은지 하나님만이 아실 것이다. 이들은 다시 상처를 받느니 차라리 아예 접촉을 피하는 쪽을 택한다.

아, 나를 보는 사람들의 눈빛이 얼마나 싫었던가? 문둥병 5년에 양손이 뭉툭해졌다. 손가락 끝이 덜어져 나갔고 한쪽 귀와 코도 살점이 떨어져 나갔다. 나를 보면 아버지들은 자식들을 붙들었다. 어머니들은 얼굴을 가렸다. 아이들은 손가락질하며 쳐다보았다.
문드러진 상처는 몸에 걸친 누더기로 가릴 수 없었다. 눈 속의 분노 또한 얼굴을 두른 수건으로 가릴 수 없었다. 아예 분노를 숨기려 하지도 않았다, 말없는 하늘에 흉측해진 주먹을 휘두르며 하소연 하던 밤이 얼마나 많았던가? 도대체 내가 무슨 짓을 했다고 이래야 합니까? 그러나 한번도 대답은 없었다.

내가 죄를 지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고 우리 부모가 죄를 지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다. 나도 모른다. 내가 아는 거라고는 모든 것이 정말 지긋지긋해졌다는 것이다. 격리지역 악취 구덩이에서 자는 것도 지겹다. 사람들에게 내 존재를 알리기 위해 목에 달아야 하는 저주스러운 방울도 넌더리난다. 그따위 방울이 필수품이라도 되는 것처럼. 한번 누가 쳐다보기만 해도 광고가 시작된다. “ 부정하다” 부정하다! 부정하다!

몇 주전 감히 우리 동네까지 걸어가 보았다. 동네 안으로 들어갈 생각은 전혀 없었다. 그저 우리 밭을 다시 한번 보고 싶었다. 우리 집을 다시 한번 보고 싶었다. 행여라도 아내의 얼굴을 보고 싶었다. 아내는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풀밭에서 노는 아이들 몇 이 보였다. 나는 나무 뒤에 숨어 아이들이 뛰고 달리는 모습을 지켜 보았다. 얼굴이 어찌나 해맑고 웃음이 어찌나 마음을 끌던지 한 순간 정말 그 한 순간 나는 더 이상 문둥병자가 아니었다. 나는 농부였다. 아버지였다. 남자였다.

나는 아이들의 행복에 도취돼 나도 모르게 나무 뒤에서 걸어 나와 등을 꼿꼿히 펴고 심호흡을 했다. 그때 아이들이 나를 보았다. 뒤로 물러설 겨를도 없이 아이들 눈에 띄고 말았다. 아이들은 비명을 질렀다. 그리고 뿔뿔이 흩어졌다. 다들 떠난 자리에 꼭 한 아이가 우두커니 남아있었다. 아이는 동작을 멈추고 나 있는 쪽을 쳐다보았다. 나도 모른다. 확실히 말할 수 없다. 그러나 그 아이는 내 딸 같았다. 꼭 내 딸 같았다. 나도 모른다. 확실히 말할 수 없다. 그러나 그 아이는 아버지를 찾고 있는 것 같았다 .

내가 오늘 이런 행동을 하게 된 것도 바로 아이의 그 눈빛 때문이었다. 물론 무모한 일이었다. 물론 모험이었다. 하지만 이 마당에 나한테 손해 볼 것이 뭐 있겠는가? 그는 자칭 하나님의 아들이다. 문둥병자의 주제넘은 하소연에 나를 죽이든지 아니면 내 부탁을 들어주어 병을 고쳐주든지 둘 중 하나겠지 그게 내 생각이었다. 그에게 가는 내 태도는 사뭇 도전적이었다. 나를 움직인 것은 믿음이 아니라. 절망에 찬 분노였다. 내 몸에 이 재앙을 내린 것은 하나님이니 하나님의 아들이 고치든 결판을 내든 알아서 하겠지.

그러다 나는 그 분을 보았다. 그리고 그분을 보는 순간 나는 변했다. 알다시피 나는 시인이 아니라 농부이다. 내가 본 모습을 마땅히 표현할 길을 나는 모른다. 이것만은 말할 수 있다. 유대의 아침은 때로 너무 싱그럽고 일출이 장관이어서 그저 아침을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전날의 더위와 과거의 상처를 다 잊어버리고 만다.그분의 얼굴 속에서 나는 유대의 아침을 보았다. 그 분이 입을 떼시기 전에 나는 그분의 사랑을 알았다. 그분이 이 병을 나 못지 않게 아니 아보다 더 미워하고 계심을 웬지 알 것 같았다 나의 원한은 믿음이 되었고 나의 분노는 희망이 되었다.

돌 뒤에서 나는 그분이 산에서 내려 오는 것을 보았다. 수많은 사람들이 뒤따르고 있었다 나는 그분이 몇 발자국 사이로 가까워질때까지 기다렸다. 그리고는 앞으로 나갔다.
“주여!”
그분은 걸음을 멈추고 나를 바라보았다. 여남은 명 다른 사람들도 나를 보았다. 두려움의 물결이 무리를 훑고 지나갔다. 여기저기서 팔이 얼굴로 올라갔다. 아이들은 부모 뒤로 숨었다. “부정하다!” 누군가 소리쳤다. 나는 그들을 욕하지 않는다. 내 모습은 산송장이나 다를 바 없었다. 그런데 그들의 말이 들리지 않았다. 그들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겁에 질린 그런 모습은 수천 번도 더 본 것이었다. 그러나 그분의 긍휼은 한 번도 보지 못한 것이었다. 모두가 뒷걸음질쳤지만 그분만은 아니었다. 그분은 내 앞으로 다가왔다. 내 앞으로.

