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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부장의 믿음을 본받는 성도 (눅 7: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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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부장의 믿음을 본받는 성도 (눅 7:1~10)
- 설교자 : 김양인 목사

오늘 우리는 예수님의 칭찬을 들었던 한 백부장에 관해서 살펴보려고 합니다. 백부장은 로마 군대에서 중추적인 역할을 하는 장교로서 백 명의 군사를 통솔했습니다. 더구나 이 백부장은 식민지인 유대 땅의 주둔군 장교였으므로 막강한 세도를 부릴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 당시 로마 제국의 위세는 지금 미국보다 더 강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그런데 본문에 나오는 백부장은 여느 군인과는 달리 고상한 인품의 소유자였던 것 같습니다. 대체로 군인들은 직업의 특성상 거만하고 거친 성격을 갖기 쉽습니다. 그렇지만 이 백부장은 유대인들을 멸시하지 않았고 오히려 그들에게 호의를 갖고 회당을 지어주기까지 했습니다. 그 당시 가버나움에는 단 하나의 회당이 있었다고 하는데, 그렇다면 그 회당을 지어준 사람이 바로 이 백부장이었다는 말이 됩니다. 회당을 지어줄 정도였다면 경제적으로 상당히 부유한 사람이었던 것 같습니다.

이 백부장에게 종이 하나 있었는데, 그만 죽을병에 걸려 고통하고 있었습니다. 마태는 그 종의 병이 중풍병이라고 했습니다. 그 당시 종은 노예를 말합니다. 노예는 인권이 없고 마치 소나 말과 같이 주인의 소유물에 불과했습니다. 중병에 걸려 살 가망이 없는 노예는 주인에게서 버림받기가 일쑤였습니다. 그런데도 이 백부장은 자기 종을 똑같은 사람으로 대접했습니다.

더구나 그는 그 종을 사랑한 나머지 죽을병에 걸린 그 종을 살리기 위해 평소에 알고 지내던 유대인 장로들에게 부탁해서 예수님께 도움을 구하기까지 했습니다. 장로들은 예수님께 나아와서 백부장을 위해 간구하기를 “이 일을 하시는 것이 이 사람에게는 합당합니다. 저가 우리 민족을 사랑하고 또한 우리를 위하여 회당을 지었습니다”라고 했습니다. 사실이지, 주둔군 장교가 식민지 백성들로부터 이처럼 칭송을 듣기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것도 이방인이 유대인들에게서 칭찬을 받다니 놀라운 일입니다.

유대인의 장로들이 예수님을 찾아와서 백부장의 선행을 말하고 그의 종을 고쳐주시기를 청했을 때 예수님께서는 흔쾌히 그들의 청을 수락하셨습니다. 본문에 보니 “예수께서 함께 가실쌔”라고 했습니다. 마태복음 8장에 보면, 예수님께서 “내가 가서 고쳐 주리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백부장이 비록 이방인이지만 그의 청을 거절하지 않으시고 기꺼이 들어주셨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사람의 생명을 귀히 여기시는 주님의 마음을 대합니다.

복음서를 보면, 예수님께서 병자들을 고쳐주신 일이 많이 나옵니다. 그 당시 유대인들은 안식일에 병 고치는 것은 안식일을 범하는 것이라고 생각했으나 예수님의 생각은 달랐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안식일에 병 고치신 것을 비난하는 바리새인들에게 “너희 중에 누가 그 아들이나 소나 우물에 빠졌으면 안식일에라도 곧 끌어내지 않겠느냐?”고 하셨습니다. 사람의 생명을 살리는 일은 안식일이라고 금할 것이 아니요 오히려 더욱 힘써야 할 일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생명을 살리는 일이라면 평일이든 안식일이든, 그리고 유대인이건 이방인이건 개의치 않으셨습니다.

이 생명 존중의 사상은 기독교 교리의 중심이 됩니다. 하나님께서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신 것은 우리를 사망에서 건져내어 생명을 주시기 위함이셨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장로들의 부탁을 들으시고 백부장의 종을 살리기 위해 함께 가신 것은 너무나 자연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백부장의 집이 가까운 데까지 이르렀을 때였습니다. 백부장이 급히 벗들을 보내어 말을 전했습니다. “주여, 수고하시지 마옵소서. 내 집에 들어오심을 나는 감당치 못하겠나이다. 그러므로 내가 주께 나아가기도 감당치 못할 줄을 알았나이다” 그러면서 그는 “말씀만 하사 내 하인을 낫게 하소서. 저도 남의 수하에 든 사람이요 제 아래에도 군병이 있으니 이더러 가라 하면 가고 저더러 오라 하면 오고 제 종더러 이것을 하라 하면 하나이다.”라고 하였습니다.

그 말을 들으셨을 때, 예수님께서는 놀라움을 금치 못하셨습니다. 몸을 돌이켜 좇는 무리에게 이르시기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스라엘 중에서도 이만한 믿음은 만나 보지 못하였노라”고 하셨습니다. 백부장의 벗들이 집으로 돌아가 보니 종은 병이 다 나아서 이미 강건해져 있었습니다. 마태복음에는 주님께서 백부장에게 “가라, 네 믿은 대로 될지어다”고 하시니 그 시로 하인이 나았다고 했습니다.

첫 번 째로, 우리는 백부장의 겸손한 믿음을 본받아야 합니다.

유대인의 장로들은 예수님께 나아와 “이 일을 하시는 것이 이 사람에게는 합당하니이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정작 백부장 자신은 주님을 자기 집에 영접하기에 합당치 못하다고 말했습니다. 이는, 백부장이 일부러 겸손한 척 한 말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진심으로 그렇게 말했습니다.

그 당시 경건한 유대인들은 이방인의 집에 들어가지 않았으며, 이방인들과 함께 앉아서 음식을 먹지도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선민인 유대인이 이방인의 집에 들어가거나 함께 음식을 먹게 되면 이방인의 부정에 감염된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백부장은 예수님을 이방인인 자기 집에 모심으로써 이 같은 종교적인 부정에 감염되도록 하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본 것입니다. 그러므로 비록 예수님께서 “내가 가서 고쳐 주리라.”고 하셨지만, 백부장은 예수님을 부정한 자기 집으로 모시는 것이 가당치 않다고 생각하고 사양했던 것입니다. 이로써 우리는 백부장이 얼마나 겸손한 사람이었는가를 알 수 있습니다. 그에게서는 주둔군의 장교로서 교만한 태도를 찾아볼 수가 없습니다.

이와 동시에, 우리는 그가 예수님을 만나 뵙기를 사양한 것은 단순히 종교적인 성결 그 이상의 이유가 있었다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이 사실은 백부장이 예수님을 랍비 이상의 존재로 알고 있었음을 말해 줍니다. 그는 예수님의 신적 권위에 압도되었던 것입니다.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 선 인간이 느끼는 한없는 경외심이 백부장의 영혼을 사로잡았던 것입니다.

창세기 18장에 보면, 하나님께서 두 천사와 함께 사람의 모습으로 아브라함을 찾아오십니다. 그 자리에서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타락한 성읍인 소돔과 고모라를 멸하시겠다는 뜻을 말씀하셨습니다. 그 때, 아브라함은 소돔을 위해 이 같이 간구합니다. “주께서 의인을 악인과 함께 멸하시려나이까 그 성중에 의인 오십이 있을찌라도 주께서 그 곳을 멸하시고 그 오십 의인을 위하여 용서치 아니하시리이까 주께서 이같이 하사 의인을 악인과 함께 죽이심은 불가하오며 의인과 악인을 균등히 하심도 불가하니이다 세상을 심판하시는 이가 공의를 행하실 것이 아니니이까”

하나님께서 대답하시기를 “내가 만일 소돔 성중에서 의인 오십을 찾으면 그들을 위하여 온 지경을 용서하리라”고 하셨습니다. 아브라함이 생각해 보니 자신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하나님께 고하기를 “티끌과 같은 나라도 감히 주께 고하나이다 오십 의인 중에 오인이 부족할 것이면 그 오인 부족함을 인하여 온 성을 멸하시리이까”라고 말씀 드렸습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 대답하시기를 “내가 거기서 사십 오인을 찾으면 멸하지 아니하리라”고 하셨습니다. 아브라함은 이런 식으로 의인의 수를 낮추되 의인이 십 인만 있어도 소돔을 멸하지 않겠다는 하나님의 약속을 받아냈습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에게서 벗이라 칭함을 받은 사람이었지만 거룩하신 하나님을 대면했을 때, 그 자신이 티끌 같음을 고백했습니다.