5년 전 아내가 내 앞으로 다가왔었다 내 앞으로 온 것은 아내가 마지막이었다. 그런데 지금 그분이 내 앞으로 왔다 나는 움직이지 않았다. 다만 이렇게 말했을 뿐이다.
“원하시면 저를 깨끗게 하실 수 있나이다.‘
그분이 말 한마디로 나를 깨끗하게 하셨다 해도 나는 감격을 이기지 못했을 것이다. 그분이 기도로 나를 깨끗게 하셨다 해도 나는 기뻤을 것이다. 그러나 그분은 나에게 말하는 것으로 만족하지 않았다. 그분은 내 곁으로 왔다 그리고 나에게 손을 댔다. 5년전 아내가 내 몸에 손을 댔었다. 그 뒤로 아무도 내게 손을 대지 않았다. 오늘까지

“내가 원하노니 깨끗함을 받으라! 그분의 말은 그 손의 감격만큼이나 부드러웠다”
밭고랑으로 물이 흐르듯 내 몸에 기운이 밀려 들었다. 그리고 그 순간, 바로 그 순간. 마비됐던 부위가 온기가 느껴졌다. 말라비틀어진 부위에 힘이 느껴졌다. 구부렸던 등을 펴고 고개를 들었다. 그분의 허리께 머물던 내 눈으로 이제 그분의 얼굴을 보게 되었다. 그분의 미소띤 얼굴을.

그분은 손을 오므려 내 귓전에 댄 뒤 바짝 곁으로 다가왔다. 어찌나 가깝던지 그분의 따뜻한 호흡과 젖은 눈빛을 그대로 느끼고 불 수 있었다. “ 삼가 아무에게도 이르지 말고 다만 가서 제사장에게 네 몸을 보이고 모세의 명한 예물을 드려 저희에게 증거하라”

그래서 나는 지금 거기 가고 있는 중이다. 가서 제사장에게 내 몸을 보이고 그를 끌어안을 참이다. 아내에게 내 몸을 보이고 아내를 끌어 안을 것이다. 딸아이를 번쩍 들어올려 끌어안아 줄 것이다. 그리고 더러운 내 몸에 손을 댄 그분을 나는 영원히 잊지 않을 것이다. 그분은 말 한마디로도 나를 고칠 수 있었다. 그러나 그분은 단순한 치료 이상의 것을 나에게 주기 원했다. 나를 존중하고 내 가치를 인정하며 네게 신앙을 주기 원했다. 생각해보라... 사람도 손대지 않던 무가치한 자가 하나님의 만지심을 입는 존귀한 자가 되었으니....

알다시피 손을 댔기 때문에 병이 나은 것은 아니다. 마태는 병을 고친 것이 그리스도의 손이 아니라 선포의 말씀임을 분명히 밝히고 있다. “ 예수께서 손을 내밀어 저에게 대시며 가라사대 ‘내가 원하노니 깨끗함을 받으라’ 하신대 즉시 그의 문둥병이 깨끗하여 진지라”(마8:3)
질병은 예수님의 말씀 한 마디로 사라졌다
그러나 외로움은 예수님의 손길로 치유되었다

아, 신앙의 손길의 위력이여! 당신도 알지 않는가? 당신은 치료해준 의사, 당신의 눈물을 닦아준 교사 장례식때 당신의 손을 잡아주던 손, 어려울때 어깨를 감싸주던 또 다른 손, 새 직장에 갔을때 반겨주던 악수, 병낫기를 위한 목사의 기도, 신앙의 손길의 위력을 우리도 알고 있지 않은가? 우리도 똑같이 베풀 수 없을까?

이미 하고 있는 이들도 많다. 주님 자신의 성숙한 치유의 손길을 베푸는 이들도 있다. 그 손으로 병자를 위해 기도하고 연약한 자를 섬긴다. 직접 만나 만져주지 못하는 이들은 그 손으로 편지를 쓰고 전화를 걸고 파이를 굽기도 한다. 한번의 손길의 위력을 당신도 배웠다. 그러나 우리 중에는 곧잘 잊어버리는 이들도 있다. 마음은 원이로되 기억이 안 날뿐이다. 한 번의 손길이 얼마나 요긴할 수 있는지 우리는 망각한다. 말이나 어조나 행동에 있어 혹 잘못하면 어쩌나 몸을 사린다. 엉성하게 하느니 아예 손을 떼버린다.

예수님이 같은 실수를 범하지 않으셨으니 얼마나 다행인가? 잘못할까 두려워 아예 아무것도 안하는 사람이 있다면 세상의 문둥병자들의 입장을 마음에 새길 필요가 있다. 그들은 이것 저것 고르지 않는다. 까다롭지 않다. 다만 외로울 뿐이다. 그들은 신앙의 손길을 애타게 기다리고 있다.
예수님은 세상의 접촉해서는 안 될 대상을 만져주셨다. 당신도 똑같이 하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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