사도 바울은 “죄인 중에 내가 괴수니라”(딤전 1:15)고 말했습니다. 아브라함이나 바울은 하나님의 특별한 인정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따라서 하나님 앞에서 자기들의 존재를 내세울만도 한데, 그들은 자신을 일컬어 티끌이라, 죄인 중에 괴수라고 했습니다. 바로 이것이 진실한 신앙인의 올바른 자기 인식입니다. 신앙이 깊어질수록 더욱 더 겸손해 지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올바른 모습입니다. 주님께서는 백부장의 겸손한 믿음을 칭찬하셨습니다.

사랑하는 성도님들, 하나님 앞에서 겸손히 자신을 낮추는 여러분 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받으려면 겸손해야 합니다. 사도 베드로는 말씀하기를 “하나님이 교만한 자를 대적하시되 겸손한 자들에게 은혜를 주시느니라. 그러므로 하나님의 능하신 손아래서 겸손하라. 때가 되면 너희를 높이시리라.”(벧전 5:5-6)고 했습니다. 그런즉 백부장의 겸손을 본받으시기 바랍니다.

신앙의 연조가 쌓여갈수록, 교회에서 귀한 직분을 맡을수록, 봉사를 많이 할수록 더욱 겸손한 그리스도인이 되시기 바랍니다. 성도님들께서 그렇게 겸손한 마음으로 주님을 섬길 때 주님의 마음에 합한 자가 되어 더욱 풍성한 은혜를 받아 누리게 되실 것입니다.

두 번 째로, 우리는 백부장의 바른 믿음을 본받아야 합니다.

백부장은 친구들을 주님께 보내어 말하기를 “말씀만 하사 내 하인을 낫게 하소서. 저도 남의 수하에 든 사람이요 제 아래에도 군병이 있으니 이더러 가라 하면 가고 저더러 오라 하면 오고 제 종더러 이것을 하라 하면 하나이다.”고 했습니다. 이 말씀은 예수님의 신적 권위를 고백한 것으로 예수님께 대한 백부장의 절대적인 믿음이 나타나 있습니다. 군인이 상관의 명령에 복종하는 것은 상식이지만, 예수님께서 한 말씀만 하시면 죽을병에 걸린 자기 하인이 살아날 것이라는 생각을 어떻게 이 백부장이 할 수 있었을까요? 그는 주님께서 그의 종을 사로잡은 질병에게 ‘그를 떠나가라’고 명령하시면 그 질병이 떠나가고 건강하게 될 줄로 믿었습니다. 이로써 우리는 백부장이 예수님을 신적인 존재로 믿고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여러분, 이 백부장이 어떻게 이 같은 믿음을 가지게 된 것일까요? 성경에는 이에 대한 설명이 없지만, 그 당시의 상황을 살펴봄으로 그 근거를 찾아볼 수 있습니다. 먼저, 우리가 고려해야 할 점은 그가 가버나움에 살고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가버나움은 예수님께서 공생애 기간의 상당 부분을 보내신 곳입니다. 주님께서는 가버나움에서 가장 많은 기적을 베푸셨습니다. 백부장은 예수님께 대한 소문을 들었을 것입니다. 그는 예수님께서 행하신 모든 기적을 검토해 본 결과, 이 분이야말로 보통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이시라는 믿음을 갖기에 이르렀던 것입니다.

성경에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롬 10:17)고 했습니다. 복음을 듣지 않고 저절로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믿음이 생기는 법은 있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았는데도 믿음이 생길 수는 없습니다. 우리가 항상 예배 생활에 힘쓰고 하나님의 말씀 듣기를 사모해야 하는 이유가 여기 있습니다. 광야는 비가 거의 오지 않으므로 초목이 자라지 못합니다. 반면에 열대우림(熱帶雨林)에서는 비가 많이 내리므로 어딜 가나 울창한 삼림을 이룹니다. 우리의 믿음도 이와 같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자주 들을 때 우리 믿음은 몰라보게 성장하지만, 말씀 듣기를 게을리하면 영적 성장을 기대할 수 없습니다.

시편 19편 10절에 보니, 다윗은 하나님의 말씀에 대하여 “금 곧 많은 정금보다 더 사모할 것이며 꿀과 송이 꿀보다 더 달도다”고 고백했습니다. 다윗과 같이, 성도님들께서도 하나님의 말씀을 송이 꿀처럼 달게 여기시기 바랍니다.

성경에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은 일반 서적과는 차원이 다른 것입니다. 일반 서적은 아무리 고상하고 수준이 높은 책이라도 다 인간의 생각을 기록한 것입니다. 그 속에는 인간의 사상과 철학이 담겨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하나님의 책입니다. 성경의 저자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므로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합니다. 성경 말씀을 읽을 때 우리는 하나님의 뜻을 알 수 있습니다.

그 뿐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은 창조의 능력이 있으며, 죽은 영을 살리고 병든 자를 치료하는 능력이 있습니다. 이에 대하여 성경에는 “하나님의 말씀은 살았고 운동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감찰하나니”(히 4:12)라고 했습니다.

무엇보다도 우리는 성경을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를 발견해야 합니다. 요한복음 5장 39절에서,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시기를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줄 생각하고 성경을 상고하거니와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거하는 것이로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신구약 성경 66권을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야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성경을 주신 목적입니다.

사랑하는 성도님들, 여러분께서 오늘 교회에 나오신 것은 예수님께 대한 믿음이 있기 때문인 줄 압니다. 성경에 입각해서 베드로처럼 예수님께 대하여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고 고백하시고, 도마처럼 “나의 주님이시며 나의 하나님이시니이다”라고 고백하시는 성도님들 되시기 바랍니다.

이와 같은 믿음으로 백부장처럼 예수님께 성도님들의 사정을 아뢰십시오. “예수님, 말씀만 하사 저를 낫게 하소서. ” “주님, 말씀만 하사 저의 삶을 치료하소서.” “말씀으로 저의 문제를 해결해 주옵소서” 라고 기도하십시오. 그리할 때 중병에 걸린 백부장의 종을 살리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동일하신 말씀의 능력으로 성도님들의 당면한 모든 문제를 해결해 주실 것입니다.

셋째로, 우리는 백부장의 절대 순종하는 믿음을 본받아야 합니다.

백부장은 사람을 보내어 주님께 고하기를 “말씀만 하사 내 하인을 낫게 하소서. 저도 남의 수하에 든 사람이요 제 아래에도 군병이 있으니 이더러 가라 하면 가고 저더러 오라 하면 오고 제 종더러 이것을 하라 하면 하나이다”라고 했습니다. 백부장의 말 속에는 주님의 명령에 절대순종 하겠다는 각오가 표명되어 있습니다. 그는 마치 상관의 명령에 복종하는 군인의 자세로서 예수님의 명령을 따르기로 작정했습니다.

작은 도시 국가에 불과했던 로마가 지중해 세계를 지배하는 세계적인 대 제국이 된 것은 강력한 군대를 갖고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용맹으로 치자면 로마군대를 따를 나라가 없었습니다. 전쟁터에 나간 로마 군인들 가운데는 등에 화살을 맞고 죽은 자가 없었다고 합니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그것은 지휘관의 명령 앞에서는 아무리 화살이 억수처럼 쏟아지는 불리한 상황에서도 절대 복종했다는 것입니다.

아마 예수님께서 백부장더러 ‘너의 종을 이리로 데려 오라’고 명하셨다면 백부장은 당장 그 종을 떠메고 주님 앞에 달려왔을 것입니다. 또는 ‘다시 그 종을 집으로 데려 가라’고 명하셨더라도 일언반구 불평 없이 그대로 순종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것이 주님의 명령이기 때문입니다. 기적을 체험하는 믿음은 이처럼 주님의 말씀 앞에서 절대적으로 순종하는 믿음을 말합니다.

오늘날 기독교인들 가운데 활기찬 신앙생활을 하지 못하고 축 늘어진 모습을 하고 있는 사람들이 많은 이유가 무엇입니까?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말씀 보다 내 고집, 내 주장이 앞서니까 순종 할 수 없는 것이요, 순종 하지 않으니까 주님의 기적을 체험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도님들께서는 주님께서 ‘가라’ 하면 가고, ‘오라’ 하면 오고, ‘이것을 하라’ 하면 하는 순종을 통하여 주님의 기적을 체험하시기 바랍니다.

군인은 상관의 명령이 부당하게 보여도 복종합니다. 전쟁터에서는 때로 큰 사상자를 낼 것이 뻔해도 돌격하라는 명령을 내리기도 합니다. 그렇더라도 군인들은 사령관이 내리는 명령에 복종해야 합니다. 만일 부하들이 상관의 명령에 일일이 따지고 든다면, 싸우기도 전에 패하고 말 것입니다. 지휘관들도 인간인지라 때로는 잘못된 명령을 내려서 부하들을 희생시키기도 합니다.

그러나 우리 주님께서는 절대로 착오가 있을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비록 나의 이성이나 경험으로 이해할 수 없을 때라도 주님의 명령이므로 순종하는 성도님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그리할 때 백부장처럼 주님의 칭찬 듣는 큰 믿음의 소유자가 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순종을 잘하려면 교만을 버려야 합니다. 문둥병을 고침 받기 위해 엘리사를 찾아왔던 아람 나라 군대장관 나아만은 엘리사가 하인을 시켜서 “너는 가서 요단강에 몸을 일곱 번 씻으라. 네 살이 여전하여 깨끗하리라.”고 하자, 노발대발하여 당장 자기 나라로 돌아가려고 했습니다. 나아만은 생각하기를 적어도 아람 나라의 군대 장관이 왔으면 선지자가 달려 나와서 장엄하고 번잡한 예식을 베풀고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며 안수하여 병을 고칠 줄 알았는데 단지 요단강에 가서 씻으라고만 하니 순종할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가 부하들의 간곡한 설득에 못 이겨 요단강에 가서 일곱 번 몸을 잠궜더니 온 몸에 퍼졌던 문둥병이 말끔히 떠나가고 온전해 졌던 것입니다.

여기서 엘리사가 나아만에게 요구한 것은 순종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처음에 나아만이 엘리사의 말을 듣고 노를 발한 것은 교만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를 받으려면 하나님의 말씀 앞에 우리의 이론이나 경험 따위를 다 포기해야 하는 것입니다. 백부장과 같이 주님의 말씀에 온전히 순종할 때 위대한 기적을 체험케 되는 것입니다.

일제 때 조만식이라는 분이 있었습니다. 그 분은 오산 학교의 교장을 하였고, 또 평양 YMCA 총무, 조선일보 사장 등을 역임하신 분입니다. 또한 그 분은 평양 장대현 교회의 장로로서 교회를 충성되이 섬겼습니다. 그는 오산학교의 제자인 주기철 목사님이 마산 문창교회에서 목회하고 있는 것을 직접 찾아가서 모셔왔습니다.

한번은 어느 주일날 조 장로님이 급한 일이 생겨서 예배 시간에 오 분 쯤 늦었습니다. 예배당 문을 열고 들어서는데 주 목사님이 “장로님, 예배 시간에 늦었으니 그 자리에 서서 예배드리십시오”라고 했습니다. 그 때 조 장로님은 주 목사님의 지시에 순종해서 예배당 맨 뒤에서 신발을 들고 서서 예배를 드렸습니다. 설교 후에 주 목사님이 “장로님, 기도하시지요.” 하였더니 그는 겸손히 순종하여 주의 종의 마음을 상하게 한 죄를 눈물로 회개하였고, 이로 인해 온 교인이 은혜를 받았다고 합니다. 주 목사님이 오산 학교 시절에 조 장로님의 제자였지만, 조 장로님은 겸손한 자세로 순종하며 교회를 섬겼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님들, 주님의 기적을 체험하기 원하십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명령에 절대 순종하시기 바랍니다. 지난날 백부장의 순종하는 믿음을 기이히 보시고 그의 병든 종을 고쳐주셨던 주님께서 성도님들의 순종하는 믿음에도 역사하셔서 큰 은혜를 베풀어 주실 것입니다.

우리는 성경에 나오는 위대한 믿음의 인물들을 보면서 언제까지나 감탄만 하는 자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본문에 나오는 백부장이 주님을 감동시킨 큰 믿음을 가졌다면 우리도 그와 같은 믿음을 가져야겠다는 결심을 해야 마땅할 것입니다. 야고보 선생은 말씀하기를 “엘리야는 우리와 성정이 같은 사람이로되 저가 비 오지 않기를 간절히 기도한즉 삼 년 육 개월 동안 땅에 비가 아니 오고 다시 기도한즉 하늘이 비를 주고 땅이 열매를 내었느니라.”(약 5:17-18)고 했습니다. 누구나 엘리야처럼 위대한 신앙인이 될 수 있으니 신앙생활에 전력투구하라는 격려의 말씀입니다.

아무쪼록 성도님들께서도 이 백부장과 같이 하나님의 말씀을 사모하시며, 겸손으로 띠 띠고, 그 말씀에 온전히 순종하심으로 구하는 것마다 “네 믿은 대로 될지어다” 하시는 주님의 응답을 받게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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